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사는’ 유령 아이들의 정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6.07 14:58:29
  • 호수 1378호
  • 댓글 1개

억지로 세상 밖으로 나와 연기처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도 다른 누군가에겐 아닐 수 있다. ‘주민등록번호’도 마찬가지다. <일요시사>는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로부터 다양한 출생 미등록 아동의 사례를 들었다. 이 사례에 등장하는 아이 모두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시간을 보냈고, 여전히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경우도 있다. 출생 미등록은 아동학대다. 그리고 이를 겪는 아이는 학대 수준의 방치를 경험한다.  

출생 미등록 아동은 통계가 없다. 말 그대로 미등록이기에 아동은 부모가 허락한 세상 내에서만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 모 외 가족은 아동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기준 한 달에 10명 정도 아기가 서울시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것으로 파악됐고, 이를 유추해볼 때 1년에 100명이 넘는 출생 미등록 아동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은폐되고
거부되고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출생 미등록 아동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전했다. 또 이를 발견해 기관이 아동의 출생신고를 돕더라도, 친생모가 아동의 출생신고에 협조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아 해결하는 데도 수일이 걸린다.

어떤 경우는 출생신고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도 있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친생모를 설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출생 미등록 아동 사례 중에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해결을 해도 어렵게 됐거나 부모의 손을 떠난 아동도 존재한다. 이 중 가장 슬픈 사례는 아동이 사망한 후 발견된 경우다.


이 아동은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영유아 시기 아동학대로 2년 동안 사례 관리를 받은 경력이 있었다. 그런데 아동이 취학 연령이 돼도 학교에 가지 않았고, 경찰은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동이 사망한 것을 발견했다. 

사망한 아동은 출생신고가 안 돼있었고, 이런 이유로 사망신고도 불가능했다. 이 아동은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출생신고를 먼저 해야 했다.

아동의 부는 범죄에 연류돼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고, 모는 사망한 아동 외 남아있는 자녀들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 채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다양한 출생 미등록 아동 사례 보니…
주민번호 없이…학대 수준 방치 경험

결국 아동학대의 정황이 드러났고, 사망 아동의 부는 징역 20년 이상을 구형받았다. 부가 모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는 부의 아동학대를 동조한 것으로 판결받고 구형을 받았다.

현재 모는 구치소에서 아동학대를 인정하고 반성해 출소한 상황이다. 남아있는 자녀는 부모와 완전히 분리돼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관리를 하고 있다.

모가 아동의 출생신고를 끝까지 거부해 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해당 사례의 부모는 10대로 동거 생활을 하다가 출산해, 정식 혼인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전자 검사를 먼저 진행한 후, 친자 확인을 한 뒤 모나 부 밑으로 아동의 출생신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10대 모는 출생신고에 비협조적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관련 절차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다.

탁지혜 아동보호전문기관 과장은 “보통 이런 경우 세상에 태어난 아이한테 부모의 역할인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의무감이 없는 분은 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출생신고를 하는 시기 자체가 늦춰진다”고 말했다.

사망 뒤 
발견도

혼인관계 정리가 되지 않아 아동의 출생신고가 늦어지고 있는 사례도 있었다. 해당 사례의 모는 전 남편과 이혼 후 300일이 지났을 때 아기를 출산했다. 모는 이미 동거하는 남편이 있었고, 출산한 아기를 현재 동거하는 남편의 밑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싶었다. 

아기는 전 남편의 자녀로 추정됐기 때문에 법적인 제약이 있었다. 이럴 때는 전 남편의 동의를 받고 법적인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즉 전 남편이 생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전 남편은 모의 임신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른의 감정싸움에 아기는 여전히 주민등록번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모의 아기가 태어난 지 17개월이 지났다. 급한대로 사회복지 전산관리번호(구 의료급여관리번호)를 받아 의료 혜택을 받고 있지만, 이외 국가 지원은 받을 수 없다. 

탁 과장은 “아이들은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출생 신고가 안 되면 그림자처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다. 보호자가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면 국가에서 아동을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모가 법적인 남편이 있고 집에서 아이를 낳아 출생신고를 못한 상황도 있다. 아이는 남편의 자식이 아니다. 또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병원의 출생확인서조차 없다. 예방접종을 하거나 학교를 가지도 못했다. 현재 아동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범죄에 연루된 부모와 사망한 자녀
사망 신고 위해 출생신고부터 해야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가 이 아동을 처음 발견했을 때, 아동은 ‘늑대소년’처럼 행동했다. 집에 물건은 다 부서져 있었고 싱크대와 문도 떨어져 있었다. 외부와 접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동은 현재 사회복지 전산관리번호를 받고 지역아동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다. 학교도 다니고 있지만 치료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모는 아동의 출생신고에 의지가 전혀 없어서, 아동은 여전히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실정이다.


