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를 만나다>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제작자 정우성의 낭만

“‘도전을 응원한다’ 말이 마음에 남네요”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배우 정우성은 낭만주의자로 통한다. 누군가는 쉽게 하지 못할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거나, 기부하거나 굳이 시간을 내어 봉사활동을 한다. 잃을 것이 많은 그지만,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미담이 많다. 인간적이고 배려심이 많다고 한다. 섬세하게 스태프 한 명 한 명을 챙기기로 유명하다. 미담만큼 직업도 많다. 배우가 직업이지만, 영화 제작자로도 연출가로도 꿈을 꾼다. 이번에는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제작자로 나섰다. 한국에서 시도된 적 없는 SF 판타지 장르다. 낭만을 앞세운 도전자로 나선다. 

정우성은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 처음 나섰다. 당시 그는 “제작자로 이끈 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철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온정에 이끌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제작자로 나섰다는 걸 철이 없다고 표현한 셈이다. 

주인공 W
로망이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의 이윤정 감독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스크립터였다. <놈놈놈>에서 인연을 맺은 이 감독은 <나를 잊지 말아요>의 시나리오를 정우성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나를 잊지 말아요>뿐 아니라 이 감독의 모든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W’였다. 정우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게 로망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를 잊지 말아요>는 단편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감독은 단편을 보완해 장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정우성을 만나 자문했다.

이 감독을 만난 정우성은 그에게 “단편영화 시나리오는 왜 안 보여줬어?”라고 물어봤다. 이 감독은 “어떻게 보여줘요?”라고 반문했다. 정우성은 당연히 단편영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대본을 보여주는 것이 결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시 정우성은 그 주저함이 싫었다고 한다. “로망은 꿈이라는 건데, 왜 시도조차 못 했을까요. 그 고정관념이 싫었다”고 했다.

정우성은 단편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완할 게 아니라 새로운 장편 시나리오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감독은 그렇게 새 시나리오를 썼다. 정우성은 그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직접 배우로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직접 좋은 제작자를 알선하려 했으나,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때는 2015년, 영화계에서 멜로는 죽은 장르였다. 아무리 정우성이라도 수익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감독은 당시만 해도 연출력이 입증되지 않은 신인 감독이었다. 시나리오 수정 요구가 심했다. 정우성은 일부 제작사의 요구가 이 시나리오의 미덕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작자로 나섰다. 철이 없었기 때문에 멋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철이 없었기 때문에 도전도 할 수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우성의 낭만’이라고 했다.

<나를 잊지 말아요> 이어 두 번째 제작 작품
“처음 철이 없었고, 이번엔 너무 어려웠어요”

비록 영화는 <내부자들>과 <히말라야>의 맹공으로 인해 42만의 관객수를 동원하는 데 그친다. 약 10억원의 손해가 있었지만, 한국 영화계에 의미 있는 도전으로 기억된다. 

정우성은 다시 한 번 꿈을 꿨다. 우연히 본 단편영화 <고요의 바다>를 보고 제작자로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꿈틀댔다. 물의 보급량이 권력을 입증하는 디스토피아가 <고요의 바다>의 배경이다. 물이 넉넉하냐 그렇지 않으냐가 계급의 척도다.


무례한 사람은 “물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어요?”라고 질문한다. 요즘으로 치면 “월급이 넉넉하겠어요?”를 대신하는 말이다.

그런 시기 물을 구하기 위해 달에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5년 전 달에 있는 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발해기지라는 곳에서 연구했다. 아쉽게도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5년 만에 재시도되는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다.

“인류가 물이 없어서 달로 간다는 설정에 매료됐어요. 지구를 떠난 우주선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생기는 긴장감을 구현해내면 충분히 재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첫 번째 제작은 관계에서 출발했고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몰랐으니까. 두 번째 제작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작자로서 제삼자적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려고 했어요.”

한국에서 시도된 적 없는 SF 장르다. 엄청난 세트 비용과 막대한 CG 비용이 든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장르라고도 볼 수 없다. <나를 잊지 말아요>가 그랬던 것처럼, <고요의 바다>도 비슷한 장벽에 부딪혔다. 선뜻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배급사가 나오지 않았다.

