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돌고 돌아’ 다시 윤핵관 시대

왼손에 장총 오른손에 권총 들고 ‘재장전’

[일요시사 정치팀] 차철우 기자 = 올해 국민의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 중 하나는 ‘혼란’과 ‘당내 투쟁’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이 후 당이 잠시 안정화되는 듯 싶었으나 원조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들이 다시 돌아오자 또다시 비윤(비 윤석열)계와 친윤(친 윤석열) 그룹이 맞서 싸울 태세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신임을 드러낸 상황에서 윤핵관이 이번에는 실수 없이 대통령실의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국민의힘 권성동·장제원 의원이 최근 언론 노출 빈도가 늘어났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원조 윤핵관이 다시 돌아왔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한동안 조용하던 친윤과 비윤 그룹의 불화가 재차 수면으로 떠오르는 형국이다. 윤핵관 중 최측근 핵관으로 불리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대통령실을 옹호하거나 민주당을 향한 공세에서 돌격대장 역할을 맡았다. 

오자마자
큰 목소리

국민의힘에선 최근 더불어민주당 등 야3당이 띄운 이태원 참사 관련 국정조사를 두고 내부 마찰음이 감지됐다. 주호영 원내대표와 당내 친윤 그룹에서 불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 원내대표는 국정조사에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장 의원을 포함한 친윤 그룹에서 강한 반발이 일었다. 

특히 장 의원은 오랜만에 목소리를 높였다. 주 원내대표와 친윤 그룹이 갈등을 겪은 사안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 당시 발생했던 이른바 ‘웃기고 있네’ 필담 논란이 일었을 때 위원장이었던 주 원내대표가 김은혜 홍보수석에게 퇴장을 요구하자, 장 의원이 지난 10일 “그렇게(퇴장)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협치는 좋은데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가 뭘 얻었느냐”고 비판했다. 


장 의원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는 여당이 윤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듯 보인다.

이미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국민의힘이 야당을 공격할 여러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휘둘리고 있다는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 의원이 재빠르게 해당 불만을 접수하고 선수친 것으로 읽힌다.

권 의원 역시 민주당이 윤 대통령을 강하게 공격하는 모션을 취하자, 가만히 있지 않는 모양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SNS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윤 대통령 방어에 나서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2선으로 물러났던 행보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당무와 관련된 사안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이 석 달 만에 전면에 다시 나타난 배경에는 소수 여당의 자존심 재건 및 윤 대통령의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최근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끊임없이 20~30%대를 오락가락하면서 친윤 그룹 역시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여권에서 충분한 공격거리로 삼을 수 있지만, 당 지지율 역시 박스권에 갇혀 있다. 정치권에서는 윤핵관을 중심으로 다시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는 시선이 강하다.

다시 움직이는 원조 윤의 남자들
비대위원장, 원내대표보다 힘세

결국 당의 위기가 친윤 그룹의 몰락과 연결돼있는 상황에서 윤핵관의 몰락을 막기 위한 재등판인 셈이다. 앞서 두 윤핵관 인사가 밀려난 이유는 이준석 전 대표와의 갈등 및 대통령실 인적 쇄신과 관련한 책임 때문이다. 윤핵관 세력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당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이다. 


사실상 원조 윤핵관인 장 의원과 권 의원은 정치적 공동 운명체 격이다. 권 의원과 윤 대통령의 깊은 인연은 이미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10대 초반부터 알고 지내왔으며, 윤 대통령이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 놀러갔을 때 윤 대통령의 외조모가 소개한 옆집 할머니의 손자가 권 의원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 동지가 된 건 대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때 즈음부터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에서 물러나고 대선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 윤 대통령과 권 의원이 만찬을 하면서다. 

또 다른 윤핵관으로 불리는 장 의원과 윤 대통령의 인연은 사실 좋게 시작하진 못했다. 그는 과거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시절에는 “다들 윤석열한테 충성 경쟁을 벌이는 게 안타깝다”며 공격하기도 했다. 국정감사에서도 장모 의혹 등으로 혹독하게 윤 대통령을 야단을 친 적도 있다. 

