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전원책 투트랙 청사진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8.10.22 10:06:02
  • 호수 1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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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회창식 벤치마킹?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이 변신을 준비 중이다.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과 전원책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원이 이끄는 변신이다. 두 사람은 연일 당이 나아갈 청사진을 제시하며 당원들을 직·간접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두 사람이 제시하는 청사진은 과거 한나라당과 닿아 있다.
 

“당헌·당규와 상관없이 전권을 가졌던 2012년 비상대책위가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주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새누리당’이라는 정체불명의 당명과 빨간 색깔로 당색을 바꿨을 때 한국당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지난 15일 한국당 조강특위 외부위원 4인(전원책·강성주·이진곤·전주혜)은 ‘당원·당직자·당협위원장·국회의원 여러분에게 드리는 고언’이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통해 밝힌 핵심 내용이다.

침몰 원인
새누리당

입장문의 제목은 고언이었지만, 내용은 질책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화살은 2012년 비대위를 향해있다. 당시 비대위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2012년 이전 한나라당(한국당 전신)은 정권 재창출에 적신호가 켜졌었다. 이명박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지지율 7.4%까지 추락했다.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2009년 재보궐선거서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설상가상 한나라당은 친이(친 이명박)계와 친박(친 박근혜)계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2010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이후 권력의 추가 친박계에 쏠리면서 친이계에 대한 친박계의 공천학살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수행비서관이 2011년 10월 재보궐선거서 선관위를 디도스로 공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대위 체제로 전환됐다.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은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상징색을 파랑색서 빨강색으로 바꿨다.

잠복기에 들어갔던 친이 대 친박의 갈등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 폭발했다. 2016년 12월 친이계 중심의 비박(비 박근혜)계는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을 출범했다. 2017년 2월 새누리당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한국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한국당 조강특위 외부위원 4인은 지난 2012년 박근혜 비대위가 출범한 후 당 내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4인은 기존의 한국당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며 “한국당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 원로 정치인부터 모사까지 지금 한국당을 회복 불가능한 중환자로 여긴다”고 진단했다.
 

이어 “과연 한국당은 보수주의, 자유주의에 복무했나. 자유와 책임, 도덕성에 충실했나. 미래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기나 한 것이냐”고 지적한 뒤 “한국당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 두 분을 감옥에 보내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소속 의원 몇 분이 법정에 가봤느냐. 왜 다들 피했을까. 친이, 친박 할 것 없이 처참한 보수궤멸에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쏘아붙였다.

권력자에 대한 계파의 충성경쟁에도 일침을 가했다. 


이들은 “왜 그때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느냐”며 “명망가 정치, 보스정치에 매몰돼 당내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충성경쟁을 벌일 때 한국당은 무너졌다. 권력을 재창출한 뒤에는 대통령 눈치를 보거나 아부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도 뒤편에선 ‘제왕적 대통령제’라며 탓했다. 절대권력이 무너지면 그를 공격하는 세력에 동조하기에 급급했다”고 날을 세웠다. 

외부위원 4인은 “새로운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에게 문호를 개방해 경쟁하자”며 입장문을 마무리했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 저격
비박 영입·친박 설득 동시에

조강특위 외부위원 4인이 한국당의 침몰시기로 2012년 비대위를 지목한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의 혁신 좌표를 2012년 이전으로 설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나라당 시절로의 회귀를 뜻한다.

한국당 비대위가 연일 ‘보수대통합’을 부르짖는 일도 한나라당으로의 회귀와 맥을 같이 한다. 김병준 비대위원장과 전원책 조강특위 위원은 바른미래당에 잇단 구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전 위원은 조강특위 출범 당일인 지난 11일 기자들에게 “(다른 정당) 일부 중진 의원에게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통보했다. 곧 일정을 잡겠다”며 보수 단일대오 작업에 착수했음을 알렸다.

한국당 김용태 사무총장은 “비대위의 역할은 내적으로 혁신, 외적으로 보수대통합이다. 조강특위가 출범했으니 이제 보수대통합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며 “문재인정부의 폭주를 막는 대의에 동의하는 누구라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겠다”고 전했다.

한국당 비대위는 비박에게 구애를 펼치는 동시에 친박도 아우르는 작업을 잊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부정하는 태극기부대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일이 대표적이다. 

전 위원은 지난 15일, 언론 인터뷰서 태극기부대를 보수 통합 대상에 포함시킬지에 대해 “그분들(태극기부대)을 흔히 말해 극우라고 하는데 극우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룹”이라며 “박 전 대통령을 비호하고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시위세력을 앞으로 보수 세력에서 제외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입장을 밝혔다.
 

김 비대위원장도 지난 17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역을 참배한 뒤 기자들과 만나 “(태극기부대와) 무슨 통합을 이야기하는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묶고 연결하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며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내놓고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를 통합해나가야지 ‘누구랑 이야기를 못 한다’ 이렇게 선 그을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계파주의
작심 저격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변호도 잊지 않았다. 변호사인 전 위원은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은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는 재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며 재판부를 비난한 뒤 “하루 10시간씩, 일주일에 나흘씩 하는 재판에 친박, 비박 중 누가 가봤느냐. 전부 다 피해갔다. 본인에게 오물이 튈까, 따가운 시선이 꽂힐까 싶어서 피해가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비박, 친박에게 담론을 제시하는 작업도 시작했다. 전 위원은 김 비대위원장에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끝장토론을 제안했다. 박근혜정권에 대한 평가, 박 전 대통령 탄핵 등에 대한 당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적청산을 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전 위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서 “한국당 모든 문제의 뿌리는 박근혜 문제”라며 “유승민 의원이 떨어져 나가고 바른미래당이 생기고 김무성 의원이 떨어져 나갔다가 돌아오고 이런 현상도 모두 박근혜 관련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근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친박계, 비박계의 상호 입장이 정리되지 않으면 누가 ‘칼질’을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며 “그런 과정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라고 밝혔다.