아동이 위탁 가정에 보내지면서 출생신고가 된 경우도 있다. 이 가정의 부모는 20대 초반으로, 아기가 만 2세 때 모가 지인에게 아기를 맡기면서 유기했다. 당시에는 출생 등록에 문제가 없었다.  

모의 지인은 “아기를 모가 데려가지 않는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모는 아기를 방임·유기했고 잠적해서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이 부를 찾아가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 아기는 부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 유전자 검사 결과도 아기가 부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으로 나왔다.

모는 생모가 맞지만 부는 생부가 아니다. 모와 부의 결혼은 모가 임신을 해서 이뤄진 것이었고, 아기의 생부가 본인이 아니란 것을 알고 ‘결혼 사기’라고 주장했다. 우선 지인에게 맡겨졌던 아기는 부와 부의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복잡한
혼인관계

부는 곧 혼인 무효 소송을 신청했고 승소했다. 법원은 아이의 가족관계 등록을 폐쇄했고, 아기의 주민등록번호는 폐기됐다. 이제 모가 다시 아기의 출생신고를 해야 했지만, 모는 여전히 잠적한 상황이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문자를 보낼 때만 드문드문 답장을 보냈다. 

경찰은 모에 대해 추가적 방임 학대로 고소·고발했다. 모의 부재로 아기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면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1장 제46조에 따라 검사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선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해당 지역의 검사에게 출생신고를 요청했다. 해당 지역에는 선례가 없어서 다른 지역의 선례를 찾아보고 출생신고를 했다. 

출생신고가 끝나도 해결할 점이 있었다. 모의 아기는 너무 어린데 보육원에 가야 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보육원에 아기를 보내지 않기 위해 임시보호시설을 찾았고, 현재는 일반 가정위탁 부모를 찾아서 보호받고 있다. 

김지원 아동보호전문기관 대리는 “출생 미등록 아동문제를 해결하는 데 워낙 변수가 많다. 흔한 사례가 아니다 보니 검사도 법을 찾아서 준비해야 한다. 그나마 검사의 협조가 잘 이뤄져 무사히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모가 불법체류 외국인인 경우는 출생신고가 더 복잡해진다. 혼인하지 않고 한국에서 아기를 출산한 모는 아기가 한국에서 크더라도, 한국에서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가족관계등록법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유미숙 한국미혼모네트워크 국장은 출생 미등록 아동의 보호자를 돕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한국의 출생신고에 허점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내 자식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강제성 부여한 출생통보제가 필요”

유미숙 국장은 “출생신고에는 여러 허점이 많다. 특히 미혼부의 경우는 엄마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특히 10대에 부모가 된 아이들은 너무 쉽게 아기를 유기하게 된다”며 “혼인관계가 정리되지 않고 낳은 아기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유 국장은 “이런 경우도 출생 사각지대에 놓이는데, 인천에서는 아동을 출생신고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까지 있다. 출생신고가 불가능해 방임하거나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것”이라며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아기를 통보해 공공이 파악할 수 있는 ‘출생통보제’가 시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생통보제’에 대해 의료기관은 어떤 입장일까? 우선 모든 의료인이 출생통보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코로나19 상황 등 의료진은 업무가 지나치게 많은 상황인데, 이 상황에서 행정처리까지 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여기에 덧붙여 출생신고에 대한 책임까지 떠맡게 된다.

소아과 의사로 25년째 근무 중인 김정은 시흥 신천연합병원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출생통보제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진료실에서 출생 미등록인 상태를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행정적 부담
영원한 오류

그는 “진료실에서 출생 미등록 아동의 진료비를 깎아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의료인의 선의에 기대면 안 된다. 이런 것을 책임지라고 국가가 있는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민간 의료기관은 출생통보제가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진다. 한 번 실수하면 영원한 오류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기관의 행정적 부담을 줄일 방법이 필요하다. 의료기관의 출생신고를 100% 믿는 것보다는 의료기관이 출생을 통보한 뒤 공무원이 추적해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강제성이 없으면 출생통보제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alswn@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