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역대 최연소 우승 피아니스트 임윤찬

압도적 연주에 세계가 빠지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제16회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고난도 곡을 선택해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의 우승 소감은 의외로 “마음이 심란하고 걱정된다”였다. 정점에 서고도 스스로 부족함을 찾는 사람. 그가 ‘이뤄낸 것’보다 ‘이뤄낼 것’에 더 눈길이 가는 이유다.

임윤찬은 지난 2일부터 18일까지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메달(1위)과 2개 부문 특별상(청중상·신작 최고연주상)을 받았다. 그는 우승 상금 10만달러와 특별상 상금 7500달러 외에도 3년간 연주 기회·예술 멘토링 등 종합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

388명 참가
특별상까지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1958년 제1회 러시아 차이콥스키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 1962년부터 반 클라이번의 고향인 포트워스에서 4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이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 못지않은 권위를 자랑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올가 케른·츠지 노부유키 등이 이곳 우승 기록을 보유했다. 한국인 피아니스트로는 2009년 손열음이 2위에 올랐고, 선우예권이 직전 대회(2017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5년 만에 개최됐다. 이 때문에 참가자 수준이 예년보다 높았다는 후문이다. 전 세계 388명의 피아니스트가 참가해 지역 예선과 세 차례 본선, 1차(30명) 준준결선(18명) 준결선(12명)에 이어 6명이 두 차례 협주곡을 연주하는 결선을 거쳐 순위가 결정됐다. 


18세인 임윤찬은 결선 진출자 6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는 이 대회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을 새로 썼다.

임윤찬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된 이번 대회 내내 압도적인 연주력을 보였다. 결선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연주와 준결선의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연주는 이 콩쿠르 계정의 연주 영상 가운데 최고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그는 우승 직후 진행한 SBS와의 인터뷰에서 소감을 전했다.

임윤찬은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심란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크다. 이 콩쿠르를 통해 깊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관객들의 마음에 제 음악이 가닿았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마음이 무겁다. 이 콩쿠르를 통해 피아노를 우승하기 위해 피아노를 잘 치는 게 아니라, 얼마나 깊은 음악을 들려줄 것인지가 목표였다”며 “아직 너무 준비가 안 된, 너무 부족한 음악가인데 이런 상을 받아서 심란한 마음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 콩쿠르에 어떤 마음으로 임했냐’는 질문에는 “내 음악을 공유하고 싶었다. 전 세계 많은 이가 콩쿠르를 보니, 음악을 더 공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했다 싶은 라운드가 있냐’는 물음에는 “그런 순간이 되면 위험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며 “음악은 항상 만족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임윤찬은 2004년 3월20일 경기도 시흥시에서 태어났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7세에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예술의전당 음악 영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등 금세 음악 영재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서해초등학교와 예원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한예종 음악원으로 진학했다.

국제적 권위 콩쿠르서 최연소 금메달
‘초절기교 연습곡’ 선택해 기량 과시


임윤찬은 2015년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금호영재콘서트>에서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1세였다. 이후로도 예원음악콩쿠르·음악춘추 콩쿠르·모차르트한국콩쿠르 1위 수상 등 이미 국내 유수의 콩쿠르를 석권했다.

국제 무대에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보여왔다. 그는 세계적인 주니어 콩쿠르인 클리블랜드 청소년 피아노 국제 콩쿠르에서 2018년 2위 및 쇼팽 특별상을 거머쥐었다. 쿠퍼 국제 콩쿠르에서는 최연소 참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3위 및 청중상을 수상하며 세브란스홀에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가졌다. 

2019년에는 15세의 나이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 및 관객이 뽑은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특별상(청중상), 박성용영재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대회 3관왕에 올랐다. 

그가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병역법상 예술체육요원 편입을 인정하는 28개 국제음악경연대회 중 하나다. 국내 개최 대회 중에서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제주국제관악콩쿠르와 더불어 셋 뿐이다.