SF 스릴러
높은 장벽

<고요의 바다>가 가진 고유성, 반짝반짝한 설정은 차치하고 상업적인 코드를 집어넣으려는 의견이 많았다. 한참 때를 기다리다 넷플릭스를 만났다. 

“SF 스릴러 미스터리가 국내에서는 첫 시도예요. 이 영화에 도전하고 싶은 움직임은 보였는데,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동반되지 않았었던 것 같아요. 상업적으로 안전한 코드를 집어넣으려고 했어요. 이 작품이 가진 무모한 도전이 생명이고 개성이거든요. 이를 훼손하려고 했었어요. <고요의 바다>만의 세계관이 잘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죠. 해외 배급사는 좀 더 이해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던 차에 넷플릭스와 함께하게 됐어요. 그리고 에피소드를 8개로 늘렸습니다.”

<고요의 바다>가 가진 가장 독특한 설정은 월수다. 달에서 나온 물인데, 이 물은 증식을 한다는 것. 인간의 체내에 흡수되면 그 안에서 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결국, 물의 증식을 막지 못하는 인간은 몸에 있는 모든 물을 쏟아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번지면서 숙주를 죽이는 좀비 영화의 설정이 물에서 발생하는 셈이다.

“월수는 이 작품이 가진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에요. 원석을 가공해가는 작업을 촘촘히 했죠. 단편은 메시지가 강하다면, 장편은 비주얼이 필요하죠. 이 독특한 설정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절대적으로 반짝해야 할 이게 반짝했나’라는 우려가 있긴 해요.”

정우성의 직업은 배우다. <나를 잊지 말아요>에서도 배우로서 나오되 제작자를 겸했다. <고요의 바다>는 철저하게 제작자로서만 역할을 맡았다. 주위에서 카메오 출연에 대한 의견을 냈지만 “말도 꺼내지 마라”면서 출연 자체를 거부했다. 후반부 목소리로만 등장했다.

정우성으로선 특별하게 새 옷만 입은 셈이다. 정우성은 <고요의 바다>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제작자를 하면서 많이 돌아본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 배우로서 정우성이 추구해야 하는 세계관은 무엇인지, 작품을 고를 때 세상에 추구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고민을 했어요. 이번에도 이 영화를 내놓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지에 고민도 많았고요. 이러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다른 걸 추구하는 건 위선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들었죠. 앞으로도 연출과 제작을 꿈꾸고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무슨 고민을 해야 할지도 되물어요.”

프로 의식
스타의 왕관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상에서 <고요의 바다> 출연진은 “현장에 마트가 있었다”고 기뻐했다. 빵과 과자, 음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는 것이다. 배우나 스태프 모두 쉬는 시간에 해당 다과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제작자의 세심한 배려였다. 

“저한테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로 생각했어요. 촬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예요. 식료품을 놓는 건데요. 그것만으로 스태프들이 좋아하고 즐기게 된다면, 어찌 보면 감사한 일이죠. 이러한 작업이 우리가 각자 프로로서 할 일을 하고 헤어지는 건데, 어찌 됐든 함께하는 거잖아요.”

“<고요의 바다>의 세계관을 온전히 세상에 내놓기 위해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내는 과정이잖아요. 그러려면 결속력이 중요해요. 그런 결속력을 위한 작은 행위인데, 배우진이 마트라고 표현해줘서 감사해요. 촬영 현장은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즐거운데, 누군가는 즐겁지 않으면 제가 좋지 않더라고요. 누구든 즐거웠으면 했어요.”

대부분 배우는 프로의식을 갖고 일한다. 특히 이름값이 널리 알려진 스타일수록 그렇다. 자신의 잘못은 물론이고, 주위 스태프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책임까지 짊어지는 게 스타의 몫이다. 20대 초반부터 스타라는 왕관을 쓴 정우성의 프로의식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세밀할 가능성이 크다.


