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노조를 컨트롤하는 수법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9.20 10:25:48
  • 호수 13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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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해 공작…돈으로 밀어붙여”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노동조합이란 노동자가 주체가 돼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 등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다. 이런 이유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기업에 전하며,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문제는 기업의 대처 방법이다. 기업은 파업을 참여한 노동조합 조합원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거는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컨트롤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에는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만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법률이 정하는 주요 방위 산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나와있다.

늘고 있는
소송의 길

노동조합(이하 노조)은 국가에서 헌법으로 보장한 권리다. 노동자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갑질이나 산업재해를 당해도 보상을 받기가 어렵다. 이때 노조에 가입된 노동자라면 노조를 통해 보상이나 구제를 받는다.

노조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산별 노조와 기업별 노조로 나뉜다. 산별 노조는 동일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노조으로 조직한 것이다. 기업별 노조는 기업 단위로 결정한 노조다. 산업별, 기업별로 노조이 존재하는 이유다.

노조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신청하고 노조가 승낙한다는 합치에 따라 성립된다. 강제적인 노조 가입은 불법이다. 하지만 일부 회사의 어용노조는 단체교섭권을 가지기 위해 노동자를 강제로 가입시키고, 회사가 단체교섭권을 쥐고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30일 고용노동부(장관 안경덕)는 ‘2020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을 발표했다.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노조 조직률은 14.2%, 전체 조합원 수는 280만5000명으로 나타났다. 2019년 노조 조직률은 12.5%, 전체 조합원 수는 254만명이었다.

조직 형태별 조합원 수는 초기업노조 소속이 60.4%인 169만5000명, 기업별 노조 소속이 110만9000명이었고, 상급 단체는 한국노총이 40.1%인 115만4000명, 민주노총이 40.4%인 113만4000명, 미가맹 노조가 14.9%인 41만7000명 등으로 나타났다.

부문별 노조 조직률은 민간 부분 11.3%, 공공 부문 69.3%, 공무원 부문 88.5%, 교원 부문 16.8%이었으며, 사업장 규모별 조직률은 근로자 300명이상 사업장이 49.2%, 100~299명 10.6%, 30~99명 2.9%, 30명 미만 0.2%로 나타났다.

노조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 노동자와 기업의 대립이 날로 심화하는 양상이다. 또 우리나라 경쟁력을 갉아먹는 주된 요인으로 노사간 갈등이 지목된다.

노조 인구 254만명→280만명으로 증가
양사 갈등은 노조의 파업으로 계속 심화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10월 초 발표한 141개국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를 보면 노동시장 효율성은 전년보다 세 계단 하락한 51위에 그쳤다. 노사 간 협력도 지난해 124위에서 130위로 내려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36개국 회원국 중 노사 협력은 꼴찌였다.

파업은 노사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노조는 파업으로 노조 조합원에게 존재감을 인지시키고, 노조원은 파업 참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노조 파업에 대한 사측 대응 수단은 직장 폐쇄가 있다. 여기에 더해서 기업이 파업을 참여한 노조 조합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도 그중 하나다. 대우조선해양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해 51일간 파업을 벌인 하청노조를 상대로 5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를 대상으로 한 기업의 손해배상소송이 헌법상 노동 3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이는 상황이었지만, 대우조선해양은 소송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노동 3권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서 정한 노동자와 그 소속단체에게 부여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말한다.

지난달 2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은 지난달 19일 열린 이사회에서 하청노조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안을 보고했다. 손해배상소송은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 안건은 아니지만, 중요 사안인 만큼 보고 형식을 갖춘 것으로 전해졌다.

손해배상소송의 청구 금액은 대략 500억원이다. 대우조선해양은 노조 파업에 따라 80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노조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은 노동자를 위축시키고 노조 탄압으로 이용된다는 지적이 많다. 또 500억원은 역사상 개인 노동자에게 청구하는 가장 큰 금액이라, 윤석열정부가 나서서 대우조선해양의 손해배상소송을 멈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점점 느는
노조원 수

민주노총 경남본부는 “대우조선해양의 500억원 손해배상소송 제기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생존권 말살 정책이다. 투쟁 과정에서 어떠한 책임 있는 역할도 하지 않은 대우조선해양이 이제 와서 손해배상소송을 들이미는 행위는 할 말을 잃게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23일부터 52일간 있었던 현대제철과 당진제철소 비정규직지회 노조 파업도 손해배상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일 현대제철과 민주노총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조는 코로나 범유행 상황에서 당진제철소 통제센터를 불법 점거해 ‘불법 파견 사죄와 직접 고용·정규직 전환 쟁취’를 위한 총력 파업을 벌였다.