피아노 전공자로서는 유이한 국내 병역 대체 콩쿠르이기에 명문 음대생들도 활발히 참가하는 대회다. 임윤찬은 이 대회에서 대학생들을 모두 제치며 중학생 때 이미 병역 혜택을 따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국내 클래식계에선 조성진을 이을 ‘괴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2019년 주스페인 한국문화원 초청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원 콘서트홀에서 첫 해외 독주회를 진행했다.

깊은 생각
음악 사랑

2020년에는 금호영재오프닝콘서트 독주회·EBS <스페이스 공감>·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프로젝트(대구콘서트하우스) 참여·제17회 평창대관령음악제·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명동대성당 코리안 영 피아니스트 시리즈 등 국내외 다양한 무대에 초청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같은 해 11월, KBS가 주관하는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 녹음에 참여해 음반을 발매했다. 지난해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정식 데뷔 리사이틀을 진행했다.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은 임윤찬은 여러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지원받았다. 그는 2017년부터 KT&G 장학재단 메세나 음악 장학생으로 선발돼 2019년까지 지원받았다. 대원문화재단 장학생을 거친 뒤에는 2020년부터는 현대차정몽구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임윤찬은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 것으로 전해진다. 테너 유시 비욜링,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러셀 셔먼·이그나츠 프리드만·블라디미르 소프로니트스키·콰르테토 이탈리아노 등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바흐, 쇼팽, 스크랴빈이다.


현재 임윤찬은 2017년부터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피아니스트 손민수를 사사하고 있다. 임윤찬의 스승인 손 교수는 “윤찬이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음악가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굽히지 않고 음악에 진실되게 혼을 담아내는 마음을 존경한다”며 “피아노 세계에 큰 획을 긋는 삶을 살아가리라 믿는다”고 전했다.

“전혀 예상 못 해…당황스럽고 심란”
“음악에 더 몰두하는 음악가 될 것”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음악에 대한 열정도 깊다. 2020년 10월 열린 금호아트홀연세 리사이틀을 앞두고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그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베토벤을 지금 만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고 “베토벤을 만난다면 ‘월광 소나타 1악장’에서 페달을 내내 사용하도록 표기한 걸 고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다. 현대 피아노로 그렇게 치면 소리가 지저분하게 들린다”고 답했다.

그는 리사이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현대 피아노는 지난 수세기 동안 기술적 혁신을 거듭한 덕분에 18세기 베토벤 시대 피아노와 완전히 다른 음량과 울림을 갖게 됐다.

‘가장 연주하기 힘든 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역시 ‘월광’ 1악장을 꼽았다. 그는 “‘월광’은 템포가 빠르지 않고 셋잇단음표로 계속 흘러가는 곡”이라며 “이걸 일정한 톤으로 연주하는 게 정말 어렵다”고 설명했다.


임윤찬의 연주는 화려하다기보다 학구적이고 정갈하다. 아직 10대인 그가 성장하는 모습은 원석이 깎이는 모습이라기보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조각 작품을 계속 손질하고 다듬는 작업에 가까워 보인다는 평가다. 악보에 표기된 강도와 분절을 칼같이 준수하려고 애쓰는 성격이 이 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그는 “좋은 연주를 위해선 설계를 잘해야 한다. 구조를 잘 쌓는 게 중요하다”며 “또 곡을 작곡할 당시 작곡가의 상태까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악보에 있는 말들을 지키면서 작곡가 의도에 충실하고 싶다”고 전했다.

폭발적 인기
또래와 달라

임윤찬은 고전부터 현대곡까지 섭렵해 레퍼토리를 계속 늘려가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10대 연주자답지 않은 면모다. 

그는 “비슷한 세대 피아니스트인 다닐 트리포노프를 존경한다. 콩쿠르 이후에도 계속 레퍼토리를 늘리며 바로크음악부터 현대곡까지 섭렵한 유일한 연주자”라며 “바흐 ‘푸가’ 전곡을 연주하더니, 현대곡으로만 리사이틀을 하기도 한다 정말 대단하다”고 부연했다.

