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스승 곁으로 간 이왕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09.10 11:40:25
  • 호수 1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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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설이 된 플라잉 드롭킥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한국 프로레슬링의 레전드이자 간판스타였던 이왕표가 영면에 들었다. 길지 않은 삶 64세. 하지만 그의 삶은 뜨거웠다.
 

이왕표가 지난 4일,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이왕표는 2013년 ‘세기의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과 빅 매치전을 앞두고 담낭암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병을 이겨냈지만 수차례의 수술과 항암치료로 인해 120kg에 육박하던 체중이 79kg 가까이 감소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도 최근 이왕표는 암이 재발하면서 갑작스럽게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별세
사회 각계 애도 

이왕표는 임종을 앞두고 “먼저 가게 돼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역도산, 김일 선배님들이 닦아 놓은 길에서 내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가게 된 것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한다”며 “평소에 레슬링을 사랑하고 중계방송해준 배기완 SBS국장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백 국장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각계 인사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5일 이왕표의 빈소에 방문했다. 이 총리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오늘 프로레슬러 이왕표님 빈소. 모두 한 시대를 우리와 함께 하셨기에, 조용히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고 전했다.  

후배이자 스포츠 해설가인 김남훈도 SNS에 “영원한 프로레슬러 이왕표 회장님께서 다른 세상의 링으로 원정을 떠나셨다. 담도암 등 세 차례 암과 싸우면서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믿기지 않는다”며 글을 게재했다. 


JTBC 손석희 앵커도 지난 4일 방송서 “프로레슬링의 끝자락에 서 있던 이왕표가 오늘 세상과 작별했다. 과거 ‘저도 헤드록 해줄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오늘은 좀 참아달라’며 다음을 기약했었다”라며 “조금은 민망하더라도 그때 그냥 해보시라고 할 걸 그랬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왕표는 1954년 6월11일에 충남 천안서 태어났다. 이왕표는 선수 생활 초기에는 일본서 활약을 펼쳤고, 1980년대 국내로 돌아와서는 어린이들 사이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도 운동을 놓지 않으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2013년 담도암 수술 후 최근 재발
향년 64세…영원한 레슬러 잠들다

190cm의 거구로 링 위를 휘젓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한국 대표 파이터로 이름을 날렸다.  김일 도장 1기생으로 프로레슬링을 시작해 40년 동안 1600번의 경기를 치렀다. 7번 아시아 및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신일본프로레슬링(NJPW) 활동 당시 미국 최고의 스타 헐크 호건과도 대결하는 등 한국인으로 국제적인 위상을 지닌 마지막 프로레슬러로 추억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왕표는 프로레슬러 ‘박치기왕’이라고 불렸던 김일의 1기 제자였다. 김일은 한국의 영웅이었으며 동양레슬링의 거목이었던 역도산의 제자기도 했다. 김일이 역도산 밑에서 동문수학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벌인 한일 레슬링 대결은 모든 국민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국내 최초의 실내 경기장인 장충체육관서 김일의 레슬링 경기가 열릴 때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TV 있는 집에 모여 열광했다. 김일은 반칙을 당해 피투성이가 돼도 박치기 한 방으로 응징해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조마조마하던 국민은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장면에 환호했다.


국민 영웅의 제자였던 이왕표도 국민적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왕표는 21살이던 1975년 김일의 제자로 사각의 링에 입문해 프로레슬러로 데뷔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서 활동했을 때엔 오니타 아츠시와 데뷔전을 가지고, 후치 마사노부에게 승리하는 등 유망주였다. 김일의 또 다른 제자 역발산과 함께 이왕표의 장기인 ‘플라잉 드롭킥(뛰어올라 두 발을 모아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술)’을 선보이며, 한국레슬링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가 처음 링에 올랐을 때만 해도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이왕표는 마치 영화 속 ‘슈퍼히어로’처럼 링 위를 펄펄 날아다니는 선수였다. 그의 화려한 공중기술에 많은 팬, 특히 어린이들이 열광했다. 

1985년 NWA(national wrestling association) 오리엔탈 태그팀 챔피언 등극. 1987년에는 NWA 오리엔탈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도 욕심이 생겼다. 드래곤 스페셜 킥, 파워킥 등 주특기를 강화했다.

