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타이어-노조 그날 몸싸움의 진실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7.14 10:40:45
  • 호수 13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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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폭행이냐 쌍방폭행이냐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한국타이어와 노동조합 간 ‘싸움’을 위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 모르겠지만, 모양새는 영 좋지 않다. 한국타이어는 몸싸움에서 사측 관리자가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노동조합은 ‘쌍방폭행’이었다고 말한다.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시점에 <일요시사>는 사건 동영상을 입수했다.

‘한국 타이어 점유율 1위’ ‘대형 차량 시장 점유율 1위’는 한국타이어 앤테크놀로지㈜(이하 한국타이어)의 명성이다. 세계 타이어 업계에서는 2020년 기준 콘티넨탈과 스미토모에 이어 세계 6위를 차지했다. 매출의 85%는 해외에서 얻고 있으며, 자체 판매 대리점 채널인 티스테이션을 운영한다.

계속되는 
산업재해

한국타이어 본사는 경기도 성남시에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타이어 공장은 대전에 있어 사실상 대전의 향토기업이다. 국내생산기지 한 곳인 공장과 R&D센터인 테크노돔이 대전에 있고, 나머지 국내생산기지는 금산공장이다. 금산도 대전 생활권인 충청남도 금산군에 위치해, 한국타이어가 대전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은 매우 크다. 

지역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도 크다. 한국타이어는 대전의 장애인과 저소득층, 소외계층 및 사회복지시설 등에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도 무료급식소·이웃사랑 성금·벽화 그리기 봉사활동 등을 진행해 다양한 사회 공헌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타이어의 외부 이미지는 좋지만, 내부 실정은 그렇지 않다.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동안 395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다쳤다. 이는 한국타이어가 노동청에 제출한 ‘산업재해 조사표’에 기술된 내용이다.


정확히는 3.5일에 1명씩, 대전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를 입었다. 휴업 예상 일수가 30일 넘는 산재 피해 노동자는 154명이나 됐다. 재해 때문에 발생한 휴업일이 60일인 사람은 38명, 90일이 넘는 경우도 73명이었다. 하루에 3명 이상 다친 날도 13일이나 됐다.

특히 금산공장 컨베이어벨트 사망사고와 대전공장 타이어 성형기 사망사고처럼 원통 기계와 컨베이어 같은 설비에 작업 중 ‘끼임’으로 발생한 산업재해는 43건에 달했다.

영상에 찍힌 얼굴 때리는 장면 있지만…
쌓이고 쌓인 묵은 갈등 고스란히 노출

당시 양진권 금속노조 한국타이어지회 노동안전부장은 “진짜 운이 좋으면 다치는 거고, 운이 없으면 사망으로 이어지는 중대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게 투자하라고 계속 사측에 이야기했는데도 사망사고가 난 다음에서야 뒤늦게 투자하는 모양새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타이어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엔 사내에서 몸싸움 사태까지 벌어졌다. 

전국금속노동조합에 따르면 지난달 19일 오전 5시40분경 대전공장 구내식당에 모인 노동조합 간부는 ‘한국타이어 구내식당 음식 질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 캠페인은 현장 노동자가 이용하는 구내식당의 식단에 채소밖에 없어, 식단 개선을 요구한다는 취지였다.

캠페인 중 노동조합 간부인 김용성 한국타이어 지회장이 현장 노동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이때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캠페인 중이던 김 지회장을 찾아왔고, 관계자는 노동조합의 캠페인을 방해했다.


당시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김 지회장에게 “노동조합이 LTR 설비기(타이어 만드는 기계)에 몰려와 갑자기 비상버튼을 눌러 설비를 중단시켰는데, 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따졌다.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계속 따지자 몸싸움이 시작됐다.

말싸움이 어떻게 시작됐든, 몸싸움을 시작한 건 노동조합 쪽이었다. 노동조합 관계자는 사측 관계자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정강이를 가격당한 사측 관계자는 김 지회장의 뺨을 두 번 때렸다. 그 후 직원들이 달려들어 다급하게 싸움을 말렸지만, 몸싸움과 언성이 너무 높아 더 많은 직원들이 붙어 뜯어말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타이어는 사건 발생 다음 날인 지난달 20일 <한국공장 소식지>를 통해 해당 싸움이 벌어진 사태에 관해 전했다. 이 소식지는 정기 발행물이 아닌, 사내에 전달사항이 있을 때 한국타이어 홍보팀에서 작성해 배포하고 있다.

외부에선 사회 공헌
현장은 끝없는 사고

소식지 제목은 ‘아직도 이런 일이? 폭력으로 얼룩진 무법천지 현장,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였다. 소식지에는 19일 있었던 싸움이 ‘무자비한 폭행’이었다고 전했다.

