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남의 여권으로 입국해 서울 활보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07.10 11:48:08
  • 호수 14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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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외국인’ 뻥 뚫린 출입국 실상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타인의 여권으로 입국한 일부 외국인은 처벌할 수 없다. ‘난민 신청자’이기에 가능하다. 경찰은 사문서위조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검찰에 넘기지 않았다. 법무부 측은 “난민 신청자라면 강제퇴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난민 신청에는 횟수 제한이 없다. 종교, 정치적 의견 등의 이유를 들면 몇 번이고 가능하다. 불법체류자와의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생존의 욕구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여권을 도용해 국내로 입국하는 사례는 흔한 수법이라고 한다. 공항 화장실서 도용 후 버려진 여권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엄연히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다. 사문서위조 혐의를 받아도 강제퇴거할 수 없다. 난민 신청자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법무부는 경종을 울리고자 “남용적 난민 신청은 불필요한 행정력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난민 신청자는 1만1539명으로 전년(2341명) 대비 5배가량 폭증했다. 코로나 펜데믹이 잠잠해지자 ‘눈치 게임’이 시작된 분위기다.

위조여권 입국했는데…

2016년 2월28일 남의 여권으로 입국한 왕모씨는 난민 비자로 체류 중이다. 전능신교 신도인 왕씨는 종교적 난민으로 신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그가 타인 여권으로 난민 비자를 취득한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안휘(安徽)성에 있는 가족들의 제보로 발각됐다.

여권 주인 경모씨는 중국 강소(江苏)성 출신으로 본국에 있으며 여권상 그는 한국에 난민 비자로 체류 중이다. 왕씨가 경씨의 여권을 도용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왕씨의 신분증 번호로는 입국기록조차 없으며 가족들의 실종신고로 들통났다. 법무부도 왕씨의 신분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타인 여권이라도 정식 발급된 여권이기 때문이다. 엄연히 출입국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다. 출입국관리법 제7조를 위반한 것이다. 이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같은 법 제46조 제1항 제1호에 따라 외국인은 강제 퇴거할 수 있다. 다만, 난민 신청자나 비자를 받은 외국인은 처벌이 어렵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 왕씨는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발당했다. 고발장에는 왕씨의 생년월일, 주소, 신분증 번호 등이 기재됐다. 경씨의 신상정보도 모두 포함됐다. 고발인은 “위조여권으로 입국한 왕씨에게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수사 결과 불송치에 그쳤다.

지난 5월 서울영등포경찰서는 왕씨가 경씨의 여권을 도용한 사실을 인정했다. 불송치한 이유는 공소시효(7년)가 지났기 때문이다. 또 국외범으로 적용돼 국내 재판권이 없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사문서위조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나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왕씨는 난민이기에 처벌 대상서 제외됐다. 남용적 난민 신청의 전형적인 폐해로 볼 수 있다.

2013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전능신교 신도들은 “중국으로부터 탄압을 피한 종교적 난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곱게 보일 수는 없다. 이들의 등장은 난민법 시행, 제주 무비자 입국 시기와 겹친다. 전능신교가 성행한 곳은 중국 허난성이다. 신도들은 이곳의 관문인 쩡조우 공항을 통해 제주로 왔다.

“7년만 버티면 된다” 구멍 난 시스템
불법체류자와 난민 간 ‘모호한 경계’

2013년 당시 제주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다. 제주로 들어와 난민 신청 후 비자를 발급받아 제주 밖의 지역으로 진출했다. 제주 출입국 외국인청은 박해 사유를 심사했다. 난민 인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현재까지 종교적 난민을 인정받은 전능신교 신도는 많지 않다. 중국의 박해 수위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전능신교 신도 샤오루이는 중국 공안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2016년 한국행을 택한 그는 <한겨레21>와 가진 인터뷰서 경험담을 털어놨다. 2009년 공안에 붙잡힌 그는 허공에 매달린 채 온몸을 구타당했다고 한다. 2012년 10월, 형 만기를 채우고 출소했다고 전했다. 신도별로 주장은 다르게 나왔다.

2018년 <노컷뉴스>와 만난 한 전능신교 탈퇴자는 “중국서 박해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뷰서 “(공안이)처벌은 하지 않았고 전능신교의 위해성을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박해 수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법무부 측은 종교 난민이 가장 많지만,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했다.

2014년 1월부터 올해(5월 말 기준)까지 전체 난민 신청자는 9만1748명이다. 종교 난민 신청자는 1만9459명으로 가장 많다. 이 중 난민 지위는 987명만 인정됐다. 종교적 난민 인정 수는 개인정보라 파악할 수 없는 만큼 일부 불법체류자에게는 남용의 소지가 있다. 종교 난민을 빙자해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난민으로 인정받은 판례도 존재한다.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로 본국서 박해받을 근거가 다분하다는 판단에서다.

손 놓은
법무부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2단독 송각엽 부장판사는 이란인 A씨를 난민으로 인정했다. 송 부장판사는 “종교활동을 공개적으로 못 하는 자체가 박해”라고 설명했다. 앞서 A씨는 2021년 5월 법무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 A씨는 김세진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와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종교는 물론, 형제들이 유산을 빼앗으려 신고해 체포·구금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A씨는 기독교인 태국인 여성과 한국서 결혼도 했다.

