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위기의 스타 강사 설민석

어쩐지 너무 재밌더라∼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스타 역사 강사로 이름을 알린 설민석. 그의 이름 석 자를 내건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가 논란에 휩싸였다. 두 번째 방송까지 시청률 5.9%를 얻으며 순항을 예고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역사왜곡 지적으로 한순간에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설민석과 제작진은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럼에도 여진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 고개 숙인 역사 강사 설민석 ⓒ유튜브

스타 역사 강사 설민석이 세계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설민석은 tvN 예능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콘셉트의 방송이다.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은 지난 20일, 이 프로그램에 대해 “사실관계 자체가 틀린 게 너무 많아 하나하나 언급하기가 힘들 지경”이라고 비판했다. 곽민수 소장은 한양대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와 더럼대에서 이집트학을 전공한 전문가다.

전문가 비판
제작진 시인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알렉산드로스가 세웠다는 말이나 프톨레마이오스-클레오파트라 같은 이름이 무슨 성이나 칭호라며 ‘단군’이라는 칭호와 비교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정말 황당한 수준”이라며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를 이집트에서 로마로 돌아가 말했다고 한 것 정도는 그냥 애교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곽민수 소장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며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파르나케스 2세가 이끌던 폰토스 왕국군을 젤라 전투에서 제압한 뒤 로마로 귀국해 거행한 개선식에서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이외에도 틀린 내용은 정말 많지만, 많은 숫자만큼 일이 많아질 텐데 그렇게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생략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재미있게 ‘역사 이야기’를 한다고 사실로 확인된 것과 그냥 풍문으로 떠도는 가십거리를 섞어서 말하는 것에 저는 정말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며 “설민석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그 문제의식의 극치”라고 강조했다.

곽 소장은 “역사적 사실과 풍문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 이야기를 할 때 관심을 끌기에 분명히 좋은 전략이지만, 하고자 하는 것이 그냥 ‘구라 풀기’가 아니라 ‘역사 이야기’라면 사실과 풍문을 분명하게 구분해 언급해줘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게다가 이건 언급되는 사실관계 자체가 수시로 틀렸다. 제가 자문한 내용은 잘 반영이 안 돼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보지 마시라”며 “이번 논란 속에서 소위 ‘설민석 류’라고 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조금은 더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틀린 부분 많다” tvN 세계사 강의 파문
뒤늦게 머리 숙여…신뢰 회복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 설민석의 과거 역사 왜곡 논란도 재점화되고 있다.

설민석은 2016년 tvN 교양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태조 이성계를 여진인이라고 표현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정도전, 이성계, 무학 대사의 조선 건국기를 강의하던 중 이성계가 귀화한 여진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해당 내용이 방송된 후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여진족 설은 학계에서 부정되는 내용이며 여러 자료를 통해 반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설민석은 2013년 인터넷 강의 도중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 설민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이 있었다. 민족대표들이 그곳에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며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이 1920년대 친일파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 역사학자 곽민수 ⓒ유튜브

이 같은 내용의 강의를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후,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은 “독립선언을 룸살롱 술판으로 변질시키고 손병희의 셋째 부인인 주옥경을 술집 마담으로 폄훼했다”고 주장하며 설민석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자유로운 역사 비평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부득이하게 허용할 수밖에 없는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민족대표들이 1920년대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게 된다고 언급한 부분 등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이라고 판단했다. 

태화관에 있었던 민족대표들 중 3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3·1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거나 적어도 친일반민족 행위라고 평가할 만한 행위를 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다.

과거에도 논란
명예훼손 판결

또 민족대표들이 거사 당일 이완용의 단골집인 룸살롱에 갔다고 표현하거나 술에 취해 소란을 피웠다는 표현 등은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또는 수여받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자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고 있는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하며 총 14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과거 그가 편찬한 삼국지 내용도 재조명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설민석 삼국지 논란’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네티즌들은 ‘설민석 삼국지’ 시리즈에서 유비가 공손찬에게 “손찬 형님”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지적했다.

공손찬은 성이 공손, 이름이 찬, 자는 백규로 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에게 도움을 주는 성격 좋은 호인으로 묘사된다. 

