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통 큰 여장부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08.03 11:00:20
  • 호수 12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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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노벨상 가즈아~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천사가 나타났다. 과학 인재들을 위해 ‘통 큰’ 기부를 한 그 주인공은 바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다. 이 회장은 “과학이 미래”라고 강조하며 과학 인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이수영 광원전자 회장 ⓒKAIST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달 23일 한국과학기술원(이하 KAIST)에 676억원을 기부했다. 지난 2012년(80억여원)과 2016년(10억여원) 미국 부동산을 유언으로 증여한 것에 이은 세 번째 기부다. 이번 기부로 KAIST 개교 이래 최고액인 766억원으로, 이 회장은 기부 여왕이 됐다. 

교육재단 설립
연구기금 사용

이 회장은 KAIST 대전 본원 학술문화관서 열린 기부 약정식서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해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 수익금은 KAIST 싱귤래러티 교수 지원을 통한 노벨상 연구 기금으로 사용된다. 

싱귤래러티 제도는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교수, 인류 난제를 해결하고 독창적인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교수를 선발해 지원한 제도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10년간 임용기간 동안 연구비를 지원 받고 논문·특허 중심의 연차 실적 평가가 유예된다. 임용 기간 종료 시 연구 진행 과정 및 특이점 기술 역량 확보 등 평가에 따라 지원 기간을 추가로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본 이 회장의 생각이 ‘통 큰 기부’로 이어진 것.

이 회장은 “나는 과학을 모르지만, 과학의 힘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과학 기술 인재를 키워주시기 바란다.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KASIST 역대 최고액 766억 쾌척
2012년, 2016년 이어 올해 세 번째

이 회장이 KAIST와 처음 인연은 맺은 건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속할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재산을 기부할 곳을 찾았다. 2012년까지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장학사업을 진행했지만, 모교인 법대는 학업은 잘해도 사회에 공헌하는 부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곳을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서남표 KAIST 총장이 출연한 TV 인터뷰를 접했다. 

서 총장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국민이 호응해달라”는 이야기에 감명받은 이 회장은 과학기술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한 것. 좋은 연구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 이수영 회장 ⓒKAIST

노벨상은 세계가 인정하는 권위적인 상이자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분야다. 이 회장은 국내 과학기술의 위상을 높이려면 노벨상 수상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추가 기부 계획에 대해 이 회장은 “KAIST를 계속 지켜보려 한다. 연구를 잘하지만 경영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재단이 금액을 관리해 KAIST가 이익잉여금을 쓰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았던 이 회장은 재산이 의미 있게 사용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며, 신성철 KAIST 총장의 뜻에 공감해 임기 동안 KAIST 발전의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KAIST에는 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인 고 류근철 박사(578억원),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515억 원), 김병호 전 서전농업 회장(350억원), 고 김영한 여사(340억원) 등의 기부자들이 고액의 발전기금을 기탁했다. 

사시 낙방
신문사로

해방 이전인 1936년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 아들보다 강하고 씩씩하게 성장하길 바랐던 부모님의 바람대로 그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로 진학한다. 하지만 1년간 열심히 공부해 도전한 사법고시에 낙방한 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졌다.

겨우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른 그는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학원 게시판서 공고문 하나를 본 뒤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 공고문은 <서울신문>서 신입 기자를 뽑는다는 안내문이었다.

1963년 <서울신문> 10기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딘 그녀였지만 ‘따돌림’ 등으로 4개월 만에 사직서를 쓰게 된다. 이에 대해 자서전서 ‘서울대 법대 출신의 자그마한 여기자가 하나 들어와서 고개 빳빳이 들고 편집국을 다니는 내 모습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1969년 <한국일보> 자매지였던 <서울경제신문>에 뿌리를 내렸다. 1980년 전두환정부가 <서울경제신문>을 강제 폐간할 때까지 몸담아 총 17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이 회장은 스스로 “나는 아직도 <서울경제신문>을 친정으로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 시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기자 시절 그는 10원 정도 하는 안양 땅 5000평을 매입해, 돼지 2마리와 암컷 한우 3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 농장이 커지자 낮에는 신문사서 일하고 밤에는 경기도 안양의 목장서 돼지와 소를 키웠다. 목장과 서울을 오가느라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차 안에서 잠깐씩만 눈을 붙이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본격적으로 농장 일과 사업을 벌였다. 선친이 딸의 결혼 비용 등으로 남긴 50만원짜리 적금 통장 2개가 사업 초기자본금이었다. 돼지 2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돼지 100마리, 소 10마리로 규모가 커졌고 전국에 소개될 만큼 주목받기 시작했다.

