<단독> ‘슈킹’ 김봉현 30억 미스터리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10.13 15:36:11
  • 호수 1449호
  • 댓글 0개

“돈세탁 당했다” 감쪽같은 배달 사고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라임 사태’ 주범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에게 계좌를 털린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1200억원대 횡령 혐의로 기소돼 2심서도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은 김봉현 전 회장. 그의 이기심으로 한 중소기업은 파산 위기에 놓였다.

2018년 김봉현 전 회장은 수원여객운수(수원여객) 최고재무책임자(CFO) 김광우, 스타모빌리티 사내이사 김중희 등과 공모해 수원여객의 회삿돈 241억원을 빼돌렸다. 이들은 수원여객이 기업을 인수할 것처럼 허위 서류를 작성하고 인수자금을 횡령했다. 실제로 2018년 말 수원여객은 전기버스 생산 협력사 하이테크시스(하이테크)를 인수하겠다며 계약서 한 장 없이 30억원을 송금했다.

달콤한 유혹
작업 당했나

하이테크는 자동차 시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2009년부터 한국지엠의 주거래처였다. 이후 한국지엠이 경영 악화를 겪자 덩달아 18억원의 빚을 떠안게 되며 제품 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돌파구를 찾던 하이테크 측은 거래처를 모색하는 과정서 거래처였던 우노이앤피 사장 정모씨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2018년 정 사장은 하이테크 측에 “경기도의 버스 운영사 수원여객이 전기버스를 생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는 하이테크가 수원여객의 협력사로 일할 수 있도록 중매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2018년 10월19일, 정 사장이 하이테크 측에 전달한 이메일에 따르면 “수원여객이 전기버스 약 100대를 구매하고자 한다”며 “30~40% 물량을 지자체 특색에 맞춰 디자인 및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당사(하이테크)의 역할 및 자세한 내용은 추후 전달하겠다”고 제안했다.

수원여객은 전기버스 제작을 위해 하이테크의 자동차 제작 기술이 필요했다.

그는 “정부 산자부의 추후 계획은 (내연기관 버스를)전기 버스로 단계적인 교체를 하니 좋은 기회라 사료된다”고 덧붙였다.

이후 정 사장은 하이테크 측에 “협업을 원했던 수원여객이 하이테크를 30억원에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이테크는 “직원들만 해고하지 않는다면 흔쾌히 인수해달라”고 했다.

인수계약을 앞둔 상황서 정 사장이 “하이테크 계좌번호를 주면 인수조건으로 30억원을 주겠다”고 하자, 하이테크 측은 그에게 계좌번호를 넘겼다.

2018년 10월26일 수원여객은 하이테크에 30억원을 입금하면서 인수계약서를 보내지 않았다. 당시 수원여객과 하이테크, 우노이앤피 정 사장이 함께 인수계약을 약속한 날이었다. 

수원여객, 하이테크 인수 시도
계약서 한 장 없이 바로 송금


하이테크 측에 따르면 수원여객 관계자는 오지 않았고, 인수계약서조차 보내지 않았다. 수원여객 측은 정 사장에게 “날짜를 다시 잡아 인수계약을 정식으로 하자”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하이테크 측은 정 사장에게 “계약서도 없이 돈부터 보내는 건 껄끄럽다”며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에 정 사장은 “(인수금을)수원여객으로 입금하면 인수에 차질이 생긴다”며 “인수계약을 정식으로 할 때 까지 우리 회사(우노이앤피)로 입금해두면 된다”고 제안했다. 하이테크가 수원여객이 아닌 정 사장에게 30억원을 돌려준 이유다.

실제로 하이테크는 수원여객서 인수금을 받은 당일, 우노이앤피 계좌로 인수금을 반환했다. 

수원여객의 인수계약을 기다리던 하이테크는 원치 않는 답변을 받았다. 2018년 12월14일 수원여객 측은 하이테크에 40억원에 달하는 전환사채 인수계약을 제안했다. 이에 하이테크는 매각하지 않겠다고 정정했다. 

인수를 거절한 하이테크 측은 정 사장에게 전화 통화로 “수원여객에게 30억을 돌려주라”고 재촉했다. 그해 12월31일, 정 사장은 수원여객에 30억원을 돌려줬다는 은행 입출금 거래내역 등을 하이테크 측에게 보여주며 안심시켰다.