1975년 입문
펄펄 날아다녀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프로레슬링은 야구, 축구 등 다양한 프로스포츠의 인기에 밀려 쇄락을 맞이했다. 잊을만하면 불거진 ‘쇼’ 논란은 프로레슬링에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한국 프로레슬링은 1990년대 GWF(세계레슬링연맹)에 흡수된다. 

이왕표는 미국 남서부의 최강자였던 로드 프라이스를 꺾었다. 1993년 9월, 미국 프로레슬링 선수 빅 존 호크와 GWF(Global wrestling Federation)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겨뤄 이겼다.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 
 

이후 부커T, 마이크 어썸 등과 경기를 가지면서 25번의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했으며 GMF 챔피언 벨트를 영구 보관하고 있다. 2000년에는 자이언트 콜린과 겨뤄 루테스, 역도산, 김일 등이 챔피언을 지녔던 WWA 챔피언에 등극하기도 했다.

그는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떨어진 뒤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프로레슬링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링을 설치하고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서나 경기를 펼치며 프로레슬링 알리기에 나섰다. 이왕표는 “프로레슬러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종합격투기 단체인 울트라FC를 만들었다. 

2008년에 당시 이종격투기 스타였던 밥샙과의 경기를 발표해 검색어 순위 1위까지 올라가는 등 엄청난 흥행을 예고했다. 이왕표는 밥샙을 이긴 후 전적 1전 1승 0패로 울트라FC의 초대 챔피언까지 차지했다. 이후에도 밥샙과 연계해 WWA 흥행에서 프로레슬링 룰로 시합을 가지다가 밥샙에게 패해 벨트를 뺏겼다. 

하지만 이왕표는 2010년에 밥샙을 이기며 또다시 WWA 챔피언에 등극했다. 당시 ‘각본 있는 종합격투기’라는 비판도 나왔지만, 엔터테이너로서 판을 짜는 기획력과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대결이었다. 

훨씬 크고 힘이 센 상대 선수에게도 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던 이왕표를 쓰러뜨린 것은 병마였다. 60세가 가까워 질 즈음 은퇴를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를 준비했지만 2013년 담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계획한 경기를 모두 취소하고 투병을 시작했다. 수술을 통해 암이 전이가 된 담낭과 쓸개, 췌장 1/3을 제거했다. 2차 수술을 마치고 나니 120kg였던 체중이 80kg로 줄었다. 

아시아 넘어 
세계 챔피언

더 이상 링위에 오를 수 없었고 결국 2015년 5월25일, 장충체육관서 은퇴하며 40년 동안의 프로레슬러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이왕표는 선수로는 더 이상 활약하지 못했지만 최근까지 대회 유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꿈꿨다. WWA 협회 총재로 레슬링 시합 주선 및 후배 양성에 힘썼다. 암 때문에 운영을 중단했던 이왕표 레슬링 체육관도 다시 운영할 계획이었다. 

이왕표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체육인의 귀감이었다. 특히 생전 활발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쳤다. 다문화가정, 소년소녀가장을 도왔다. ‘격기도’라는 무예를 만들어 책을 낸 뒤 출판기념회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로서 개인 후원 독력에 앞장섰으며 학교 폭력 근절에 앞장섰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서 “폭력을 무예로 오인하는 아이들에게 무인들이 소통에 나서면 효과가 틀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고인은 자신의 각막을 개그맨 이동우에게 기증하겠다고 밝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는 2013년 KBS2 교양프로그램 <여유만만>서 담도암 수술을 앞두고 “위험한 수술이고, 죽을 확률도 있다고 하니 최후를 생각하게 됐다”며 ‘나 이왕표는 수술 중 잘못되거나 차후 불의의 사고로 사망 시 모든 장기를 기증하기로 한다. 나의 눈은 이동우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휴대전화 속 유서를 공개했다. 


이동우는 그룹 틴틴파이브 출신 방송인으로 희귀병 망막색소변성증에 걸려 지난 2010년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이왕표 각막은 현행법상 이동우에게 기증될 수 없다.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장기이식법)에 따르면 생전에는 특정인을 지정한 장기 기증이 심사를 거쳐 허용된다. 그러나 안구(각막)의 경우 생전 장기기증이 불가능한 장기로 분류돼 사후 기증만 허용된다. 

