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 답답하거나 말거나' 망설이는 안철수 노림수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07.11 09: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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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이 사정하거나 국민이 억지로 등 떠밀 때까지?

[일요시사=김명일 기자] 제18대 대선이 불과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출마도 불출마도 선언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정상적인 태도"라는 비판이다. 자신의 정책과 정치적 신념들을 소상히 밝혀 국민들에게 검증할 시간을 줘야만 한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무려 4년 가까이 이어져온 박근혜 대세론을 단숨에 무너뜨리며 야권의 대항마로 떠오른 안철수, 그는 지금 무엇을 재고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기 전까진 민주통합당 내에서는 지난 2007년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지난 2007년 제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BBK의혹 등으로 큰 곤혹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영 민주당 후보를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표 차이로 따돌리며 당선됐다. 대선투표 전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당선자를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역대 가장 싱거운 대선이었다. 민주당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대권을 허무하게 내줬다.

'안풍' 매스컴의 힘?
준비된 신드롬?

이대로 박근혜 대세론이 계속된다면 2012년 대선도 다르지 않을 것이란 위기감이 팽배했던 게 지난 몇 개월 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안 원장이 정치권에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대권판도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그는 대권후보로 거론되자마자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의 여론조사 양자대결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동안 정치권에 수십년씩 몸 담아온 정치9단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안 원장은 지난해 9월2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안 원장은 이에 대해 "정말로 자격 없는 이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일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선거 출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50%가 넘는 지지율로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였던 안 원장은 당시 5% 가량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던 박원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며 박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불과 5%의 지지율을 보였던 박 후보는 안 원장의 지지와 민주통합당의 지원(?)으로 야권단일후보로 출마해 서울시장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쾌거를 거뒀다. 비록 민주통합당과의 경선을 거치긴 했지만 무소속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전 세계 정치사에도 정당 출신이 아닌 무소속 후보가 서울시장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당선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안철수라는 한 개인에게 수십 년의 역사와 수십만의 조직을 자랑하는 정당정치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이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출마선언 지연은 정치적 전략? 누가 정치신인에게 코치하나
당사자는 말이 없는데 언론만 호들갑? "준비되면 입장 밝힐까"

서울시장 선거를 계기로 안철수 신드롬은 순식간에 대선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안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것은 역시 대선출마를 위한 것이 아니겠냐는 예상이었다.

안철수 열풍에 대한 다양한 분석도 쏟아져 나왔다. 안 원장은 이미 V3, 안철수연구소 등을 통해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이같은 정치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가 지금과 같은 정치적 거물로 급성장하게 된 것은 역시 방송의 힘이 컸다는 분석이다. 특히 지난 2009년 6월 17일 MBC TV <무릎팍도사> 안철수편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다. 일부에서는 안 원장을 너무 미화시켰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했던 안 원장의 삶의 궤적들은 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안 원장 본인도 "TV에 한번 출연했더니 그 효과가 엄청났다"면서 스스로도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또 일반 국민들이 안 원장에 열광한 이유 중 하나는 안 원장이 탈(脫)이념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선거 때마다 지겹도록 이어져온 이념투쟁에 질려있었고, 이념이나 민심을 자신의 권력투쟁에 이용하는 기성정치권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안 원장의 탈이념적 행보는 국민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고, 기성정치권에 대한 환멸은 안철수 신드롬의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안철수 신드롬이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안 원장은 지난 2011년 중순부터 최측근으로 알려진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 전국을 누비는 '청춘콘서트'를 진행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정치적 행보를 펼쳐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안철수 한계론
깨끗한 것도 죄?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신드롬을 경계하면서도 "정치적, 제도적 기반이 없는 대중적 인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오래 전 "안철수 바람은 거품"이라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벼락인기를 등에 업고 하는 정치는 금방 밑천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안 원장의 대선출마 선언이 자꾸 늦춰지자 지지율은 서서히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한 유권자는 "안 원장이 청춘콘서트 등에서 했다는 말을 들어보면 그냥 듣기 좋은 말만 나열해 놓은 것이어서 정치적 철학 등을 알기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안 원장을 지지하지만 이제 대선이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 무엇을 보고 표를 달라는 것인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안 원장의 한 측근은 "안 원장 본인은 아무런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자꾸 언론에서 '오늘 출마 선언 한다, 내일 한다'는 등의 추측기사를 내보내니까 국민들이 피로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우리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전문가들 역시 "아직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도 정식으로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다. 안 원장의 출마 선언이 딱히 늦었다고 볼 순 없다. 본인이 준비가 되면 입장을 밝힐 텐데 주위에서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같다. 앞으로 대선이 5개월이나 남았는데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시간이면 사돈네 팔촌까지 조사하고도 남을 것"이라며 "일례로 박원순 서울시장도 선거 한 달 전에 출마했지만 아들의 병역비리 등 매우 혹독한 검증을 거쳤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세론' 일거에 집어삼킨 '안풍'. 허풍인가 태풍인가
연고도 없이 나타나 야권판세 좌우 '구세주인가 훼방꾼인가'