2019년 1월경 수원 남부지방검찰청은 김봉현 일당이 수원여객의 자금 241억원을 횡령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수원여객이 수원서부경찰서에 김봉현 일당과 하이테크 등 자금이 유출된 기업을 고소하면서다. 김봉현 일당이 횡령한 수원여객 자금 중 30억원이 하이테크에 인수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수원 남부지검과 수원여객 측 이세중 변호사(법무법인 광장)는 김봉현의 하이테크와의 공모 여부를 따졌다. 검찰 조사에서 하이테크는 “정 사장의 소개로 수원여객을 소개받았을 뿐, 김봉현을 알지 못했다”고 진술하면서 입증할만한 자료를 제출했다.

진술 자료를 확보한 수원 남부지검(권영배 수사관)은 2019년 2월 “(하이테크는)김봉현 일당과 관련이 없음을 확인했다. 하이테크에 입금됐던 30억원이 수원여객에 입금됐으니 걱정말라”며 “수원여객이 김광우에게 인감 및 권한대행을 맡긴 문제로 발생된 사건”이라고 수사를 종결했다.

1년 이상 소식이 없던 수원여객은 2020년 7월16일 법무법인 광장을 통해 지급명령신청서를 하이테크 측에 보냈다. 하이테크 측이 김봉현 일당과 공범으로 몰린 것이다.

돌려주니 
가로챘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김봉현과 고향 친구인 수원여객 최고재무책임자(CFO) 김광우는 2018년 10월경부터 인터넷 및 모바일뱅킹을 통해 회사의 소유 자금을 이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2018년 10월19일부터 2019년 1월16일까지 총 26차례에 걸쳐 수원여객 우리은행 계좌에 예치된 자금 241억원을 하이테크 등에 이체하는 방식으로 횡령했다.


또 김광우는 수원여객 명의로 50억원 상당 한도대출에 신규 가입한 후 대출금을 모두 인출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유출했다. 이 과정서 김광우는 수원여객 대표에게 각종 보조금 수령 신청서 등 서류 작성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받은 법인인감도장, 사용인감도장으로 각종 서류를 위조했다.

수원여객 대표 의지와 상관없는 기업 인수 절차도 밟을 수 있었다.

김봉현 일당의 횡령 사실은 뒤늦게 포착됐다. 수원여객은 2019년 1월16일 김광우가 무단결근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계좌 현황과 잔고를 확인했다. 유동자금이 고갈된 사실을 파악한 수원여객은 김광우의 자금이체 경로를 파악했다.

그 결과, 김광우가 횡령한 241억원 중 30억원이 하이테크로, 나머지는 주식회사 서원홀딩스 등 수원여객과 관련 없는 5개 회사로 이체됐다. 수원여객 자금이 김봉현이 실질적 소유주인 서원홀딩스에 흘러간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지급명령을 받은 하이테크 측은 “정 사장을 통해 수원여객에 30억원을 즉각 돌려줬는데 왜 공범이냐”며 토로했다. 함께 지급명령을 받은 우노이앤피 정 사장과 하이테크는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에 나섰다. 

당시 하이테크 측 변호인은 “김광우가 작성한 하이테크시스 등에 관한 서류들은 모두 전환사채인수계약이나 금전소비대차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음에도 자금을 송금한 후 회계처리를 위해 사후에 작성한 것”이라며 “김광우가 김중희 스타모빌리티 사내이사에게 하이테크 법인인감도장을 만들어 하이테크 명의의 문서에 날인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검찰 조사에서 김봉현 일당은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 행사 범행을 인정했다.

앞서 하이테크의 진술과 소명자료를 통해 수원 남부지검은 “(하이테크가)김봉현 일당과의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수원지방법원은 하이테크가 수원여객에 30억원을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자 하이테크 측은 항소를 제기한 상황이다.

일면식 없는 
회장님 등장

지난 8월30일 판결문에 따르면, 수원지법은 하이테크가 수원여객에 3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유는 정 사장이 김봉현 일당과 수원여객을 인수해 이를 다시 매각하고 수익을 남기기로 한 계획을 세웠다고 봤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김봉현 일당은 수원여객을 탈취하기 위해 각종 허위 서류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공소장을 통해 밝혀졌다. 고소당할 위기에 처하자 김봉현은 자금 횡령의 공범인 김광우를 지난해 1월 해외로 도피시켰다. 잠적한 김봉현은 김광우에게 거액의 도피자금을 보내주고, 다른 나라로 이동시키기 위해 전세기까지 빌렸다.