이후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직을 내던지면서 이들의 악연은 해소됐다. 윤 대통령이 장 의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고, 장 의원은 종합상황실장으로 합류했다. 당선 후 장 의원은 가장 먼저 당선인 비서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당시 윤 대통령을 밀착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활 걸고
친윤 지키기

권 의원의 경우 윤석열정부 초기 압도적인 지지세로 원내 사령탑에 올랐으나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윤정부 초창기 권 의원은 압도적인 표차로 원내대표에 당선돼 스스로 대세임을 입증해냈다.

대세는 거기까지였다. 권 원내대표는 끝내 이 전 대표와의 갈등을 풀지 못했다. 또 윤 대통령과의 사적 대화 논란으로 여론의 공분까지 샀는데,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두 인물은 당내에서 대세 중 대세로 불리며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이들의 대세 행보가 멈춘 이유는 자꾸 헛발질을 해서다. 결국 2선으로 물러났고 한동안 잠잠하게 지냈다. 당시 장 의원은 “당의 혼란에 무한 책임을 느끼며 지역구 의원으로서 책무, 상임위 활동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계파 활동도 자제하겠다고도 했다. 

권 의원 역시 무한 책임을 느낀다며 후퇴했다. 윤핵관이 2선으로 물러났지만, 당내 혼란의 멈춤은 일시적이었다. 전당대회 시점과 직전 원내대표 선거에서 비윤계가 선전하는 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친윤계는 합의 추대설을 띄웠지만, 비윤계인 이용호 의원이 40표가 넘는 표를 거두면서 윤심이 불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당내에서도 윤핵관을 배척하려는 여론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후 이 전 대표의 가처분 리스크를 해소했고, 정진석호가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당은 한동안 안정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두고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원조 윤핵관인 장 의원과 권 의원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모양새다. 아직까지는 이들이 당내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직전까지 주 원내대표는 야3당의 국정조사 요구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 의원이 나서면서 주 원내대표의 입장이 깔끔하게 ‘국조 불가’로 정리됐으며 현재는 가능한 경찰 조사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주 원내대표가 윤 대통령의 신뢰를 잃었다는 반응도 나온다. 윤 대통령을 지키라는 미션에 윤핵관들은 충실한 측면이 강하다. 


결국 주 원내대표가 나름 여론을 반영해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국회를 운영해보자는 취지에서의 국정조사 수용 여부를 고심한 것들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주 원내대표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서 대통령의 신뢰를 잃었다”고 해석했다. 

장 의원은 지난 14일, 이태원 국정조사 관련 3선 이상 중진 의원 모임에서 ‘의견이 거의 일치했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윤핵관이 전면에 나서 목소리를 높이자 비윤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은희·김웅 의원이 “장 의원의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여전한
믿을맨?

한발 더 나아가 윤핵관 세력은 아예 정진석 비대위원장까지 흔드는 모양새다. 정 비대위원장이 전국 당협 정비 및 당무감사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하자 일부 친윤계가 거칠게 반응하고 있다. 전당대회 시기가 늦춰질 가능성이 생겨서다.

현재까지는 내년 초 전대 실시가 예상되고 있지만, 당협 정미 및 당무감사 실시로 인해 4~5월 사이 개최가 유력한 상황이다. 사실상 당무감사 마무리 전까지 전대 개최가 불가능한 셈이다. 당협 정비와 당무감사는 차기 총선 공천과도 관련된 사안이다. 정 비대위원장의 계획을 윤 대통령이 밀어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전대 시기에 따라 당권주자들의 행보가 뒤바뀔 수 있는 데다, 차기 당 대표는 2024년 총선서 막강한 공천권까지 틀어쥘 수 있다. 