또 안 원장의 불출마설에 대해서는 "현재 총선 후 여론조사 결과 박 전 대표가 다시 독주체제를 형성하는 모양새다. 최근 문재인 고문이 야권에서 떠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박 전 위원장과는 격차가 있다. 안 원장이 이제 와서 불출마를 선언을 해버리고 발을 뺀다면 야권 전체 대선 레이스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그동안 안철수의 입만 바라보며 기다려 왔던 국민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안 원장의 성격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철수 한계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안 원장은 청춘콘서트 부산대 강연을 통해 "변화의 열망이 나한테 온 것뿐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안 원장 스스로도 대중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면 '안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기성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 원장이 대선출마를 공식화 한다면 결국 민주통합당 등 야권과 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기성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는 것에 불과하다. 안 원장을 향한 기대감은 순식간에 '안철수도 어쩔 수가 없다'는 실망감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안 원장에 대해 "안 원장의 경우는 정치인으로서 지나치게 이미지가 깨끗하다. 이게 매우 큰 강점이지만 반면 후보검증 과정에서 아주 작은 흠만 있어도 지지율이 크게 폭락할 위험도 있다"며 "일례로 한 언론이 안 원장이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다는 보도를 해 진위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었는데 다른 후보들 같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사항임에도 안 원장이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단순히 개인적 고민으로 출마선언이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안 원장이 사실은 매우 영리한 정치행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권출마를 망설이는 안 원장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매우 답답해하고 있지만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담겨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예상하는 시점에 출마를 선언하는 것은 정치적 임팩트가 약하고, 출마선언과 동시에 시작될 여야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정치전문가들은 "안 원장이 비정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기존 정치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정치적 감각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 현장을 찾은 것이나 MBC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보수와 진보 모두의 표심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영리한 판단이었다는 평가다. 이는 사안에 따라서는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안 원장의 지론을 행동으로 보여준 결과였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는 분석이다. 그 시점 또한 자신이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진다고 느껴질 때마다 적절하게 정치적 이슈에 대한 발언을 내놓았다.

영리한 정치행보
불출마 가능성 낮아

게다가 지난해 11월14일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주식의 절반 가량(1500억 상당)을 사회에 환원한 통 큰 기부는 정치권을 일순 충격에 빠트렸다. 그 흔한 기자회견조차 없이 이뤄진 기부였지만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의 1면은 모두 안 원장이 장식했다.

안 원장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일"이라며 대권행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지만 이번 기부를 통해 대권주자 이미지를 굳혔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한 정치평론가는 "태풍은 바다가 차가워지면 소멸해 버리지만 뜨거운 바다에서 수증기가 유입되면 막강한 슈퍼태풍으로 자란다. 안풍 역시 민심이라는 바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느냐, 뜨겁게 달아오르느냐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도 대선정국을 집어삼킬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며 "안철수 신드롬의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만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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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