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김’ 4차 남북정상회담 시나리오

판문점, 평양…다음은 서울? 제주?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남북관계가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연일 대남 공격을 이어가던 북한이 잠시 군사행동 보류의 뜻을 밝힌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4차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상태지만, 여전히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문재인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전 남북 정상은 다시 손잡을 수 있을까.
 

▲ 제4차 남북정상회담은 개최될 수 있을까?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3일,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했다. 북한군은 평화전망대 인근 최전방 일부 지역에 재설치한 대남 확성기 철거에 들어갔고, 북한 매체들은 대남 비난 기사를 삭제했다. 앞서 북한군 총참모부는 금강산·개성공단 군대 전개 등을 예고한 상태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보류로 파탄 직전까지 몰렸던 남북 관계가 일시적인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정 국면
다시 손잡나

급속히 악화된 남북관계의 ‘표면적’ 발단은 탈북민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였다. 지난달부터 이어진 자유북한운동연합의 전단 살포로 김여정 제1부부장은 문재인정부에 고강도 비난을 이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일 한국을 비난하는 북한을 다독였다. 지난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연설서 문 대통령은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은 남과 북 모두가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엄숙한 약속”이라며 “우리 정부는 합의 이행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남과 북이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며 남북협력사업 추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남북협력사업은 남북 간 철도 연결 사업, 개성공단 금강산사업 재개를 뜻하는 것으로 문정부 취임 3주기에도 언급된 바 있다.


하지만 다음날 북한은 보란 듯이 ‘남북 화해의 상징’으로 불렸던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폭파가 발생하기 30분 전 청와대 관계자는 제4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유효하다”고 밝히는 등 대화 국면으로 돌아서고자 했지만, 결국 입장만 무색해졌다.

문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지난해 6월 남북미 정상회동 등 대형 이벤트로 이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자 북미 비핵화 협상은 소강국면으로 들어섰다. 청와대는 그로부터 두 달 후 북한에  4차 남북정상회담을 직접 제안하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했다.

하노이 노딜로 북미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중간서 이를 타개하고자 함이었다.

북 강온 양면 대남공세
미 강경론으로 청 압박

당시 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추진할 시점이라며 북한의 여건이 되는대로 이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은 2020 신년사를 통해 김 위원장의 답방을 위해 남북이 노력해나가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북한은 현재까지 그 어떤 제안에도 응답하지 않은 상태다.

북한의 최근 대남 공세 배경에는 미국의 대북제재에 한국이 별다른 손을 쓸 수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자강론’을 강조하는 북한의 선전용 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대남 공격을 이어가는 상황서 김여정 부부장을 내세웠다. 반면 군사행동 보류 결정은 김 위원장이 직접 지시하며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 남측과의 전면전을 감당하기 어려운 북측의 경제적 상황 역시 군사행동 보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대남 공세에 지나치게 집중할 경우, 북한의 경제 중심 노선이 자칫 흔들릴 수 있다.
 

▲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현 상황을 문정부가 타개할 방법 중 하나는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다. 북한의 오래된 목표는 제재완화를 통한 경제 문제 해결이다. 미국은 대북제재 해제의 키를 쥐고 있다. 문 대통령 역시 북미정상 간 대화의 기회가 남아있다고 믿고 있다.

박지원 전 대안신당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신뢰는 지금도 돈독하다. 남북미 정상 간에는 신뢰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는 북미정상 간 대화를 통해 현재의 정국을 돌파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국 설득?
미국 빼고?

하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에 무관심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의 치적으로 지지율을 높이는 건 현재로서 그에게 별 효과가 없다. 게다가 워싱턴 정가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낮게 점쳐지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문정부는 현실적으로 민주당 집권에 대비한 대북정책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나오는 내년 5월까지는 북미관계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미리 이끌고자 하는 구상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미국과 대립하더라도 남북관계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 관계를 대폭 개선하는 방향이다. 유엔 제재를 위반하지 않고 북한을 지원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을 비롯한 제3국의 여행사를 통한 한국인의 북한 개별 관광이나, 식량 및 의약품 지원 등의 방법이 있다.