돼지 출하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돌려 이익을 남겼고, 우유가 남아도는 ‘우유파동’ 때는 농림부에 초등학생 우유 무료 제공을 건의해 판로를 뚫었다.

지난 2018년
자서전 출간


목축으로 시작한 이 회장은 모래채취 사업으로 본격적인 부를 일궜다. 1988년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며 광원산업을 세우고, 여의도백화점 일부 매입 등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덕분에 미국의 연방정부가 세 들어 있는 빌딩의 건물주가 됐다.

이 회장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게 바로 KAIST에 유언으로 증여하며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건물이다.

이 회장은 80년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2018년 서울대 법대 동창이자 첫사랑이었던 김창홍 변호사와 결혼했다. 남편은 대구지검 지청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력가의 기부에는 으레 가족들의 반대가 따를 수 있지만 이 회장은 “남편이 오히려 ‘이왕 마음먹은 거 빨리 하라’며 기부를 독려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2018년 11월 자서전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를 출간했다. 이 책은 이 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책으로 KAIST발전재단이 출판하고 이 회장이 직접 썼다. 이 회장의 어린시절, 학창시절, 기자 시절, 만난 사람들, 기업가, 기부자 등 6부로 구성된 책이다. 
 

▲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

1936년생인 이 회장이 늦게나마 펜을 들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한 이유는, 자신이 가장 많이 들었던 세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첫째, 당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법조인의 길을 걷지 않고 기자의 삶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둘째, 여성의 몸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돈을 모을 수 있었는가? 셋째, 왜 기부를 결심하게 됐고 그것도 KAIST에 기부했는가? 이 회장은 자신의 삶을 하나씩 되돌아보며 이 질문의 답을 찾는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신문기자 생활
땅 사놓은 게 잘 풀려 사업가로 변신

책에는 재계 인사들 관련 일화와 취재 뒷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는, 소장하고 있던 골동품을 취재하기 위해 어렵게 만난 이야기가 담겼다. 또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한 이병철 회장 인터뷰는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 10주년 기념 전시로 이어졌다. 당시 ‘한국미술 5000년전’에 이 회장은 삼성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보물을 대거 공개해 전시를 빛냈다.

과자로 시작해 시멘트 회사까지 인수하면서 국내 10대 기업으로 회사를 키운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는 한때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평소 그가 ‘근면과 성실의 결정체’임을 알고 있었기에, 잠적한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새벽 5시에 만나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서 “내게 시간을 달라고 전해달라”며 “채권자들이 어떤 피해도 보지 않게 하겠다”는 이 창업주의 말을 기사로 전했다.

그는 모든 것이 정리된 후 “이수영 기자가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기부 행위를 두고 안종수 단국대학교 보건학 박사는 <뉴스토마토> 칼럼서 “비과학자 출신이 노벨 과학상에 대한 염원을 담아 큰 액수로 기부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 회장이 이런 행위는 두 가지 측면서 정말 의미가 크다. 하나는 우리 사회 부자들의 기부문화를 성찰하게끔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 입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과학 중요성
일깨워준 행위”

이어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선진국들에 견줘 크게 모자라는 것이 바로 갑부들의 기부문화와 노벨 과학상 수상이다. 서민들이야 기부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재산이 없어서라는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수백억원 이상의 자산가들도 수두룩한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사회 기부보다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데 골몰하고 있다. 기부하더라도 대부분 장학재단 등으로만 내놓지 과학기술 입국 목적으로 내놓은 경우는 희귀하다. 이 회장의 기부가 정말 뜻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또 다른 기부왕’ 고 송금조 이사장

이수영 회장 말고도 노벨상 수상을 위해 재산을 아끼지 않았던 또 한 명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고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다. 평생 모은 돈을 지역 교육 문화 발전에 바친 송 이사장이 7월21일 오후 6시14분에 별세했다. 향년 98세. 