국민들에게 희망 주고 떠난 ‘나는 표범’
김일 수제자로 프로레슬링 전성기 이끌어

사후 기증의 경우 안구는 기증자가 뇌사 또는 사망 전 장기 적출에 동의한 경우에만 적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족 및 유족이 장기 등의 적출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는 제외된다. 본인의 동의는 고인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나 그 외 민법상 유언의 형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가 적법하다고 가정할 경우에도 특정인을 지정해 안구를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장기이식법 제26조는 장기이식대상자 선정기준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식대상자는 법상 선정기준에 따라 이식대기자 중에서 선정되는 게 원칙이다. 

다만 안구의 경우 병원장(의료기관장)이 이식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다. 병원장이 선정하는 경우 이식대상자 선정사유와 선정결과를 국립장기이식관리기관에 통보해야 한다.

즉 사망자가 특정인을 지정해 안구를 이식하려는 유언 등을 남겼다 해도 이는 병원장에 대한 촉구의 의미만 갖게 된다. 단 가족을 지정해 안구 이식 의사를 밝힌 경우에는 선순위로 이식이 가능하다.
 

의학적으로도 이동우의 질환은 각막 이식으로 치료될 수 없다. 이동우는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 RP)’이라는 질환으로 시력을 잃었다. 이는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광수용체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대표적인 ‘유전성 망막질환’이다. 

문제는 망막 이식을 해도 시력 회복이 어렵다는 것. 다큐멘터리 영화 <시소>의 주인공 임재신씨도 이동우에게 망막 기증을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안과 우세준, 주광식 교수팀이 발표한 ‘유전성 망막질환을 치료하는 유전자치료법에 대한 최신 지견’에 따르면 유전성 망막질환은 인구 3000명당 1명의 빈도로 발생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실명하게 되는 ‘난치성 질환’이다. 

우리의 챔프
링과 ‘작별’

현재 유전성 망막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치료 ▲유전자치료 ▲줄기세포치료 ▲인공망막이식의 4가지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 중 근본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유전자치료’밖에 없다. 

