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청요릿집’ 함지박 40년 이야기

의원님·회장님 단골집 사라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40년 전통의 중식당 ‘함지박’이 최근 문을 닫았다. 이를 두고 ‘누적된 적자 때문’ ‘수백억에 부지와 건물을 매각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만 나돌았다. 정치인들의 비밀 회합장소로 자주 쓰였고 인근 교차로 명칭이 함지박사거리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함지박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서울 대표 중식당 함지박(서초구 동광로 소재)이 폐업했다. 1970년대 문을 연 함지박은 정치인들의 비밀 회합 장소 등으로 자주 쓰였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도 매주 후배 검사들과 찾을 정도로 명사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더욱이 인근 교차로 명칭이 함지박사거리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세가 대단했다. 이밖에 쿡방 열풍과 함께 유명 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여경래 셰프도 이곳 출신이다.

도대체 왜?

한국 중식사는 화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중식계서 이름을 날리는 곡금초, 후덕죽, 왕육성, 이연복, 여경래, 여경옥 등의 요리사들은 모두 화교다. 화교의 삶이 날실과 씨실로 교차하면서 우리 식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한국의 중식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온 산둥성의 상인들이 점포를 열면서 시작됐다. 원로 화교요리사인 추본경(66)씨는 “산둥성 복산(푸산) 출신의 요리사들이 많아 초창기 한국의 중식은 ‘복산파’가 좌지우지했다”고 말한다.

과거 박정희정권은 화교들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자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1961년), 화폐개혁(1962년), 중국음식점 쌀밥판매 금지(1973년) 등의 박해정책을 폈다. 현금을 좋아해 금고에 돈다발을 쌓아뒀던 화교들의 피해가 컸고, 중국집의 매출도 감소했다. 


한국서 화교는 외국인으로 분류돼 국가고시 등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물론 선거권도 없었다. 1970년대 말 당시 문교부는 국내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대학입학 예비고사 응시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해 한성화교고등학교 학생들은 체력검사까지 받고도 응시를 못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탄압받던 화교들이 생계대책으로 연 중국집들이 1960∼1970년대 주로 정치인들의 밀담 장소나 접대를 위한 곳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요정집을 겸하는 곳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연 ‘대관원’ ‘아서원’ ‘태화관’과 1950년대 연 ‘대려도’, 1960년대의 ‘홍보석’ 등은 수백석을 확보한 화려한 식당이었다. 여기선 곰발바닥, 노루꽁지 같은 진귀한 재료가 나왔다. 

7월 말 돌연 폐업 결정, 왜?
“역사의 한 페이지 마무리”

1960년대를 넘기며 중식당은 정치인들의 단골집이 됐다. 당시 신민당 당사에서 가까웠던 대관원은 주로 김대중, 김영삼, 김홍일 등이 다녔다고 추씨가 말한다. 아서원도 여당 인사들이나 비밀회합 목적인 정치인들이 자주 찾았다. 

1925년 박헌영, 조봉암, 김재봉 등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대려도를 뺀 나머지 식당들은 1970년대 고급 호텔들이 생겨나면서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가 되면서 매콤한 쓰촨요리가 국내에 유입됐다. 이연복 셰프가 일한 사보이호텔의 ‘호화대반점’도 이 무렵 열었다. 대만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화교 2세들은 중식당을 물려받지 않고 이 땅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빈자리를 한국인들이 채워갔다. 한국인 주인, 화교 요리사 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1970∼1980년대 강남 붐이 일면서 생긴 ‘만리장성’ ‘만다린’ ‘중국성’ 등의 주인은 한국인이었다. 함지박도 여경래 셰프를 주방장으로 내세워 이때 생겼다. 한편 골목마다 배달 위주의 중국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40년 전통의 함지박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번에 함지박이 폐업을 결정한 것은 누적된 적자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일각에선 수백억원에 부지와 건물을 매각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함지박이 폐업을 결정한 것은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명소지만 2030세대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실패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함지박의 한 관계자는 “폐업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최근에 통보 받았다”며 “이후 영업 재개 여부 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빌라로?

함지박의 폐업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역사 한 페이지가 또 이렇게 마무리 되는구나” “함지박 사거리 하면 택시기사님들이 모르던 사람 없었는데...” “그 이름만으로도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아쉽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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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