송 이사장은 지난 2004년 전 재산인 1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하며 순수 공익재단인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세웠다. 그전에는 2003년에는 부산대학교의 양산캠퍼스 설립에 305억원을 기부 약정하고, 195억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이었다.

1923년 경남 동래군 철마면 송정리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송 이사장은 늘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가난 탓에 17세가 돼서야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가지 못해 친구의 집에 놀러가 몰래 교복을 입어봤다는 일화도 있다. 교육열이 울혈처럼 맺혔다.

군 복무 시절, 돈이 없어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설렁탕 한 그릇 못 사드린 게 한이 돼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소소한 점원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이후 1974년 금형 사출공장인 ‘태양사’를 설립해 유럽 전역과 미국에 식기 세트를 수출했다. 봉제공장 ‘태양산업’, 플라스틱 사출공장 ‘태양화성’ 등도 성공시켰다.

1987년에는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고 1986년에는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악착같이 수천억원대의 재산가가 됐지만, 근검절약 정신은 몸에 배어 있었다. 부인이 세수한 물을 대야에 뒀다가 화장실용으로 사용할 정도로 아끼고 아꼈다.

그렇게 모은 돈은 오직 지역사회 교육에 썼다. 1985년 학교법인 태양학원을 설립했고, 이듬해 경혜여고를 설립해 중등교육 육성에 매진했다.

2000년 봉황장을, 2002년 국민교육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전 재산을 환원할 당시 송 이사장은 “뭐가 아까우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구>


<기사 속 기사> 대한민국 기부왕은?

100세를 눈앞에 둔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은 한국의 기부왕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한 언론 인터뷰서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할 수 없어도 돈을 사용하는 데 천사처럼 하겠다”는 자신의 기부 철학을 알렸다. 

그는 1959년 삼영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세운 뒤 2000년 1조원의 사재를 털어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세계 100대 자선재단 순위서 90위에 속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재단이다.

가구업체 한샘의 창업주인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은 2015년 자신이 보유한 한샘 주식 절반인 260만주(당시 종가 기준 약 4400억원)를 한샘드뷰재단에 내놓기로 약속했다. 조 명예회장은 2015년 60만주, 2017년 100만주를 기부했으며 나머지 주식의 재단 증여도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도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의 통일나눔펀드에 개인자산 전액인 약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이 명예회장은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폭발사고(20억원), 2017년 경북 포항 지진 (10억원), 2020년 코로나19(20억)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일에 꾸준한 기부를 이어왔다.

예술계 스타들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원로배우 신영균씨는 2010년 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서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주면 된다”며 앞으로 남은 재산도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신씨는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이자 사업가, 배우, 국회의원 등으로 다양한 삶의 궤적을 그린 인물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극단서 활동하다 어머니의 반대로 1995년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1960∼1978년 영화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 이후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배우 장나라는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2009년 130억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한 바 있다. 대부분의 광고 수익을 기부하는 그는 “사람들에게 장미를 나눠주니 내 손에 장미향이 남았다”는 가훈을 가슴에 담아 선행을 실천한 것.

기부천사로 알려진 가수 션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아내 정혜영과 각종 재단에 개인으로 기부한 금액은 55억원이 넘는다. 그는 한 방송 프로그램서 “한 단체서만 아이 400명 정도 후원을 한다. 총 1000명 정도 후원을 한다”고 말해 놀라움을 안겼다.

또 가수 하춘화도 45년간 200억원이 넘는 기부를 했으며, 가수 조용필도 매년 수억원씩 기부하며 2013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 선정 ‘아시아 기부영웅 48인’에 이름을 올렸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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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