다만 북한의 무력도발이 지금보다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많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북한이 대남 군사행동 계획들을 보류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긴장 수위가 낮아졌을 뿐, 북한이 언제든 남측을 향해 다시 도발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오는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대비해 세계가 놀랄 수준의 전략무기를 선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11월 미국 대선 역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역사적으로 북한은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해에 자주 도발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북한이 남한과의 긴장관계를 2017년 수준까지 끌고 갈 것이며, 10월경 미 대선을 앞두고 차기 미 행정부를 향해 무력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신뢰 여전
북에 대시

이에 미 의회와 전직 안보 및 군 당국자들은 한미연합훈련 재개 등 군사적 압박 카드를 내세웠다. 국내 정치권도 이에 거들어 대북 강경론을 내세웠다.

미래통합당(이하 통합당) 박진 의원과 신원식 의원은 한미 연합훈련 재개에 대해 공식적으로 찬성했다. 특히 박 의원은 “대북 전략자산을 전개하고 한미 연합훈련을 재개해서 북한이 오판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의 발언은 대단히 시의적절하다”고 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핵무장 카드를 거론했다. 오 전 시장은 한 라디오서 “중국을 움직여야 그나마 북한이 핵 폐기를 고려하기 시작할 상황”이라며 “그러자면 우리가 핵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정부가 임기 초에 우리는 절대 전술핵 재배치나 핵 개발 선택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입장을 정리한 것은 매우 큰 전략적 실패”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하지만 문정부가 이를 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일관적으로 평화 기조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자 했다. 또 다른 남북문제 해결 방안은 4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김 부부장과 청와대의 공세가 이어졌지만, 양 정상은 직접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북한은 김 부부장이 상황을 주도했고, 청와대도 대통령이 아닌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남북정상회담의 기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완벽한 차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 평화 기조 일관 “물밑 협상 계속”
대선정국 가까워져 “골든타임 놓칠라”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이제라도 속도감 있게 전단 금지법을 만드는 모양새라도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남한 정부가 대북전단 금지법을 만들지 않으면 향후 2년간 남북관계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재발을 방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조언했다.


일각에선 한미워킹그룹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미워킹그룹은 2018년 우리 외교부 주도로 한미 간 대북 공조를 위해 출범했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 재개 등과 같은 핵심 현안에 대해 미국 측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면서, 오히려 남북관계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적대 국면의 끝에는 2018년 5월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원포인트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남북 두 정상 간 그동안의 만남으로 쌓아왔던 신뢰가 분명히 있다고 본다”며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은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 대해 그런 (부정적인) 표현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현 상황을 진단했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은 “급박한 긴장 상황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남북 정상이 만나는 것”이라며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서 긴급회동을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문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전 두 정상이 전면에 나선다면, 다시 남북은 평화 국면으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다만 4차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실무 단위의 협상이 필요한데, 북측이 이를 거부하고 있어 한동안은 쉽게 성사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중·일
표정은?

문 대통령은 한동안 남북 물밑 접촉을 통해 현상을 동결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정부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올해 남북정상회담을 열지 못한다면 미국 대선과 한국 대선 일정에 밀려 회담의 기회를 잡는 것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렇게 된다면, 차기 정권이 출범하는 2022년 상반기까지 남북은 대치 국면으로 이어지며, 문정부의 대북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sangm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북한발 쇼크 이후, 문정부 지지율 보니…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5주 연속 하락세를 보이며 50% 초반대로 내려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한반도 긴장감 확대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 북미 대화를 포함한 북한 비핵화 과정을 담은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안보보좌관의 회고록도 다소 영향을 끼쳤다는 관측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5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1.8%p 내린 51.6%로 나타났다.(자세한 내용은 리얼미터 홈페이지나 중앙선거관리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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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