임윤찬은 쉴 때도 여느 10대와는 다르다. 휴식 중에는 이미 종영한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다시 보고, 좋아하는 노래는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라고 알려졌다. 인기 TV드라마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유행과 담쌓은 삶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임윤찬은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마음먹으면서 포기할 게 많아졌다. 모든 걸 다 하면서 피아니스트를 할 순 없을 것 같다”며 “또래들이 하는 걸 못한다고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주변 몇몇 친구들이 같은 생각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 그런 친구들이 함께 있어서 계속 열심히 해나갈 수 있다”고 밝혔다.

임윤찬의 콩쿠르 우승 소식이 전해지면서 예정된 국내 공연들의 표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지난 20일 롯데문화재단에 따르면 <클래식 레볼루션 2022> 공연 티켓은 지난 19일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우승 소식이 보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석 매진됐다. 그가 참여하는 해당 공연은 오는 8월2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학구적이고 정갈한 연주법
소식 전해지자 공연 매진

임윤찬은 이 공연에서 지휘자 김선욱·KBS교향악단과 함께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협연한다. 이 공연 좌석은 임윤찬이 지난 13일 콩쿠르 결선에 진출했을 때만 해도 60석가량 남아있었다. 그러다 지난 19일 아침 우승 소식이 알려지자, 하루 만에 모두 팔려나갔다.

오는 8월10일 예정된 클래식음악 기획사 목프로덕션의 창립 16주년 기념 공연 <바흐 플러스> 티켓 역시 전석 매진됐다. <바흐 플러스>는 임윤찬의 소속사 목프로덕션의 창립 15주년 기획 공연이다. 임윤찬을 비롯해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김재영·김영욱, 피아니스트 손민수·이효주, 클라리넷 연주자 조성호 등 회사 소속 연주자가 대거 출연한다.

특히 피아니스트 손민수는 임윤찬이 12세 때부터 지도받은 ‘스승’이다. 임윤찬은 우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손 교수를 “한국에 있는 위대하신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임윤찬이 스승과 한 무대에 서는 공연인 만큼, 국내 클래식 팬들의 관심이 쏠린 것으로 예상된다.

목프로덕션 측은 “임윤찬의 국내 독주회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협연 일정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남아있던 표가 우승 직후 빠르게 팔려나가 추가 오픈 여부를 공연장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진 코로나 유행 상황을 감안해 띄어 앉기 좌석을 적용했지만, 이를 조정할 수 있을지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빛나는 지금
기대되는 미래

현재 미국 현지서 일정을 소화 중인 임윤찬의 귀국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오는 9월28·29일에는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콩쿠르 측이 개최하는 <2022 클라이번 금메달리스트> 연주회가 예정돼있다. 오는 10월5일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원코리아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으로 호흡을 맞춘다. 이 공연은 다음 달 중 티켓 판매를 시작한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임윤찬 ‘초절기교 연습곡’ 연주 비하인드

제16회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임윤찬은 결선곡으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골랐다.

65분 길이의 이 곡은 고난도의 기교가 요구돼 피아노 역사상 가장 어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슈만이 “이 작품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리스트 그 자신뿐일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지난해 곡을 연습하면서 “연습을 많이 해도 다음 날 연주하면 이상하게 잘 늘지 않는다. 자주 나오는 옥타브 도약 등은 오래 연주해야 무르익는데 짧은 시간에 하느라 굉장히 고생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진행한 전국 투어 리사이틀 2부에서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연주했다.

휴식 없이 연결되는 1부 곡까지 합치면, 총연주 시간이 90분을 넘겼다.

임윤찬은 연습 당시 “12개 연습곡 전곡은 하나의 대서사시인데 리스트가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며 “한 번에 연주하는 게 그의 인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아야 할 것 같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초절기교 전곡 연주에 관한 꿈을 처음 품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이 연주한 초절기교 연습곡 5번 ‘도깨비불’을 들으며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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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