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권 경제수장’ 궁중암투 내막

‘용쟁호투’ 둘 중 하나는 집에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두 수장이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다. 최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장관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경제정책 전반에 걸쳐 이견을 노출하며 공개 설전을 벌였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치권은 두 사람이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관계라고 입을 모은다. 청와대 정책실과 기재부 사이에 벌어지는 파워게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 19일, 긴급 당정청 회의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자리서 김 부총리는 “그동안 추진한 경제정책도 효과를 되짚어 보고 필요한 경우엔 관계부처 장과 협의해 개선·수정하는 방향도 검토하겠다”며 소득주도성장 중심의 일자리 정책의 선회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 부총리의 발언은 소득주도성장으로는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으니 기재부 주도의 규제개혁을 통한 혁신성장에 속도를 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최악의 고용쇼크

그러자 장 실장은 “우리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정책들이 효과를 내기 시작하면 우리 경제가 활력을 띠고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며 “국민들도 성장의 성과를 체감하고 고용상황도 개선될 것을 확신한다”고 맞섰다. 

경제성장의 혜택이 서민에게 돌아가는 소득주도성장의 효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청와대는 즉각 진화에 나섰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서 “장 실장이 한 말은 우리 정부의 정책기조와 철학이 흔들림 없이 간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라며 “김 부총리는 그런 과정서 생길 수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면서 풀어가겠다는 말로 서로 같은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대변인은 두 사람의 이견이 크게 이슈화 된 일에 대해 “언론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며 “서로 접근하는 방식과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접근방식이 다를 뿐 일자리 창출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지난 20일 청와대서 주재한 수석 비서관·보좌관 회의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을 통해 “청와대와 정부의 경제팀 모두가 완벽한 팀워크로 어려운 고용상황에 정부가 최선을 다한다는 믿음을 주고, 결과에 직(직책)을 건다는 결의로 임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정청 회의서 맞붙은 김&장
BH·여권 비상 “이대로 괜찮나”

문 대통령까지 나서 빠르게 진화에 나선 데 대해 정치권에선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진단한다. 첫 번째는 경제지표 악화로 여론이 흔들리는 상황서 ‘김(동연)&장(하성) 갈등’이라는 리스크까지 더해질 경우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문재인정부는 최악의 경제 성적표를 받았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2018년 7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비자심리지수는 101.0으로 전월보다 4.5포인트 하락했다. 지난 5월 이후 두 달 연속 하락으로 지난해 4월(100.8) 이후 1년3개월 만에 최하 수준이었다. 
 

하락폭 기준으로는 지난 2016년 11월(6.4포인트)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한국은행의 올해 고용 전망치는 9개월 사이 반 토막이 났다. 지난달 12일 발표한 ‘2018년 하반기 경제전망’에 따르면 상반기 고용여건은 취업자수 증가폭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4만명에 그쳤다. 하반기에 21만명으로 확대돼 점차 개선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연간 취업자수는 월평균 18만명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 10월 전망된 월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야권은 즉각 문정부 경제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소득주도성장을 겨냥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윤영석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장 실장,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 홍장표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을 ‘경제 파탄 워스트 5’로 규정하고 이들을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통도 나서
“직을 걸어라”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두 달 전까지 70%를 웃돌던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50%대 중반까지 떨어졌다. 청와대 내부의 위기감도 급격히 고조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김&장의 갈등이라는 불필요한 악재까지 겹치자 문 대통령이 직접 입을 연 것으로 풀이된다.

두 번째는 문 대통령이 김&장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는 분석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이 국정 최대 화두로 떠올랐을 때 김 부총리는 ‘최저임금 속도조절’을 주장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고용에 부작용을 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반면 장 실장,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 등은 소득주도성장을 기초로 한 최저임금 인상을 강조했다. 김 부총리가 주장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의 부작용은 추정일 뿐이며 오히려 그간 최저임금을 인상했을 때 나타난 실제효과를 보면 긍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5월29일 청와대서 열린 가계소득동향 점검회의를 계기로 ‘김동연 패싱론’이 급속히 확산됐다. 회의 후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앞으로 장 실장이 주도해 관련 부처 장관들과 함께 경제 전반에 걸쳐 회의를 계속 개최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가 경제사령탑인 김 부총리가 아닌 장 실장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목희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역시 5월30일 기자간담회서 “최저임금은 실증과 분석을 더 해봐야하기 때문에 김 부총리의 (최저임금) 속도조절론 발언은 적절치 않다”며 “좀 더 객관적인 지표와 동향분석이 나오고 말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다른 김&장

문 대통령은 5월31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서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의 긍정적인 부분을 자신 있게 설명해야 한다”며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말해 장 실장 등 청와대 참모들에게 확실히 힘을 실어줬다.

당시 김동연 패싱론이 확산되자 청와대는 사후 약방문 격의 진화에 나섰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가 경제 전반에 걸친 권한을 기재부장관에게 줬기 때문에 경제부총리를 앉힌 것으로 그런 의미서 김 부총리가 컨트롤타워”라고 했다. 그러나 김동연 패싱론은 더욱 확산돼 경질설로 이어졌다.


