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비극’ 순창 패러글라이딩 사고 공방전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12.20 09:52:58
  • 호수 14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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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만 있고 책임자는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지난 5월11일 전북 순창군에서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하던 50대 A씨가 사망했다. 사고 당시의 CCTV도 분석했지만 지형지물에 가리면서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가족의 사망 외에도 유가족을 슬프게 하는 것이 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대상이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유가족은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다.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은 낙하산 활강과 행글라이딩의 원리를 포함한 항공 스포츠다. 패러글라이딩의 시작은 등산객이 등산 후에 빠른 하산을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다. 패러글라이딩은 2016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즐기는 비행 스포츠 중 하나다.

매년 느는 
안전사고

패러글라이딩 비행 계획을 세울 때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날씨와 착륙장의 위치다. 패러글라이딩은 열기구 다음으로 장비 내구도가 약해서, 패러글라이딩 비행은 강풍 예보나 비행기 비행 일정이 있으면 바로 취소된다.

착륙장은 패러글라이딩의 저속과 착지라는 특징이 합쳐져 작은 편이라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터가 있으면 어디서든 착지가 가능하지만 전봇대 및 고압선이 지나가는 곳으론 절대 가면 안 된다. 또 패러글라이딩은 크기가 작아 하늘에서 찾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사고가 발생하기 쉽다.

실제로 패러글라이딩은 하늘에서 비행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착륙 거리가 짧아 착륙장 위에서 아래 쪽으로 고도를 떨어뜨려도 되고 천천히 직선 비행도 가능하다. 특히 산지가 70%인 한국은 패러글라이딩이 주요 레저 스포츠로 자리 잡아 있어 전국에 착륙장만 100개가 넘는다.

그만큼 패러글라이딩 안전사고도 많이 발생하는 실정이다. 특히 초보자의 경우 상급자 감독과 교육을 충분히 받고 비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무리한 이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가 발생한다.

흔하게 발생하는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착륙을 시도하다가 지나가던 차에 치이거나 ▲비행 중 서로 충돌 ▲착륙 시 고압전선 걸림 등이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탑승자는 보조 낙하산을 타고 탈출해야 한다.

패러글라이딩 안전사고는 매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경량·초경량 안전사고는 2019년 총 6회 발생했는데, 그중 패러글라이딩 사고가 4번 있었다. 2020년 항공 안전사고는 총 9회 발생했고, 이 중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8회였다. 지난해 발생한 경량·초경량 안전사고는 총 11건이고, 이 중 패러글라이딩 사고는 총 8건이었다.

대부분의 항공 레저 안전사고가 패러글라이딩 사고였다.

퇴사 후 회사가 부탁해 체험 진행했는데…
군·업체 모두 책임 회피…교관만 처벌?

통계로 나온 사고는 인명피해가 있는 것만 잡혀 있고, 인명피해가 없는 패러글라이딩 사고까지 조사하면 패러글라이딩 사고가 더 잦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처럼 빈번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패러글라이딩 안전·관리를 감독해야 할 주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난 5월11일 오전7시10분 전북 순창군에서 동력 패러글라이딩을 타던 50대 남성 A씨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A씨는 순창군 유등면의 한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소방대원은 “논에 패러글라이더가 떨어져 있다”는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A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해당 동력 패러글라이더 사고는 교관이 동승하지 않은 상태서 일반인이 동력 패러글라이더에 탑승해 벌어졌다. 사고는 당시 언론을 통해 짤막하게 보도됐다. <일요시사>는 사고 당시 교관으로 있었던 B 교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취재했다.

B 교관은 사고 당시 순창군에서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진행하는 M사를 퇴사한 상태였다. M사는 국내 최초로 장애인 액티비티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판매하는 여행 회사다. 순창군과 M사는 지난해 7월6일 ‘항공레저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순창군은 M사에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할 수 있는 이착륙장 부지를 제공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여행상품에 넣으려면 회사는 항공사업자를 내야 하며 해당 자격증을 보유한 교관도 필수다. 교관은 패러글라이딩 비행 때마다 인근 공항에 비행 승인 신청을 받아야 하며 이·착륙도 돕는다.

B 교관은 비행 전, 인근 공항에 비행 승인 신청을 받았다. 보통 비행 시간은 일출 후와 일몰 전으로 예약돼있었고, 비행 후에는 항상 비행 일지를 기록했다. 비행 일지에는 ▲비행 일자 ▲비행 목적 ▲비행 구간 또는 장소 ▲비행 시간 ▲동승자 ▲기장 등의 정보를 적는다.

사람이
죽었는데…

문제는 사고 당시 B 교관은 M사의 직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 항공교통본부 항공교통안전과가 M사에게 “항공사업자가 잘못됐으니 반납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후 M사 대표는 항공사업자를 반납했다. 

항공사업자가 없으니 M사는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B 교관은 M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사직서는 지난 5월2일에 제출됐고 바로 사직 처리됐다.