정 비대위원장은 본래 윤핵관 그룹이 아니며 지난 대선 당시에도 윤 대통령과 활발한 소통을 해왔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당초 정 비대위원장은 차기 당 대표 후보군 중 한 명으로 거론돼왔으나 지속적인 욕심 등 내부에서의 공격에 결국 당 대표 출마는 없던 일이 됐다. 

내년 총선에서 친윤 그룹과 윤핵관이 당내에서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공천을 잘 받아야 한다. 정 위원장 계획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실 조기 전대 개최는 차기 당권주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언급된 사안이다. 그동안 정 비대위원장이 조기 전대 불가론을 띄우며 잠잠해졌지만 최근 윤핵관의 입김이 더해진 탓에 조기 전대론이 재차 수면으로 올랐다. 

과거 실책으로 완벽 신뢰 힘들어
과도 충성 탓 내부서 무너질 수도

일각에서는 정 비대위원장이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에 대해 딱히 부인하지 않았던 정 위원장에게 결국 윤핵관의 압박이 통한 모양새다. 그는 지난 17일, 당권 도전 생각이 없다고 못 박았다. 결국 친윤 역할론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셈이다. 

다만 원조 윤핵관인 두 인물이 함께 손을 잡지는 않았다. 장 의원은 해오던 대로 대통령실 비호 역할을 맡았다면 권 의원은 다시 한번 직접 뛰어들 태세다. 권 의원이 당권을 노리는 듯한 움직임이 포착돼서다. 인물론보다는 윤 대통령을 앞세우겠다며 윤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친윤 그룹은 두 윤핵관의 복귀를 쌍수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다. 또다시 윤 대통령을 등에 업고 당을 장악하려 든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도 정치권의 ‘믿을맨’은 윤핵관 뿐이다. 과거 정치적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윤핵관의 손을 잡고 윤 대통령은 정치권으로 뛰어들었다. 

앞선 실책은 여전히 윤 대통령에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책임론이 계속 불거졌으나 여전히 윤 대통령은 그에 대한 신임을 보이고 있다. 해외순방 직후 이 장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생했다”는 말로 감쌌다. 

취임 초 윤정부는 여의도, 대통령실의 기반 세력을 윤핵관 중심으로도 짰다. 이번 재등판 역시 친윤의 본격적인 세력화인 동시에 자신의 세력을 꾸리기 위함이라고 풀이된다. 

장 의원은 기본 전투력이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확실하게 윤 대통령의 편이라는 느낌도 강하다. 여러 사안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향해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윤핵관을 앞세웠다가 한 번의 실패를 맛보면서 이들에 대한 신임도가 낮아져 있다. 추후 이들에게 중대한 사안을 무작정 맡기기에는 부담이 따를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윤핵관이 재등판하면서 오히려 당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한 충성심으로 인해 내부서부터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국민의힘이 다시 분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윤 대통령
다음 미션은?

앞서 보수정권이 무너졌던 이유는 과한 충성심 경쟁 때문이었다. ‘친박 학살’이 대표적 사례다. 차기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윤핵관을 필두로 세우고도 패한다면 국민의힘에게는 물론, 윤정부의 국정동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윤핵관이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미션에 앞으로도 충실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것저것 안 가리고 또 대통령을 향해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용한다”고 덧붙였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민의힘 당 대표 하마평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후보군이 10명 가까이에 이른다.

원내에서는 윤상현·김기현·안철수·조경태·권성동 의원 등이 거론된다.

반면 원외에서는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유승민 전 의원,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또 윤핵관으로 불리는 권 의원, 장제원 의원이 다시 움직임에 따라 친윤 그룹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늘었다.

심지어는 권영세 통일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이름까지 오르내린다.

정치권에서는 차기 당 대표는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달렸다고 본다.

현재 여론조사상으로 당권주자 중 민심의 선택을 받은 인사는 유 전 의원, 당심에서는 나 부위원장이 1위를 달리고 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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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