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직원-검사역 커넥션 신협 ‘청탁 감사’ 의혹

4년 만에 드러난 2600만원의 진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8년부터 시작된 전남의 한 단위신협과 신협중앙회 간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단위신협 직원과 중앙회 검사역 간에 돈이 오고 간 사실이 4년여 만에 드러난 것. 신협 직원은 4촌 이상의 사람과 사적 금전대차를 할 수 없고 검사역은 수검 조합으로부터 식사 제공도 받아서는 안 된다.

신용협동조합(신협)중앙회 대구경북지역본부는 지난달 14~16일, 경북의 한 단위신협에 대한 특별검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검사역이 수검 조합 간부로부터 점심식사로 복요리를 대접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검사팀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간부와 두터운 친분관계가 있어 자리를 함께했다”고 해명했다.

밥도 문젠데
돈 오갔다고?

신협중앙회 내부 규정 ‘검사원 복무수칙’에 따르면 “검사원(검사역)은 직무와 관련해 수검 조합으로부터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사례‧증여(금품‧선물) 또는 식사접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있다. 부득이한 경우에 3만원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제공되는 간소한 식사는 가능하지만 그마저도 ‘인근 조합’으로 한정했다. 

지난 8월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 위치한 ‘영광굴비골신협’ 직원과 신협중앙회 검사역 간에 돈 거래가 이뤄진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일요시사>가 당시 내용을 토대로 같은 달 5일, 해당 직원에게 문답을 진행한 ‘문답서’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해당 직원은 이날 문답에서 신협중앙회 검사역에게 돈을 송금한 사실을 시인했다. 


문답서에 따르면 당시 영광굴비골신협 군남점 지점장을 맡고 있던 김모 전 차장은 2018월 7월2일과 17일 각각 600만원, 2000만원을 장모 전 신협중앙회 검사역에게 송금했다. 김 전 차장은 장 전 검사역과 업무적으로 통화하는 과정에서 병원비가 필요하다고 해 돈을 빌려줬다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차장은 아버지의 계좌를 사용해 돈을 송금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창구를 통해 돈을 송금하려면 계좌 개설 시 등록한 인감 등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김 전 차장은 해당란에 자필로 서명했다. 위임장을 받는 등의 필요한 절차는 지키지 않았다. 

장 전 검사역에게 돈을 송금하고 두 달 뒤인 9월13일 계좌를 해지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당사자가 아닌 대리인이 계좌를 해지할 때는 예금주의 위임장, 인감증명서 및 도장, 통장,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이 중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책임자에게 승인을 받아 ‘편의취급’ 절차로 처리 가능하다.

아버지 계좌로 두 번 보내
두 달 뒤 계좌 ‘셀프 해지’

문제가 된 부분은 이 편의취급 절차로 처리한 사람이 김 전 차장 본인이라는 점이다. ‘셀프 승인’을 한 셈이다.

김 전 차장은 아버지 계좌를 이용해 차명으로 거래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가족이 위임해줘서 처리한 부분’이라고 해명했다. 해당 계좌 자체가 가족이 같이 사용하는 것이고 자신은 관리를 맡았다고 덧붙였다. 돈을 송금하고 계좌를 해지할 때 서명으로 처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착오’라고 답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김 전 차장이 장 전 검사역에게 돈을 송금한 시기다. 당시 김 전 차장은 상사인 주모 전 영광굴비골신협 전무에 대한 내부고발을 한 상태였고 신협중앙회가 그 내용을 근거로 검사를 나왔다. 장 전 검사역은 당시 검사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실제 장 전 검사역은 5번에 달하는 영광굴비골신협 검사(2017년 5월15~17일, 2017년 10월11~13일, 2018년 2월26~28일, 2018년 8월28~31일, 2018년 11월19~23일)에 모두 참석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한 직원이 거래전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장 전 검사역과 같은 이름을 발견하면서 드러났다.

영광굴비골신협 직원들에겐 장 전 검사역이 그만큼 각인돼있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공교로운 점은 김 전 차장이 주 전 전무의 후배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주 전 전무가 어떤 이유로든 퇴직할 경우 그 자리에 김 전 차장이 갈 확률이 높았다는 것. 

영광굴비골신협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신협중앙회의 검사, 임직원에 대한 형사고소‧고발, 징계 요구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사건의 중심에 있는 주 전 전무는 지난해까지 면직 요구, 고발 등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다. 현재도 신협중앙회와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가족이라
괜찮다?

사건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앞서 진행된 영광굴비골신협 부문 검사에서 드러난 비위 행위에 대한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7년 신협중앙회의 부문 검사에서 주 전 전무의 사적 금전대차 기록이 발견됐다.

주 전 전무는 2012년 한 조합원이 급하게 쓸 일이 있다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3000만원을 빌려줬다. 