김&장의 갈등은 참여정부 때 발생했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386그룹 정치인들 간의 갈등과 기시감이 든다. 당시 여당의 젊은 의원들이 아파트 원가 공개를 추진하자 이 부총리는 “386세대가 대학 때 저항운동을 하느라 경제를 못 배워 시장경제를 모른다”고 지적했다. 

386그룹은 이 부총리가 야인 시절 받았던 은행 자문료 문제를 언론에 흘리며 보복에 나섰다. 386그룹과 충돌하던 이 부총리는 취임 1년 만에 사퇴했다.

청와대가 나서 사태 수습을 하고 있지만, 국회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와 같은 갈등이 계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야당의 모 의원실 보좌진은 “김 부총리와 장 실장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 한 사람이 물러나지 않는 한 크고 작은 잡음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시각으로 경제를 바라본다는 게 그 이유다. 1996년 참여연대서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었던 장 실장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벌 개혁에 집중해왔다. 반면 거시경제 기획을 주로 했던 김 부총리는 규제 개혁을 강조해왔다. 성격도 장 실장은 ‘분위기 메이커’인데 반해 김 부총리는 말수가 적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1일 국회 기재위 전체회의서 김 부총리는 작심한 듯 장 실장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다. ‘고용대란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란 질문에 김 부총리는 “장 실장은 청와대 안에 계신 스태프다. 전적으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언뜻 책임지는 장관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자신이 경제정책 컨트롤타워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부각시킨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어 김 부총리는 “다소간의 (견해) 차이는 있고 생각이 100% 같은 것이 건설적인 것도 아니다”라며 “(장 실장과는)전화도 자주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말해 둘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반면 장 실장은 취임 초 김 부총리와 함께 ‘경제 투톱’으로 거론되는 상황에 불쾌감을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당 대표 때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했던 장 실장은 자신이 김 부총리와 레벨이 다르다고 봤을 것”이라고 했다.

BH정책실 VS 기재부 파워게임
수습했지만…불안한 시한폭탄

김&장의 갈등은 비단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정책실과 기재부 간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다.

문 대통령은 집권 초 청와대 조직개편을 통해 지난 정부서 폐지됐던 정책실을 부활시켰다. 정책과 정무를 모두 맡아온 기존 비서실을 정무형 비서실과 정책을 총괄하는 정책실로 쪼갠 것이다. 

정책실장은 경제·사회·교육을 포함해 정책 전반을 체계적으로 실행하는 장관급 인사로 정했다. 정책실 산하에는 새로 신설되는 일자리수석과 함께 기존의 경제수석, 사회수석 등이 배치됐다. 일자리수석을 산하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실에 막강한 권력이 부여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한 기재부 관계자는 정책실 부활과 관련해 당시 “(정책실 부활 이후)경제정책 문제에 청와대의 장악력이 커졌고, 교수 출신 경제수석비서관과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기재부의 불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기재부 안팎에서는 “정책실이 상왕처럼 군다”는 불만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을 앞두고 기재부가 정부지원금 지급 시기 문제를 제기하자 장 실장 등 청와대 정책실이 기재부 간부를 불러 ‘복지부동 아니냐’고 비판했다는 후문이다.

또 정책실은 올해 초 기재부의 세수 예측 실패로 예산 집행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주장하면서 둘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민관합동으로 운영하는 혁신성장본부에 대해서도 기재부는 혁신성장의 컨트롤타워가 될 것이라 기대감을 보인 반면, 정책실은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최근 논란을 의식한 듯 지난 22일, 국회서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며 사태 진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장 실장은 이날 오후 재개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김 부총리와 매우 호흡을 잘 맞추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린다”고 강조했다. 

김 부총리는 미리 회의장에 앉아있던 장 실장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추가적인 논란 확산을 잠재우기 위한 액션으로 풀이된다.

정책실 VS 기재부
장막 뒤 파워게임

그럼에도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이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권 내서조차 두 사람의 갈등을 마냥 방치할 수 없다는 말도 들린다. 경제 투톱의 갈등이 문정부 경제정책의 안정성에 실금을 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금을 방치했다가 자칫 문정부 신뢰라는 둑을 무너뜨리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퍼지는 양상이다. 여권 내에서는 ‘김&장 리스크’라는 말까지 나도는 지경이다. 정치권은 과연 두 사람의 ‘불편한 동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문정부 ‘중폭개각’ 어디?

청와대가 이르면 이번 주 추가적인 개각을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2일 “개각 대상에 대한 검증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며 “대통령의 최종 결심이 남은 상황”이라고 알렸다.

서너 곳 이상의 부처 장관이 교체되는 중폭개각에 힘이 실린다. 청와대와 정부 안팎에서는 중폭개각이 이뤄질 경우 환경부와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그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 파동으로 군 장악력이 떨어진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교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청와대가 개각 콘셉트로 구상한다고 발표한 ‘협치 내각’은 구현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목>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