실제로 김광우는 수원여객 측의 고소장이 접수되기 직전인 2019년 1월 해외로 달아나 1년 넘게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김봉현이 경찰에 검거된 지 20여일 만인 2020년 5월 캄보디아 이민청을 통해 자수했다.

이후 김봉현은 법무법인 2곳에서 8명의 변호인단을 꾸려 대응했다. 당시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수원지검 산업기술범죄수사부(엄희준 부장)의 김봉현 공소장에는 이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른바 ‘수원여객 탈취사건’은 김봉현과 라임 사태의 또 다른 핵심 인물 이종필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둘은 이 사건을 공모하면서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고, 라임 펀드에 모인 투자자들의 돈을 기업사냥에 활용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판결문에는 김봉현이 정 사장으로부터 전기버스 사업과 관련한 인수대상 회사로 하이테크를 소개받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에 김봉현은 2018년 10월경 하이테크 대표이사에게 “수원여객이 하이테크의 전환사채를 인수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송금할 예정인데, 그 돈을 정 사장에게 송금해달라”고 요구했고 김광우는 하이테크에 30억원을 입금했다.

공범 몰린 하이테크 “누군지 전혀 몰랐다”
김봉현 일당 ‘수원여객 탈취사건’ 재조명

하이테크 측은 김봉현이 사전에 지시한 대로 30억원을 우노이앤피 계좌로 전달했기 때문에 공범이라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현재 하이테크 측은 김봉현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그의 계획 또한 몰랐다는 입장이다. 지난 9월 항소를 제기한 하이테크는 제보를 통해 “정 사장은 자신이 아는 변호사를 소개해주면서 ‘승소할 수 있는 사건이니 변호사비’가 필요없다고 안심시켰다”고 토로했다. 

수원여객 측 이세중 변호사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하이테크가 수원여객에 30억원을 입금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묻자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하이테크 측의 항소심을 맡은 손수일 변호사는 <일요시사>와 한 통화서 “민사재판서 왜 하이테크가 공범으로 인식이 됐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며 “김봉현과 하이테크의 관계가 전혀 없었음에도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31일 수원여객은 김봉현 전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승소했다. 앞서 수원여객은 김봉현 등 3명에게 전체 횡령액 206억원 중 피해가 해소된 51억원을 제외한 금액 중 24억1000만원과, 범행에 가담한 하이테크 등 기업을 상대로 30억원 배상요구를 하는 등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수원지법 민사17부(맹준영 부장판사)는 수원여객이 김봉현 등 5명과 이 횡령 사건에 가담한 주식회사 2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지난 8월31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봉현 등은 54억1000만원을 수원여객에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김봉현 일당은 2018년 10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수원여객 회삿돈 241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횡령한 회삿돈 가운데 86억원은 수원여객 계좌로 되돌아가 실제로 사라진 돈의 액수는 155억원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여객이 회수한 86억원 중 30억원은 하이테크 인수자금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김봉현은 라임자산운용 관련 횡령 혐의로 기소돼 1심서 징역 30년을 선고받은 상태다. 김봉현 측은 “수원여객이 업무감독을 소홀히 해 횡령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며 “과실상계나 책임제한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책임제한을 인정하게 되면 가해자로 하여금 불법행위로 인한 이익을 최종적으로 보유하게 해 공평의 이념이나 신의칙을 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배척했다.

“억울하다”
이상한 판결

또 일부 피고가 관련 형사사건 1심 재판서 무죄를 선고받았거나, 기소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횡령 행위에 공모, 가담했고 이들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원고 자금 횡령 행위와 관련돼 원고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한편 <일요시사>와 만난 하이테크 사내이사 최선옥은 “나는 하이테크시스 법인의 사내이사라는 이유로 김봉현과 공모했다는 오해를 샀다”며 “라임 사태가 터졌던 2019년경 나는 제주도서 전기차 충전소와 관련된 개인사업체를 운영했을 뿐, 전혀 김봉현을 몰랐다”고 말했다. 

<smk1@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