A씨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의혹은 있다. 법무부는 A씨가 실제 교회에 나간 게 8년간 4번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법조계는 당시 판결을 두고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개종으로 인한 박해로 난민을 인정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난민 신청자가 사업 목적으로 들어온 것처럼 속인 사례도 있다. 대법원은 국제협약에 따라 처벌하지 않았다. 이란인 B씨는 2016년 ‘한국 기업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며 단기 상용 사증(비자)을 신청했다. 이 초청장은 B씨가 브로커에게 4700달러를 주고 구했다.

브로커는 초청장 구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의 말대로 한국 기업에 “직접 만나고 싶다. 비자를 받을 수 있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하자 손쉽게 구했다. B씨는 이렇게 받은 비자로 입국해 2016년 난민 신청을 했다. 법무부는 신청을 기각했다.

검찰은 2018년 B씨가 한국 대사관을 속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겼다. 1심은 같은 해 9월 B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한 B씨는 난민 지위를 둘러싼 행정소송서 승소했다. 


난민 신청자
처벌 대상 제외

B씨는 2020년 말 ‘기독교 개종’을 이유로 난민 신분이 인정됐다. 대법원은 “난민협약에 가입한 우리나라 형사재판서 형을 면제할 근거 조항이 된다”고 판단했다. 해당 조항은 ‘난민이 불법으로 입국하거나 불법으로 체류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해 이듬해 3월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사유에 따라 난민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다. 예멘 정부군과 반군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내전을 벌이고 있다. 2018년, 제주로 들어왔던 예멘인 561명 중 549명이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다. 당시 2명은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412명은 인도적 체류가 허가됐으며, 최근 412명 중 한 명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법무부는 난민 인정 사유에 관해 구체적 답변이 없었다.

인도적 체류자는 난민에 해당하지 않는다.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이다. 한 예멘인 하산은 내전이 시작된 2015년 쯤 한국으로 피신했다. 민병대의 합류 강요를 거부한 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안전, 정의, 질서, 법 속에서 살 수 있는 대안적 조국”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그 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말레이시아로 부인과 자녀들을 탈출시켰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가족의 장기 거주를 허용하지 않고 퇴거를 압박했다. 한국은 이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산은 “가족과 재결합하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난민인권센터 등은 인도적 체류자의 가족구성권을 요구했다.


현재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매년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저수준이다. 2019년 기준 러시아 출신 난민 신청자들의 인정률은 미국이 41.3%다. 같은 해 기준 중국 출신 난민 신청자들의 인정률도 미국은 32.2%로 높았다.

반면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러시아·중국 출신 모두 0%다. 남용적 난민 신청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인권 보호단체의 입장이 크게 갈린 탓이다.

허위 비자로 들어왔는데 처벌 불가
단기체류자는 ‘검지’ 지문만 채취

한국은 2012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난민에 인색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난민협약 가입은 1992년에 했다. 난민법이 통과되면 심사 과정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서 난민으로 인정되려면 많은 양의 입증 서류가 필요하다.

또 입증 서류를 제출했다 하더라도 심사를 받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법무부 공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기준 난민 심사 대기 건수는 1만3890건이다. 심사관당 140건 정도를 처리해야 하는 양이다. 물리적으로 쉽게 처리하기 어려운 숫자로 난민을 향한 혐오 인식 때문만은 아니라는 증거다. 

이들은 ‘불법체류자’와 엄연히 다르다. 법을 어긴 범죄자가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에 불과하다. 90일 이내 단기체류 외국인으로 들어와 불법체류하는 것보다 안전하다. 단기체류 외국인은 범죄를 저질러도 추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쪽 검지 지문만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90일 초과 장기체류 외국인은 열 손가락 지문과 얼굴 정보를 등록한다. 난민 신청자도 마찬가지다.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이지연 경위는 지난 5월 학술대회서 “불법체류자의 열 손가락 지문 등록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단기체류 외국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검지 외에 지문은 파악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특히, 검지가 훼손된 채 사망하면 신원 확인도 어렵다.

지문 등록을 두고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참여연대 등의 단체들은 “개인의 고유한 생체정보 보호가 중요하다”고 비판했다. 김정식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장은 이날 “법과학적 타당성, 법과학 전문가의 증언이 보다 중요하게 취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도 한국보다 지문 채취에 적극적이다. 중국 정부는 2021년 1월부터 14세 이상~70세 미만 외국인의 양손 지문을 모두 채취하고 있다. 중국 방문을 위해 필요한 비자를 발급하기 위함이다. 기재해야 하는 정보의 양도 절대적으로 많다. 연봉과 상사 이름·연락처 등 훨씬 상세한 정보를 넣어야 한다. 부모 등 가족 정보 역시 이름만 입력하면 되는 미국 등과 달리 중국은 부모의 직업과 주소까지 넘겨야 한다. 

종교적 난민
1만9000여명

다만 지나친 정보를 요구하는 데에 대한 반감도 존재한다. 관광객이 줄어드는 것도 불편한 정보 수집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에 거주 중이라는 한 교민은 “비자 발급 과정에 요구하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가족들이 오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난민 신청은 까다롭지만, 입국 심사는 간단하다. 단기체류자에 대한 절차를 소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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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