한국당 내부서 박 전 대통령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박 전 대통령은 오랜 기간 당의 최대 주주였다. 한국당에는 아직도 친박계 인사들이 많다. 한국당의 핵심 지지층은 여전히 박 전 대통령의 ‘무죄’와 ‘석방’을 주장한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려왔다. 김 위원장 역시 탄핵에 대해 “당 안에서 의견이 아주 많이 갈린다. 그 상처가 아직도 상당히 깊다”며 명확한 답변을 피해왔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면 당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히겠다”며 대법원 선고 후로 입장 정리를 미뤘다.


끝장토론 제안에 당 내 반응은 엇갈린다.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뿐”이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반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찬성하는 의견이 공존한다. 김용태 사무총장은 “전 위원의 아이디어인 만큼 앞으로 논의해보겠다”고 밝혔다.

끝장토론 제안
박통 파헤치자

박근혜정권 경제정책인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혁신을 이끄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며 친박, 비박 모두에게 어필했다.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이라 불리는 김종인 전 의원을 영입해 총선을 승리로 이끈 바 있다.

전 위원은 입장문을 통해 경제민주화를 한국당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한 반면, 김 비대위원장은 조강특위의 주장에 대해 “비대위 차원의 해석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해석 중 하나일 수 있다”며 “(보수 위기는)역사의 큰 흐름을 놓쳤다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계파를 초월한 인재영입도 한나라당으로의 회귀를 증명한다. 한국당 비대위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대선주자급 인재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 황 전 총리는 친박계, 오 전 시장은 친이계다.

김 비대위원장은 “한 분 한 분 다 보면 소중한 분들이고 나름대로 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경륜을 쌓아온 분들”이라며 “단점을 봐서 쳐내기에 앞서서 그분들의 장점을 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영입 방침을 밝혔다.
 

지난 6·13지방선거를 통해 보수 진영의 대안으로 급부상한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영입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김 비대위원장은 지난 18일, 제주도를 찾았다. 제주대 행정대학원 특강이 표면상 이유였지만, 원 지사를 만나 보수통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원 지사는 1999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줄곧 개혁 소장파라는 평가를 받은 만큼 범보수 인사로 꼽힌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과정서 탈당해 바른정당에 합류한 후 국민의당과 합당한 바른미래당 소속이었지만, 지방선거 당시 다시 탈당해 현재 무소속 신분이다.

황교안·오세훈·원희룡 접촉
바른미래 11인도 한국당으로?

원 지사는 김 비대위원장과의 회동에 앞서 입장문을 통해 이번 회동 목적이 한국당 입당이나 보수통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하며 “무소속 도지사로 도민에게 이미 약속했듯이 중앙정치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오로지 도정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이들 대선주자급 인사들에 대한 영입이 성사될 경우 과거 이회창 전 총재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이뤘던 한나라당과 비견될만하다. 한국당 내에서는 지난 2000년 때 이 전 총재가 이끈 인재 영입이 역대 보수정당 인재 영입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는 평가가 있다. 

현재 보수 성향의 중진 의원 중 이때 영입된 인사들이 다수다. 대표적으로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은 2000년 2월 이 전 총재에 의해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영입됐다. 김 비대위원장의 인재 영입은 2000년 당시 이 전 총재의 성과를 재연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한국당 안팎에서는 한국당 비대위의 행보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당 내부에서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손님이 주인을 내쫓고 안방을 차지하려 한다” 등의 비유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외부서의 평가는 더욱 박하다. 특히 한국당 비대위가 통합의 대상으로 지목한 바른미래당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는 전 위원의 보수대통합 발언들에 대해 지난 12일 “한국당은 다음 총선에서는 없어져야 할 정당이다. 결국 수구·보수로 한 쪽으로 밀려날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지난 15일에는 “한국당이 쇄신도 없이 바른미래당과 통합하자는 것은 막말로 웃기는 얘기”라며 “만약 우리 당에서 갈 사람이 있다면 수구·보수로 가라”고 날을 세웠다.

하태경 최고위원도 “태극기부대는 (헌법기관인)헌법재판소를 해체하라고 했던 집단”이라며 “헌법을 부정하는 세력과 함께 하겠다는 것은 명백한 극우대통합”이라고 가세했다.

대선주자급
접촉 시도

바른미래당 지도부가 한국당을 비난한 데는 실질적인 당내 동요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바른미래당 의원 30명 중 바른정당 출신과 일부 국민의당 출신을 포함한 6∼7명 의원들은 한국당과의 연대 또는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한국당의 보수대통합 추진과 관련 지난 17일 “바른미래당서 11명이 자유한국당으로 간다는 얘기가 여의도 바닥에 쫙 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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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