지난해 12월 유전성 망막질환을 치료하는 유전자치료제가 유전자치료 분야서 처음으로 미국 식약청 FDA에 의해 승인됐지만, 치료받을 수 있는 환자가 제한될 뿐만 아니라 치료효과도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비록 이왕표의 각막 기증은 무산됐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따뜻했다. 이왕표의 장지는 고양시 청아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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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검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정부의 ‘칼’ 역할을 맡아 위세를 떨쳤던 검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검찰청이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유예기간은 1년. 검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 개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있다. 칼로 쓰이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검찰의 존재 자체를 지우진 못했다. 견제 기관을 만들어 권한을 축소한 적은 있지만 ‘폐지’를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의지 당이 화답? 지난달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획재정부를 분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라 검찰청은 설립 78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검찰청 업무 중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 기소는 공소청이 맡는다.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장관, 공소청은 법무부 장관 소속으로 정해졌다. 검찰청 폐지와 중수청·공소청 설치에는 1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검찰청 폐지는 내년 10월로 정해졌다. 내년 10월1일에 법률안이 공포되고 이튿날인 10월2일 중수청·공소청이 설치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에서 검찰 폐지를 결정하면서 진보 정부의 숙원이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정부 출범 직후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찰의 수사‧기소 업무를 분리하고 수사권 등은 신설 기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취임한 이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 선거 전부터 “추석 전 처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검찰이 되도 않는 것을 기소해 무죄를 받고 나면 면책하려고 항소하고, 상고하면서 국민한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형사소송법에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혹시 무죄거나 무혐의일 수 있으면 기소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검찰이) 마음에 안 들면 기소해서 고통을 주고 자기 편이면 죄가 명확한데도 봐주면서 기준이 다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1심이 무죄라고 했는데 (검찰이) 무조건 항소해서 유죄로 바뀌면 타당한가”라며 “검찰이 1심에서 무죄 난 사건을 항소해서 유죄로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 내년 10월 폐지 확정돼 정 장관이 ‘5% 정도’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95%는 무죄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항소심으로 생고생한다는 말”이라며 “나중엔 무죄는 났는데 집안이 망했다, 이거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 아닌가”라고 했다. 또 “국가가 왜 이리 국민한테 잔인한가”라며 “인류 수천년 역사에서 경험으로 정한 역사가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검찰청 폐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검찰개혁을 숙원으로 여겼던 여권에선 일제히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 독주’라고 비판했다.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퇴장하면서 민주당 주도로 표결이 진행됐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본회의 의결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정권의 칼, 검찰은 이제 사라졌다”며 “역사적인 날이다. 검찰청이 78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진행한 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78년이라는 세월 사이 우린 여러 번에 걸친 개혁의 후퇴, 개혁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며 “이제는 그 길을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개혁 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정부조직법”이라고 개정안을 평가했다.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이재명정권이 끝내 검찰청을 없앴다. 이는 간판을 바꾼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던 마지막 사법 안전망을 무너뜨린 폭거”라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사회적 약자”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그러면서 “그 공백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동 학대, 장애인 대상 범죄, 노인 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말문을 열기 어렵고 증거는 금세 사라진다”며 “예전에는 빠진 단서를 보완하고 잘못된 수사를 되돌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이 닫혔다”고 비판했다. 검사들은 집단 반발 하루아침에 조직이 사라지게 된 검찰 내부는 참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노 대행은 지난달 29일 검찰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78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검찰이 충분한 논의나 대비 없이 폐지되는 현실에 총장 직무대행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어 “헌법상 명시된 검찰을 법률로 폐지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역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헌법은 89조에서 검찰총장 임명에 대해, 또한 제12조와 제16조에서는 검사의 영장 청구권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은 헌법의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의 준사법기관인 검찰청을 둔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을 통해 발동한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3대 특검팀에는 110명의 검사와 99명의 검찰 수사관이 파견돼있다. 김건희 특검팀에는 40명, 내란 특검팀과 채 상병 특검팀에는 각각 56명, 14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과 내란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 수를 보면 웬만한 일선 검찰청 검사 정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집단 반발로 해석된다. 위헌 주장 헌재 가나 검사들은 지난달 30일 민중기 특검에게 입장문을 제출했다. 입장문에는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핵심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직접 수사 금지’인데 특검에 검사들이 남는 건 모순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권이나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칼을 휘두르면서 현재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줄 수 없다는 의지가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실제 진보 정부에서는 오랜 시간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본격화된 것은 문정부 때부터지만, 그 시발점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라고 봐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개혁의 핵심 방안들은 다 그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검찰의 반발이 대단했고 당시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의 위세도 엄청났다. 실질적인 검찰개혁이 이뤄진 건 문정부 들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국민 여론도 정부에 힘을 더했다. 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이후 한직으로 좌천돼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영전시켰다. 진보 정부의 숙원 노·문 거쳐 결말 이는 향후 문정부를 뒤흔들었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당선 등의 불씨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구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어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출동했다. ‘추·윤 대전’이라는 표현이 1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법안이 급하게 처리되면서 ‘누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공수처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두고 기관끼리 갈등을 빚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에 수사가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정부의 검찰개혁을 ‘반쪽짜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정부는 아예 검찰청을 없애겠다는 뜻을 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 윤석열정부 시기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검찰에 대판 비판적인 시각을 줄곧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뜻은 민주당을 거쳐 법안을 통해 실현됐다. 물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당장 보완수사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고 중수청과 공소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밀하게 구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보완 수사권을 존치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검사가 경찰의 기록만 갖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면 부실 기소, 불기소 남발 등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주장의 배경이다. 또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기관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름만 다른 ‘검찰’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정권의 칼로 기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름의 ‘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이다. 산적한 과제 후폭풍 남아 검찰은 꽤 오랜 시간 외줄 위에 서 있던 상황이다. 이정부가 그 줄을 끊으면서 검찰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검찰에 대한 경고는 늘 있었고 전조도 뚜렷했다. 이제 후속조치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가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검찰 해체가 가져올 후폭풍은 국민에게 언제쯤 닿을 것인가.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