두 달 뒤 해당 조합원은 주 전 전무에게 100만원을 더해 3100만원을 갚았다. 주 전 전무는 이 중 이자 60만원을 포함해 3060만원을 상환했다. 문제는 그가 나머지 40만원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신협중앙회는 주 전 전무를 고발했다.

2018년 8월22일 광주지검은 주 전 전무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사금융 알선 등)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여기에 김 전 차장은 주 전 전무 등에 대한 17건의 비위 행위를 정리해 신협중앙회에 내부고발을 진행했다. 신협중앙회는 김 전 차장의 내부고발을 근거로 검사를 진행해 주 전 전무 등을 징계하라고 요구했다. 주 전 전무는 “내부고발, 공익제보는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사실을 왜곡해 고발하고 제보하는 것도 내부고발, 공익제보라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후 2018년 8월28~31일 신협중앙회에서 영광굴비골신협에 대한 검사를 나왔다. 김 전 차장이 장 전 검사역에게 돈을 송금하고 한 달 반 뒤에 진행된 일이다. 검사 첫날 영광굴비골신협의 한 조합원이 주 전 전무를 ‘횡령, 사문서 위조, 위조 사문서 유용,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다.

해당 사건은 경찰의 불기소-재정신청 끝에 2019년 주 전 전무의 결백이 입증됐다. 


단위신협
잡으려고?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신협중앙회는 ▲CSS(개인의 신상, 직장, 자산, 신용, 금융기관 거래정보 등을 종합 평가해 대출 여부를 결정해주는 자동전산 시스템)에 따라 산정된 대출 가능 범위를 초과해 대출해준 점 ▲동일인에게 신용대출한도를 초과해 돈을 빌려준 점 등을 근거로 들어 주 전 전무를 포함한 임직원 4명에 대해 개선(임원에게 내리는 면직 처분), 면직, 정직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 

주 전 전무는 2019년 8월5일 면직처분을 받아 해고되기에 이른다. 이후 전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주 전 전무 등이 제기한 구제신청을 받아들여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징계 사유는 인정되지만 양형이 과하다는 게 골자였다.

주 전 전무는 “신협중앙회는 나 하나 잡겠다고 온 역량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행정소송이 문제로 떠올랐다. 2019년 10월4일 신협중앙회는 신용협동조합 검사및제재에관한규정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조합은 필요한 경우 중앙회를 보조 참가자로 신청할 수 있다’에서 ‘중앙회는 징계 관련 소송에 보조 참가를 신청할 수 있고 이 경우 조합은 중앙회의 지도에 따라 공동으로 소송대리인을 선임해야 한다. 다만 조합 자체적으로 소송대리인을 선임할 시 감독이사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또한 법원에 서면을 제출 시 중앙회에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로 바꿨다. 

단위신협에서 진행되는 소송에 신협중앙회가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역 단위신협에서 일어난 일로 신협중앙회 내부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냐며 ‘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협중앙회는 단위신협을 관리·감독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운영에 있어서는 조합원의 뜻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

게다가 지역 단위신협은 엄연한 독립법인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도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2017~2018년 5번 진행
임직원 4명 중징계·고발

결국 신협중앙회는 주 전 전무 등 중징계를 받은 3명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중징계를 받은 직원에게 ‘이중 징계’한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총 17건의 비위 행위를 근거로 고발이 이뤄졌는데, 이 중 6건이 기소돼 재판 중이다.

1심 재판부는 주 전 전무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다른 2명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김 전 차장과 장 전 검사역의 돈 거래가 드러나면서 영광굴비골신협은 발칵 뒤집혔다. 지난 5월 거래전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한 직원부터 관련자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

검사역은 수검 조합 관계자와 식사만 해도 문제가 되는데 돈이 오간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이 확대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영광굴비골신협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자체적으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김 전 차장에 대한 형사고발 여부 등에 대해서도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 인사위원회 개최를 요청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직 조사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신협중앙회에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신협중앙회 관계자는 “확인 결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들은 바가 없다”면서 “장 전 검사역은 올해 개인사정으로 퇴사했다”고 밝혔다. 직원의 비위 행위가 퇴직 이후에 발각되면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질문에는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퇴직하면 끝이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신협에 대한 소관부처의 관리·감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협은 금융위원회 소관이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감독원을 통해 신협의 자산건전성을 관리한다. 

신협중앙회
“퇴사했다”

주 전 전무는 “규정을 지키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없이 내 잘못이다. 하지만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징계양정이 과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신협중앙회는 단위신협 직원을 동원해 거짓정보를 만들고 그 정보를 이용해 형평성 없는 검사를 진행했다”며 “단위신협을 관리·감독하는 신협중앙회, 신협중앙회를 관리‧감독하는 금융감독원까지 모두 다 잘못돼있다”고 일갈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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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