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의 변신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10.06 15:14:10
  • 호수 14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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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과 싸우며 찾은 인생 2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가 징역 20년을 확정받았다. 지난달 21일 피해자 A씨는 <일요시사>와 인터뷰서 “동종 범죄를 엄격히 처벌해야 하는데 나를 비롯해 억울한 피해자가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여전히 후유증을 앓는 와중에도 A씨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성폭력, 스토킹 등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나 유가족과 함께 싸워나갈 운명”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A씨는 데이트 폭력이나 성범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입니다”라는 소개로 SNS를 개설했다. A씨는 하루에도 수십건씩 피해자들의 이메일을 받고 해결 방안을 논의한다. “경찰보다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소문났다. 

분노

지난 7월 ‘인천 스토킹 살인사건’도 피해자의 사촌 언니가 A씨와 소통하면서 공론화됐다. 추석 연휴도 유가족에겐 달갑지 않다. 비통한 심정으로 맞이할 이들에겐 위로의 말조차 건네기 어려웠다.

지난해 5월22일 새벽 5시쯤 귀가하던 A씨는 오피스텔 공동현관까지 10여분간 쫓아온 가해자 이모씨에게 ‘뒤돌려차기’를 당해 후두부(뒷머리)를 다쳤다. 기절할 정도로 다친 A씨는 외상성 두개내출혈과 우측 하지의 마비 등의 상해를 입었다.

겨우 회복한 그는 해리성 기억상실로 사건 당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CCTV 기록이 없었다면 가해자는 여전히 활개 치고 다녔을 것이다.


현재 A씨는 기억력 감퇴 등 후유증을 앓고 있다. 마비됐던 다리는 여전히 신발을 신기 어색할 정도로 무감각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했던 그는 ‘범죄피해자 보호법’ 책을 독파했다. 

여러 겹의 책갈피를 뽑아 들던 그는 “후유증으로 가끔 읽었던 페이지를 까먹을 때가 많다”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당당하고 유쾌한 A씨를 만난 기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피해자 처음 본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냐”고 묻자, 그는 “하반신 마비로 누워 있어야 한다는 좌절 속에서 하루아침에 걷게 되자 ‘내가 꼭 할 일이 생겨서 주어진 기회’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범죄 피해자들과 연대를 구성해 공론화에 힘쓰고, 사법부에 잘못된 판단을 바로 고치겠다는 의지다. 

A씨는 지난 7월 <청원24> 홈페이지에 ‘범죄와 관련 없는 양형기준을 폐지시켜 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앞서 1심은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찰의 20년 구형서 8년이 감형된 12년을 선고했으나 2심에선 검찰이 강간미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하자 2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는 청원글을 통해 “가해자는 1심이 끝나고서도 자신의 죄명조차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보복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며 “반성은 당연히 범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인데 어떻게 이게 양형기준의 참작 사유가 되나요?”라고 되물었다.

‘인천 스토킹 살인’ 공론화 동참
성범죄 피해자들 모임 SNS 개설

CCTV 영상서도 혐의가 드러난 명확한 사건서 반성, 음주 등의 이유로 감형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다. 


그는 “‘반성’을 해서 피해자가 빠르게 회복됐는지, ‘초범’이라 범행이 미숙했는지”라며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주는 양형기준이다. 가해자가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제 뇌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A씨는 여전히 신발 신기조차 어렵고, 기억력도 감퇴했다. 

반면, 가해자는 한 여성을 기절할 만큼 폭행하고도 CCTV 사각지대를 파악할 정도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님을 의심케 했다. 실제로 이씨는 A씨를 폭행한 후 CCTV 사각지대로 끌고 가 옷을 벗기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결국 검찰은 지난달 21일, 이씨가 A씨를 CCTV 사각지대로 끌고 가 옷을 벗긴 사실을 입증해 강간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2심도 이를 받아들여 1심보다 무거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 같은 판결에 A씨는 “복수심만 갖는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범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함께하고 해결에 나서는 작가 ‘기저귀’라는 필명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마비됐던 자신의 발이 풀린 걸 보고 의사가 “기적”이라고 말한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A씨는 지난 7월 옛 연인으로부터 살해당한 여성 피해자 사건을 공론화했다. 지난 7월17일 피해 여성 B씨는 인천시 남동구 아파트 복도서 출근하던 중 옛 연인이었던 C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당시 B씨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뛰어나온 딸(6)과 모친이 범행 현장을 목격했다. 범행을 말리려던 모친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양손을 크게 다치게 했다. B씨의 딸은 정신적 충격으로 심리치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 여성과 테니스 동호회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가해자 C씨는 헤어진 이후에도 끈질기게 스토킹했다.

지난 5월경 B씨는 C씨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계속 집을 찾아왔다. 그러자 6월, 인천지법은 C씨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내렸다. B씨 유족에 따르면, 지속적인 스토킹 위협으로 불안했던 피해 여성은 스마트 워치를 차고 다녔다. 

그러던 중 6월29일 경찰이 찾아와 “스마트워치를 반납해달라”고 요청해 사건 발생 나흘 전인 7월13일 자진 반납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이 스토킹 신고에 앙심을 품은 C씨의 보복살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C씨 측은 “스토킹 신고에 따른 보복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부적절한 감형 기준 없애야”
“20년 살더라도 최선 다할 것”

C씨의 주장을 받아들인 검찰은 보복살인보다 형량이 낮은 살인죄를 적용한 사실이 알려졌다. 살인죄의 법정 하한선은 5년 이상의 징역형이지만 특가법상 보복살인이 적용되면 최소 징역 10년이 선고된다.

이에 B씨의 사촌 언니는 A씨에게 연락해 고민을 털어놨다. A씨 조력하에 유가족들은 지난달 8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엄벌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린 지 10일 만인 지난달 18일, 4만4000여명이 탄원에 동의했다. 피해자의 직장 동료와 지인 등 300여명도 유족 측에 탄원서를 전달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살인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C씨의 변호인은 지난달 19일 인천지법 형사15부(류호중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재판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에도 모두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날 B씨의 사촌 언니는 재판이 끝난 뒤 퇴장하는 C씨를 향해 “내 동생 살려내라”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는 법원 앞에서 취재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대책 마련을 잘 해줬으면 좋겠고 사법부가 엄벌에 처할 거라고 믿겠다”고 성토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A씨는 “‘인천 스토킹 살인’ 피해자 사촌 언니의 심정을 공감하는 입장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 공론화하는 과정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A씨는 “스토킹 사건 등의 재발 방지를 위해 피의자가 접근하면 울리는 양방향 스마트 워치를 부활시켜야 한다”며 “많은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초기 수사의 부실 대응, 피해자에게 까다로운 정보 열람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활동

A씨를 변호해온 남언호 변호사는 “가해자는 현 시점으로부터 약 18년8개월 후면 50세의 나이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여전히 재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며 “가중 요건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민하도록 양형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A씨는 <일요시사>와 인터뷰서 “가해자가 복수하러 찾아오면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20년”이라며 “죽을 때 죽더라도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석에도 피해자나 유가족들은 예전처럼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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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