실제 역사를 다룬 정사에서는 유비와는 노식 선생 밑에서 함께 배움을 받은 사이다. 북방 이민족들을 기마부대 ‘백마의종’으로 몰아치는 장군으로,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공손이 성이고 찬이 이름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초반 중요 인물이다. 

또 과거 방송에서 삼국지 관련 강의에서 손권을 ‘강동의 호랑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강동의 호랑이는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을 지칭하는 별명이다. 

tvN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측은 방송에서 전해진 사실 관계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tvN은 고심 끝에 지난 21일 밤늦게 입장을 내고 “방대한 고대사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있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 벌거벗은 세계사 ⓒtvN

이어 “방송 시간에 맞춰 압축 편집하다 보니 역사적인 부분은 큰 맥락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었지만 맥락상 개연성에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 결과물을 송출했다”며 “불편하셨을 모든 분께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했다.


tvN은 “재발 방지를 위해 자문단을 더 늘리고 다양한 분야의 자문위원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며 “향후 다시보기 등에서는 일부 자막과 컴퓨터그래픽 등을 보강해 이해에 혼선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사과
엇갈린 반응

설민석도 고개를 숙였다. 설민석은 지난 22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안녕하세요 설민석입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려 “제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이다. 제작진은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제 이름을 건 프로그램 중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가 있다. 그런데 지난 2화, 클레오파트라 편에서 강의 중 오류를 범했고, 그 부분을 자문 위원께서 지적해 주셨다”며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 tvN 제작진이 정중하게 시청자 여러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 제가 판단할 때 제작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서 “제 이름을 건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설민석은 “제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생긴 부분인 것 같다”면서 “앞으로 여러분들의 말씀들, 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여기고 더 성실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는 설민석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로 불편해하셨던 여러분들, 걱정해주셨던 많은 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논란에 휩싸이면서 강사 설민석의 이력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설민석은 1970년생으로 단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연세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사회탐구 영역 강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 교육 플랫폼 이투스, 메가스터디 등의 대표 강사로 활약했고, 최근엔 단꿈교육, 단꿈아이 대표이사이자 방송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성계는 여진인” 과거 논란 재조명
“단순 예능” “역사 왜곡” 엇갈린 반응

생생한 입담으로 학생들뿐 아니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 <암살> 등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강의로도 인기를 모았고, 지난해엔 MBC <선을 넘는 녀석들>로 MBC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부문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 논란을 두고 네티즌들의 반응은 ‘단순 예능’이냐 ‘역사 왜곡’이냐로 갈렸다.

평소 설민석이 출연하는 방송을 자주 보고 있다고 밝힌 한 40대 직장인 A씨는 “지난 2014년 7월 개봉한 영화 <명량>을 보고 설민석 강사의 팬이 됐다”면서 “영화와 연관한 역사 강의는 정말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이번 역사 왜곡 논란으로 그의 다른 강의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30대 직장인 B씨는 “설민석 강사는 방송 출연도 활발하게 하고 대중 영향력도 있는 분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아직 아무런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좀 실망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당 방송 시청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 처지에서도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며 “구라 풀기, 구라 민석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반면 단순 역사 예능 방송에 불과해 방송사 해명 그대로 편집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20대 대학생 C씨는 “역사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동의는 하지만, 예능 방송 아닌가”라면서 “방송사 입장 그대로 편집에 좀 문제가 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예능은 그냥 예능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30대 회사원 D씨는 “조금 과장된 부분에서 지적을 받는 것 같다”면서 “역사라는 것은 결국 후손이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연구하여 입증하는 것인데, 그 입증이 일부 틀리거나 달라질 수 있는 게 역사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역사는 해석의 영역이라는 말도 있는데, 절대적으로 틀렸다는 지적은 좀 아닌 것 같다. 방송사 편집 문제도 있지 않나”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미지 물거품
신뢰성의 문제

중요한 건 설민석을 향한 시청자의 신뢰가 떨어졌다는 점이다. 그 동안 쌓아온 스타 강사라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아무리 방송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하더라도 역사 강사가 역사 논란이 있는 한 입지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설민석을 믿고 보던 시청자들이 설민석을 의심하게 된 이상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선을 넘는 녀석들> 모두 신뢰성의 문제를 떠안게 됐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