현대제철은 이와 관련해 1인당 1000만원씩 총 246억원의 파업 관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현대제철과 사내 협력사, 협력사 노조 등은 지난해 10월13일 당진제철소에서 고용노동부 천안지청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점거 농성 상황 해소와 공장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안에 합의해 파업을 마무리했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직영노조는 지난 5월2일부터 현대자동차와 기아, 현대모비스 등 타 계열사처럼 400만원의 특별격려금 지급을 요구해 당진제철소 사장실을 점거한 채 100일 넘게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대제철은 직영노조가 한 요구와 관련해 지난해 하반기 임금협상에서 기본급 7만5000원을 인상했고 성과급을 이미 지급해 특별격려금은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의 손해배상소송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노동자도 있다. 바로 한진중공업 노동자다. 한진중공업은 2011년에 대규모 정리해고를 했다. 이때 한진중공업 노조는 부산 영도의 크레인에 올라 투쟁했다.


선택은 
잔인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의 선택은 잔인했다. 한진중공업은 노조를 상대로 158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14년 1심 법원은 59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때 노조는 항소하지 않았다. 항소하지 않은 이유는 금액이 얼마든, 노동자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어야 ‘깎아달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

한진중공업의 손해배상청구 소송판결은 확정됐지만, 집행은 하지 않았다. 노조가 다시 회사에 위협을 가하면 손해배상 가압류를 집행할 거란 이야기가 떠돌았다. 노조 간부들은 손해배상 가압류가 진행될까 염려돼 개인재산을 만들 수도 없다. 당연히 노조 조합원은 떠나갔고, 노조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도 없었다.

한진중공업이 노조 상대로 158억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었던 2011년 겨울, 한진중공업 노동자였던 최강서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서에는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남겼다.

기업이 손해배상소송을 취소한 경우도 있다. 하이트진로는 지난달 29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소속 조합원 25명을 상대로 총 27억7000만원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해서 논란이 됐다. 기존 11명을 대상으로 한 5억8000만원 청구에서 금액 기준 5배 수준으로 늘렸다. 화물연대가 하이트진로 공장 앞 도로 점유 파업, 참이슬 등 소주 출고를 막아선 것이 이유다.


당시 하이트진로 측은 “화물연대의 도로 점유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손해액이 늘어났다”며 “경찰 조사를 통해 불법행위자 인적사항을 추가로 확보해 인원과 청구액을 늘렸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 소주 공장인 경기도 이천공장, 충북 청주공장 등에서는 지난 3월부터 운임료 인상 등을 요구하는 화물연대 소속 화물차주들의 도로 점유 파업이 이어졌다. 하이트진로는 화물차주의 파업으로 참이슬과 진로 등 소주 제품 운송이 차질을 빚으면서 지난 6월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다.

거의 합의 후 손해배상소송 취하 
금액 때문에 극단적 선택하기도

6개월간 이어졌던 화물연대의 공장 봉쇄, 본사 옥상 점거 등 장기 파업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이트진로는 지난 13일 “당사의 상황으로 인해 수개월 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며 “지난 9일 합의가 이뤄진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협상이 마무리된만큼 앞으로 더 좋은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아울러 소비자 여러분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수양물류와 노조 간 합의는 지난 9일 이뤄졌다. ▲운송료 5% 인상 ▲공장별 복지기금 1% 조성 ▲휴일 운송단가 150% 적용 등 사안에 대해 합의했다.

하이트진로는 “손해배상소송 철회 등에 합의했고, 이외에도 수양물류와 차주 간 향후 진지하게 논의하고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성기업은 2011년 아산공장에서 벌어진 파업으로 10년간 손해배상소송을 이어나갔다. 2심에서 10억1000만원 배상 판결이 나왔는데, 지난해에 노사 합의로 회사가 소를 취하했다. 노조는 주야 2교대를 주간 연속 2교대로 전환해줄 것을 회사에 요구했다. 

회사는 40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는데, 유시영 회장은 나중에 부당노동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의 자문을 받아 노조 파업에 직장폐쇄로 응수하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기존 노조 와해 공작을 한 것이다.

파업 당시 유성기업 영동지회 지회장이었던 이정훈씨는 “우편물이 자꾸 송달되니까 가정불화가 생기고 방황하면서 조합원들이 사망하기도 했다”며 “매일 아침저녁 조합원들과 미팅하면서 소송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예정이라는 점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씨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에게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을 내는 것은 그 돈을 정말 받겠다는 목적은 아닐 것”이라며 “손해배상소송을 걸어서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거는 것을 방지하고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원청 책임‧손해배상 금지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는 지난 14일 오전 11시30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는 “손해배상청구는 노동자의 노동권을 파괴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하기가 어렵다. 어렵사리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하더라도 작은 위법을 문제 삼아 파업 전체를 불법으로 내몰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도 허다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손해배상청구는 손해를 배상받을 목적이 아니라 파업하는 노동자를 괴롭혀서 노동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손해배상을 당한 노동자의 삶은 파괴되고 노조는 무력화된다”고 말했다.

노동권
무력화

이들은 “노동권을 훼손하는 노조 활동에 대한 손해배상과 원청 책임의 불인정은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사회에서도 문제라고 지적해왔다. 노동자는 단결해 파업하고, 사용자와 대등하게 교섭을 할 수 있어야 현재의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그동안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노동자들이 있다. 늦었지만 노동시민 사회가 이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권이 훼손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며 “향후 일정은 노동자와 시민에게 노조법 개정의 필요성을 알리고,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이들과 연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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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