제작자 정우성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성은 <고요의 바다> 촬영 현장을 매일 같이 출근했다. 제작자가 매일 출근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세트 촬영이라서 상주했어요. 달에서 뛰는 신을 찍는데, 발자국이 찍혔어요.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스태프가 있었어요. 작업 순서를 명확히 정해주지 않으면 한 신 찍는데도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어요. 동선도 세심하게 잡고, 다른 길목에서 스태프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어요. 현장에서 즉각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제가 경험이 많은 편이라 현장에서 많은 걸 결정했죠.”

새로운 장르와 새로운 이야기, 독특한 설정 등 <고요의 바다>는 콘텐츠로서 도전의 성격이 강하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묵직하게 그려낸다. K-콘텐츠의 클리셰라 할만한 유머와 신파는 거세했다. 작품의 속도감도 더딘 편이다. 빠르게 상황이 흘러가기보다는 인물의 감정에 집중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관에 완전히 매료됐죠”
“<오징어 게임>이 흥행의 기준? 너무 가혹해”

대중성 측면에서 아쉽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런 중에도 전 세계 3위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재밌게 봤다는 말이 제일 좋았어요. 재밌게 봤다는 말이 사실 추상적이긴 해요. ‘뭐가 재밌다는 거지?’라는 질문까지는 안 하고 싶더라고요. 어떤 한 사람의 상상 안에서 각자 새롭게 구현해내는 게 더 좋더라고요. 또 하나 좋았던 건 ‘도전을 응원한다’는 문구였어요. 제작자로서 작품이 재미있고 없음을 떠나 의미를 알아주시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제게 큰 도전이었어요. 시청자들에게 의미를 강요할 수 없는데, 이름 모를 시청자분께서 그 도전의 가치를 이해해주셨을 때 기쁨을 느꼈습니다.”

영화 <비트>로 시대를 풍미한 스타로 떠오른 후 벌써 25년째를 맞이한다. 영화를 촬영할 때 사용하는 카메라는 필름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넘어왔다. 대형 극장의 입김 아래 이뤄졌던 극장 시스템은 멀티플렉스라는 형태가 됐다. 대기업의 대규모 자본이 투입됐고, 영화 산업의 부피는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영화계는 또 다른 혁신 과정을 거치고 있다. OTT 플랫폼이다. 집에서도 전 세계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OTT 플랫폼의 혁신적인 성장에 한국의 창작자들이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세계적인 대규모 자본과 한국 창작계는 아름다운 공생을 이어가는 중이다. 영화계의 변화를 온몸으로 거친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코로나19가 OTT 플랫폼이 시청자의 피부로 흡수되는 데까지 시간을 앞당긴 것 맞는 것 같아요. 코로나19가 없었어도 플랫폼의 다각화는 있었을 것 같아요. 다른 나라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있는 플랫폼은 있었을 것 같아요. 시간만 앞당겨졌을 뿐 갑작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도래했네요. 코로나19를 우리는 극복할 거예요. 그리고 극장 문화를 다시 즐길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어요. 그리고 OTT 플랫폼과 극장은 양립할 거라고 봐요.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 세계 영화팬들이 한국 작품을 본다는 건 벅찬 일이에요. 그에 따르는 큰 책임이 동반되는 것 같아요. 의식이 많이 되네요.”

<오징어 게임> 신드롬 이후 국내외에서 K-콘텐츠의 흥행 기준이 <오징어 게임>에 맞춰준 느낌도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 1위를 찍어야 하며, 대다수 해외 팬들이 K-콘텐츠를 보고 느끼고 환호하는 장면이 담긴 2차 콘텐츠도 무수히 쏟아져야 한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이 당연한 기준이 되고 있다. 

OTT·극장
양립 가능

“가혹한 일입니다. 저희는 그 기준을 빨리 떼야 해요. <오징어 게임>은 사회적 현상이고 돌풍이에요. 그런 현상을 겪은 할리우드 작품이 몇 개나 있나요. 다른 나라에서도 몇 작품 없어요.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우연적인 현상을 얻은 것이고요. 제작자나 감독이나 배우가 닿겠다고 노력해서 닿을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런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작품 고유의 재미나 메시지를 놓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이제는 떼야 합니다.”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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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