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데까지 갔다” 막 오른 ‘검수완박’ 2라운드

민주 VS 한동훈의 강대강 단두대 대치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올해 정치권을 뒤흔든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논쟁. 일명 ‘검수완박’ 갈등이 여전하다. 검수완박 1차전은 문재인정부 말기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강행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윤석열정부 들어 시행령 개정과 권한쟁의 심판 등 국회 밖 ‘장외’에서 2차전이 발발했다. 민주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힘겨루기에 눈길이 쏠리는 가운데, 경찰의 공개 입장 표명으로 ‘입법부 대 행정부’ 대결구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검수완박법’의 골자는 검찰의 수사 개시 범위를 기존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에서 부패 및 경제범죄(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로 축소하고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월 검수완박법을 발의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입법 절차를 매듭지었다.

엎치락
뒤치락

검수완박법은 지난 5월9일 정부 전자관보 게재를 통해 정식으로 공포됐다. 이날은 문재인정부의 임기 마지막 날이었다. 법안은 지난달부터 시행됐다.

이후 정권이 바뀌자 정부 입장이 정반대로 돌아섰다. 법무부는 지난 6월 “검수완박법이 내용뿐 아니라 절차상으로도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권한쟁의심판이란 국가기관끼리 권한의 존재 여부·범위 등을 다툴 때, 이를 헌재가 헌법 해석을 통해 심판하는 제도다.

우리 헌법에서 ‘검사’는 두 번 등장한다. 헌법 제12조 3항과 제16조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해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라는 내용이 명시돼있다. 법무부는 “헌법 조문에 검사에게 수사권이 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영장 신청을 위해선 수사가 필수 불가결하므로 수사권이 전제돼있다”는 취지로 주장해왔다.


국회가 만든 검수완박법이 수사권을 침해했고, 이는 영장청구권을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리다. 

이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8월 법무부 시행령인 ‘검사의 수사 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검찰 수사권 축소를 상당 부분 무력화했다. 한 장관은 법안 자구 중 ‘등’에 주목했다. 여러 가지 명분을 대며 관련 대통령령에 들어가는 ‘중요 범죄’를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종전에 삭제된 공직자·선거범죄 수사가 사실상 가능해졌고, 부패·경제 범죄 해석 범위도 더욱 넓어졌다. 이른바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복구) 시행령이었다.

검수완박법 입법을 강행했던 민주당은 크게 반발했다. 소속 의원들 사이에서 한 장관에 대한 탄핵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정계 일각에서는 “한 장관의 강경대응으로 ‘검수완박 2라운드’ 서막이 올랐다”는 평이 나왔다.

그동안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설전을 이어오던 민주당과 한 장관은 헌재로 전장을 옮겼다. 헌재는 지난달 27일 권한쟁의 심판 공개변론을 열었다. 

헌재에서 검수완박법 관련 공개변론이 열린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7월 국민의힘이 “검수완박법안 처리는 국회법상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국회 등을 상대로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을 때도 헌재는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시행령 개정, 권한쟁의 심판…장외 2차전
‘입법 VS 행정’ 민주당-한동훈 힘겨루기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사건은 ‘꼼수 탈당’ ‘회기 쪼개기’ 등 입법 과정에서의 절차상 하자에 초점을 맞췄고, 이번 사건은 법 내용과 입법 목적의 위헌성까지 주요 쟁점으로 다뤘다.

이날 헌재 대심판정에는 법무부 측 대리인으로 한 장관과 검사들을 비롯해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이 출석했다. 국회 측에선 이광재 국회사무총장과 박경미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피청구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대리인으로는 헌법연구관 출신 노희범 변호사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출신 장주영 변호사가 출석했다.

양측은 변론 전부터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였다. 각각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된 논거를 재반박하면서 명분 쌓기에 열중했다.

한 장관은 변론 전 헌법재판소 청사 앞에서 취재진과 만나 ‘검수원복 시행령으로 위헌 소지가 해소됐다’는 일각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시행령을 개정한 것은 이 법이 유지된다는 전제로 국민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며 “시행령으로 위헌성과 국민 피해 가능성이 해소된 게 아닌 만큼 헌법재판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장 변호사는 개정법 시행으로 국가의 범죄 대응 역량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을 부인했다. 장 변호사는 “개정 법률에는 시정 조치나 재수사, 보완수사 요구 등 검사의 권한이 다양하게 규정돼있다”며 “법이 부여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면 국민 피해 발생 우려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공개변론은 5시간가량 이어졌다. 한 장관은 대심판정에 서서 “정권교체를 불과 24일 남긴 4월15일 민주당은 검찰 수사권 폐지 법안을 실제로 당론으로 발의했다. 새로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막기 위해 전례 없이 시간까지 바꿔가면서 국무회의를 열고, 정권 출범 딱 하루 전에 공포했다”며 “일부 정치인을 지키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추진한 입법이 정권교체 직전에 마치 ‘청야전술’하듯 결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검찰수사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담당해온 다양한 국민 보호 기능에 어떤 구멍이 생길지 생각조차 안 해본 것이고, 이미 디지털 성범죄 수사, 스토킹 수사 등에서 예상하지 못한 국민 보호의 구멍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고 보탰다.