3일이 지난 뒤 M사는 B 교관에게 전화해 “기존 동력 패러글라이딩 체험은 다 취소했는데, 취소 못한 건이 2개 있다. 이것만 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항공사업자 없이 비행하면 불법이다. B 교관은 “비행하다가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져달라”는 조건으로 M사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5월11일 예약돼있었던 비행은 순조롭게 끝났다. 이날 오전 7시쯤 순창군 마을 이장이 B 교관을 찾아와 “한 명만 더 태워달라”고 부탁했는데 바로 A씨였다. 

B 교관에 따르면 이런 식의 부탁은 흔한 일이었다. 패러글라이딩 체험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있을 수밖에 없고, 동네서 밉 보일 경우 사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순창군에는 이장이 14명이나 되고, 대표 이장이 따로 있었다.


속된 말로 이들이 갑이었다. 심지어 이장이 데려온 손님들은 체험비도 받지 않았다.

B 교관은 A씨의 비행을 도왔다. 비행 장소 주위에 강이 있어 구명조끼를 입히고 헬멧도 씌웠다. B 교관 헬멧은 동력 패러글라이더와 4~5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자신의 헬멧을 가지러 간 순간, A씨가 타고 있던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이륙했다.

얼마 비행하지 못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인근 논으로 추락했다. B 교관은 추락 장소로 달려가 A씨를 끌어내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이미 사망한 후였다.

알 수 없는
이륙 미스터리

이날 교관도 없이 이륙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추락했고 탑승자는 추락과 동시에 사망했다. B 교관은 “가만히 있었던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왜 작동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일반 패러글라이더와 다르게 프로펠러가 장착돼있어 엔진 힘으로 추진력을 얻는 구조다. 덕분에 산이 아닌 평지에서도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엔진이 장착된 동력 패러글라이더는 자동차처럼 직접 기계를 ‘작동시켜야’ 출발할 수 있다. 비행 장소에는 CCTV가 설치돼있었다. 경찰은 CCTV를 수거해 이날 사고를 조사했지만,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이륙하는 순간은 인근 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항공사고철도조사위원회 관계자 역시 A씨가 탄 동력 패러글라이더가 교관 없이 이륙해버린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유가족은 단 한 곳에서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관리·감독의 주체인 순창군도, M사도 마찬가지였다. 순창군은 모든 책임이 M사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M사는 사건 당시 B 교관이 회사에 사직서를 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순창군 관계자는 “순창군에서 안전사고를 대비해 든 5000만원 보험이 있다. 보험회사에 서류를 접수해보니 이번 사고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M사와 업무협약서를 쓸 때 안전사고 책임은 M사가 지기로 했다”고 밝혔다. 즉 순창군은 M사와 업무협약을 했지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순창군과 M사의 ‘항공레저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서’에는 ▲순창군은 항공레저스포츠 운영을 위한 이착륙장 부지 제공 ▲M사는 항공레저스포츠 및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공동 홍보 및 모객 지원 ▲상호 간 공동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 ▲항공레저스포츠 안전을 위해 현장 상황 및 안전기준에 적합한 조치를 취함 ▲항공레저스포츠 사업 운영에 따른 사고 발생 책임은 M사에 있다고 적혀 있다.

항공사업자 반납했는데 영업?
일반인이 혼자 왜 동력 탑승?

협약서 내용에 따르면 이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M사에 있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순창군이 패러글라이딩 체험에 있어서 안전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민법 제756조에 해당한다. 민법 제756조에는 ‘수인(직접 서명한 문서)이 공동의 불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는 연대해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기재돼있다.

그렇다면 M사는 어떤 입장일까. <일요시사>는 M사에 전화했지만, M사 측 관계자는 “당시 입사자가 아니어서 잘 모른다. 상사들은 모두 출장 갔다. 언제쯤 출근하는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이후에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일요시사>는 M사 이메일로 지난 5월11일 패러글라이딩 사망사고의 책임 소재에 대해 물었다. M사는 메일을 즉시 확인했지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B 교관을 통해 M사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B 교관은 “M사는 현재 이미 폐업한 상태고, 내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며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한 것은 비행 일지 기록 등으로 다 나와 있다”며 “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받아야지. 그런데 순창군이든, M사든 전부 죄가 없다고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유가족은 이번 사고로 인해 황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유가족 C씨는 “너무 억울하다. 사고가 나고 아무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장례식에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저 법대로 하라고만 한다”며 “M사의 수익을 순창군이 어느 정도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순창군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폭탄 돌리기
법적 대응

그는 “그런데 모두 교관에게만 책임을 지라고 한다. 사고의 근본 원인은 순창군도 M사도 제대로 된 관리·감독을 하지 않은 것”이라며 “사고가 발생해서 사망자가 생겼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유가족 입장에서 보면 운영주체는 빠지고 직원만 나쁜 사람 된 것 아니냐. M사와 순창군이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 두 곳 다 법적으로 하자고 하니, 우리도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답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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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