소식지는 “노동조합이 근거도 없이 LTR 설비기의 비상버튼을 눌러서 설비를 중단시켰다. 사측 관계자의 질문에 근거를 내밀지 못했고, 적반하장으로 사측 관계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저질렀다”며 “갑작스러운 폭행에 반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여기에 악의를 품고 다수의 금속노동조합원이 자리를 피하는 사측 관계자를 따라가 추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도 모자라 화단으로 몰아 집단으로 넘어뜨려 밟으며, 말리거나 채증하던 다른 관계자까지도 무자비한 폭행을 자행해 상해를 입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정녕 이 상황이 회사 안에서 벌어진 일이 맞는가? 팀장, 관리자, 동료, 선후배도 아닌 사람에 대한 정상적인 인식이 없는 무법천지를 사원 여러분은 상상이나 되는가? 이 모습이 정상적인 조합 활동인가? 회사는 법과 절차에 따라 관련자 및 가해자에 대해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어떤 것을 감수해서라도 가벼이 넘어가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소식지에는 사진 두 장도 함께 첨부돼있었다. 다수의 노동조합원 뒷모습이 실린 사진으로,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싸움 동영상은 한국타이어 입장과는 전혀 달랐다. 해당 싸움은 명백한 쌍방폭행으로 보였다. 적어도 동영상에는 한국타이어 측의 ‘집단으로 넘어뜨려 밟았다’와 ‘무자비한 폭행’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금속노동조합의 설명처럼 ‘관계자가 김 지회장의 뺨을 두 번 때린’ 장면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1분가량 되는 짧은 동영상의 맨 앞부분에는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김 지회장을 향해 주먹을 날린 듯 보였고, 김 지회장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캠페인 도중 
갑자기 와서…

이어 한 번 더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오른손으로 김 지회장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뒤 영상에는 직원이 몰려들어 급하게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한국타이어 관계자가 노동조합 간부의 얼굴을 때렸다”고 소리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보였다.

그야말로 개싸움이었다. 유니폼을 제외하고 보면 영락없이 술에 취해서 싸우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싸우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근본적인 문제는 앞서 한국타이어에서 발행한 <한국공장 소식지>를 통해 언급됐듯이 ‘LTR 설비기’ 때문이었다. 한국타이어는 소식지에서 “노동조합이 근거도 없이 LTR 설비기의 비상버튼을 눌러서 설비를 중단시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동영상 의견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은 반대되는 의견이었다. 해당 LTR 설비기는 2020년에 안전 방호 장치가 고장 나서, 성형 공정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를 발생시킨 적 있다. 당시 특별근로 감독과 안전보건진단이 제시한 ▲작업 중지 ▲시정명령 ▲개선 계획을 실시했다.

당시 한국타이어는 개선을 위해 애쓰는 듯 보였지만 곧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몸싸움이 있었던 지난달 19일 오전, 노동조합은 LTR 설비기의 사고 발생 위험이 높다고 판단해 작업 중지를 요구했고, 노동조합 간부는 사고 발생의 위험과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비상버튼을 눌러 기계의 문제점을 확인했다. 


이 일은 모두 ‘한국타이어 구내식당 음식 질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하기 직후 있었던 일이다. 결국 한국타이어 관계자와 노동조합 간부가 몸싸움을 한 이유는 LTR 설비기를 멈춰,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은 “회사 소식지는 마치 노동조합이 강제로 설비를 중지시키고 설비 가동을 막은 것처럼 사실관계를 왜곡했다. 한국타이어가 해당 공정에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고, 사고 위험이 없다면 LTR 설비기를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오전에 LTR 설비기를 가동하지 않다가 오후에 가동한 것은 한국타이어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유 없이 기계를 멈췄다”
“사고 위험으로 멈춘 것뿐”

안타까운 사실은 해당 공사장에서 결국 현장 작업자가 다쳤다는 점이다. 지난달 26일 새벽 1시40분경 멀티롤(반제품 된 타이어에 부위별로 압력을 가하는 기계)에 현장 작업자의 손이 말려들어가는 협착사고가 벌어졌다. 이 는 해당 설비에 대한 점검과 개선을 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였다.

해당 LTR 설비기는 고용노동청에 시정지시서를 받은 상황이다. 시정지시 내용은 “센서가 작동하지 않아 끼임 위험이 있는 LTR 설비기 1103호기 2차 드럼 및 이와 동일한 위험이 있는 LTR 설비기에 대해 근로자 접근 시 센서에 의해 멈출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다.

이어 “수동모드는 고무 접착작업 등 작업상 불가피할 경우를 제외하고 최소화하고, 개선방안 마련 시 근로자의 의견을 성실히 청취할 것”이라며 오는 15일까지 LTR 설비기 수리도 덧붙였다.

몸싸움을 했던 당시 있었던 노동조합 관계자는 기자에게 “몸싸움했던 사측 관계자가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캠페인 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왜 설비를 세웠느냐’고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며 “정강이를 차긴 했는데, 맞진 않았고 김 지회장은 뺨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후 사측 관계자가 도망쳤고, 우리는 항의했다. ‘한국 공장 소식지’의 사진은 영상 속 사진 일부를 캡처해서 사용한 것이지, 노동조합이 집단으로 때린 일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노동조합과 교섭이 잘되지 않는 것 때문에 일을 벌인 것 아닌지 의심된다”며 “노동조합 측에서도 맞고소를 접수하려 한다. 그런데 한국타이어 측은 이미 김앤장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전했다.

한국타이어 관계자는 “금속노동조합 노동자 10명 정도가 한국타이어 사무직 3~4명을 집단 폭행했다. 일단 다친 분은 그날 입원했고, 지금은 퇴원한 상황으로 전치 2주 정도가 나왔다”며 “지난달 30일 폭행과 업무방해로 고소장을 접수했다”고 말했다.

쌍방 맞고소
법정 싸움으로

이어 “업무방해는 LTR 설비기 비상버튼을 누른 것 때문이다. 이 버튼은 정말 위급한 상황에 누르는 것”이라며 “당시 위급 상황도 아니었는데 왜 눌렀는지는 모른다”고 부연했다. 노동조합의 ‘집단적 폭행이 아니었다’는 의견에 대해 관계자는 “증거자료가 있다. 고소는 물리력을 행사한 사람 8명을 모두 했다”고 전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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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