역공
맞불

반면 국회 측은 법무부가 청구한 권한쟁의 심판이 애초에 부적법하기 때문에 각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측은 “검찰사무를 관장하고 감독하는 법무 장관은 수사·소추권이 없기 때문에 검사의 수사권을 축소하는 법률개정행위에 대해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또 법무부가 ‘검사의 영장 신청권’을 규정한 헌법 조항들을 근거로 ‘검사에게 수사권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조항들은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한 헌정사를 반성해 무분별한 영장 남발을 막으려는 ‘국민의 권리장전’에 속한다고 역공에 나섰다.

국회 측은 “1954년 형사소송법을 제정할 때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이 담당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의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유보됐다”며 “권한 집중으로 인한 남용을 방지하고 수사와 기소 기능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입법 목적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검수완박법의 제안·심사·상정 및 의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헌법의 다수결 원칙과 국회법 규정이 모두 준수됐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에 이종석 재판관은 무소속 민형배 의원의 ‘꼼수 탈당’ 논란에 관해 “법률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가장행위는 효력행위로 인정하지 않는 게 법의 원칙”이라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중요 원리인 다수결 원칙을 위배한 게 아닌가”라고 질의했다.

국회 측은 “국회의원의 정치적 선택을 내심의 의사를 통해 법 위반 여부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정치인의)이합집산을 고도의 정치적 형성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사법관계로 평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선애 재판관은 검수완박법으로 형사사법 체계에 공백이 발생했는지를 살폈다.

윤정부 출범 
알아서 기다…

차호동 대구지검 검사는 2020년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무고·마약·조폭·보이스피싱 처벌이 감소한 그래프를 제시했다. 그는 “도둑을 못 잡으면 도둑이 없는 것 같은 착시효과가 생긴다”고 표현했다. 범죄가 줄어든 게 아니라, 적발 및 처벌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헌재는 이날 공개변론으로 변론 절차를 마친 뒤 심리를 거쳐 추후 선고기일을 지정할 계획이다. 헌재는 재판관 9명 가운데 5명 이상이 찬성할 때 인용·기각·각하 결정을 내린다. 


양측이 ‘총공세’를 펼치는 가운데 새로운 변수로 급부상한 것은 경찰이다. 경찰은 검수완박의 주요 당사자이면서도 윤정부 출범 이후 공식 발언을 삼가해왔다. 하지만 경찰이 이번 헌재 심판에서 법무부와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입장 변화가 주목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경찰에 법무부·검찰이 헌재에 낸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경찰은 이를 참고자료 형태로 작성해 기 의원에게 건넸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300페이지 분량의 정식 의견서를 작성, 헌재에 제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 의원실에 따르면 경찰은 의견서에서 법무부·검찰의 검수완박, 즉 검찰 수사권 대폭 축소에 대한 반대 논리를 조목조목 논박했다.

이를테면 경찰은 의견서에서 “검찰 수사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한”이라는 법무부와 검찰 주장을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검찰에 수사권 축소를 거부할 헌법적 근거가 없다는 게 요지다.

검수완박법 내용 가운데 ▲고발인 이의신청권 삭제 ▲수사개시 검사의 공소유지 금지조항 신설 ▲별건수사 금지조항 신설 등이 위헌적이라는 주장에도 일일이 반론을 달았다.

침묵하던 경, 이번엔 의견 표명 검토
검 수사권 헌법이 보장? 헌재 판단은?

또한 기 의원은 “법무부와 헌재가 경찰에 권한쟁의심판에 의견을 제출할 기회를 주지 않아 경찰이 세 달 가까이 의견을 낼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법무부가 권한쟁의심판 청구서를 경찰과 공유하지 않아 경찰이 의견서를 낼 수 없었고, 이에 기 의원이 법무부·검찰의 청구서를 경찰에 전해주고 나서야 의견서 제출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던 경찰이 반기를 든 것은 검수완박법을 둘러싼 대립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행정부 소속인 경찰이 ‘단일대오’에서 이탈하면서, 그간 법무부와 검찰이 짜던 ‘입법부 대 행정부’ 대치구도가 붕괴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대강 대치 속 새로운 변수가 떠오른 상황.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어느 쪽이 승기를 거머쥘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럼에도 법무부와 검찰 측에 대한 회의론이 점차 고개를 들고 있다. 승리 가능성이 미지수인 데다, 설령 승리해도 가져갈 실익은 크지 않으리라는 관측이다.

정의당 박원석 전 의원은 지난달 27일 YTN <이슈앤피플>에 출연해 헌재 결정을 예측했다.

박 전 의원은 “개인적으로 민주당이 추진한 검수완박법, 그리고 그 추진 과정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권 법률의 형성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헌재 입장을 보면 위헌 판결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앞서 헌재가 입법 절차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법률 자체의 효력은 인정한 판례가 있다는 점이 회의적 전망에 힘을 싣는다.

아쉬운 대로
명분 쌓기?

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수완박법의 위헌 여부는 권한쟁의 심판에서 다룰 수 없고, 별도 판단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나온다. 다만 정당성 획득의 측면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소득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만약 법무부와 검찰이 승리한다면 ‘검수원복’ 시행령에 대한 반발을 원천 차단할 명분을 쥔다는 의견이다.


<jeongun15@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