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지대’ 게스트하우스의 두 얼굴

혼자가 아닌 ‘나홀로 여행’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얼마 전 제주 게스트하우스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며 게스트하우스의 문제점들이 제기됐다. 일부 업장서 벌어지는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음주 문화와 제도상의 허점들이 줄줄이 밝혀졌다. 이를 두고 업계 관계자들은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게스트하우스는 여행객이 공동 기숙사 형태의 방과 주방 등을 공유하면서 머무는 숙박업소다. 여행객 간 공간과 여행객 간 추억을 나누는 긍정적인 취지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터질 게 터졌다”
변종업소 급증

하지만 언젠가부터 일부 게스트하우스의 변질 영업 행태가 들리기 시작했다. 간소했던 게스트하우스 내 저녁 식사 파티 문화가 일부 업장에선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음주 모임 문화로 변질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 이런 점들이 우리 사회문제로 이어졌다. 

결국 사단이 벌어졌다. 낭만적인 취지로 생겨난 게스트하우스서 성폭행 사건과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 게스트하우스가 다수 모여 있는 제주도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살인 사건’이라 명명됐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살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달 10일 혼자 제주도 여행을 떠난 20대 여성이 실종 되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그리고 다음 날 실종 여성은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되고 말았다. 수사 결과 20대 여성은 앞서 7일 사망했고 놀랍게도 목졸라 숨지게 한 범인은 바로 피해 여성이 투숙 중이던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인으로 밝혀졌다. 

용의자는 공개수배가 돼 경찰의 추적을 받았고 약 1주인 뒤인 지난달 13일 충청도의 한 모텔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가해자 관리인은 당시 준강간 행위를 한 혐의로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처럼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음에도 다수가 오가는 게스트하우스를 관리하며 그곳서 매일 밤 음주 파티를 열어 왔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같은 사실이 퍼지자 “그간 우려돼왔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며 게스트하우스의 안전 문제와 당국의 관리 실태가 도마에 올랐다. 게스트하우스 산업이 지난 10년간 급성장하는 과정서 각종 문제가 노출됐지만 이를 방치한 정부 당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투숙객 살인에 성범죄, 폭행, 절도…
잇단 범죄 1년새 171곳 경찰 신고

게스트하우스는 해외서 도입된 숙박 형태다. 외국인 여행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주택이나 빈방을 활용하는 도시민박서 출발했다. 영국 등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호텔 모텔 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숙박 업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게스트하우스는 ‘나홀로 여행’이 2030세대 젊은 층의 여행 트렌드로 자리잡으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업계에선 2000년대 후반 제주도 도보 여행로인 ‘올레길’이 기폭제가 됐다고 말한다. 올레길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게스트하우스들이 제주도 곳곳에 생겨나면서 일종의 트렌드로 떠올랐다는 설명이다.

이후 게스트하우스 문화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국내 여행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지만 지역 특색을 살린 관광자원이나 콘텐츠가 미비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틈을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내세운 게스트하우스가 비집고 들어왔다. 

펜션 모텔 등 기존 숙박시설보다 저렴하다는 점도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층에 어필했다. 2011년 코레일이 도입한 1주일 무제한 철도티켓 ‘내일로패스’의 인기도 한몫했다. 자연스레 20대 미혼 남녀들이 게스트하우스로 몰렸다. 

느슨한 관리를 틈타 일부 게스트하우스들은 무법지대로 전락했다. 음식점 등록 없이 음식과 술을 판매하는 가벼운 탈법은 기본이었다.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분별하게 게스트하우스를 세우고 최소한의 검증 없이 종업원을 고용하는 업주들도 생겨났다. 

느슨한 관리
알고도 묵인

2015년 서울 명동의 게스트하우스 종업원은 술에 취한 투숙객의 방을 마스터키로 열어 성폭행을 시도했고, 지난해 8월 경북 안동에서는 게스트하우스 관리인이 객실 내 욕실 천장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해 성범죄·폭행 등으로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제주 게스트하우스는 171곳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행정관청은 불법 숙박업을 알고도 묵인했다. 

지난해 10월 제주도 감사위원회 감사 결과 제주도 행정관청이 신고 없이 불법 영업을 한 숙박업소 398개 동을 적발하고도 아무런 행정처분을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감사위는 “농어촌민박이 제도상 허점을 이용해 편법 운영되고 있으나 행정 당국이 지도·감독을 소홀히 해 사업 취지가 크게 훼손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전국 게스트하우스가 몇 개인지 정확한 통계자료조차 없다. 현행법상 게스트하우스라는 업(業)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일반적으로 게스트하우스라는 간판을 내건 대부분의 숙박업소는 공중위생관리법상 숙박업과 관광진흥법상 호스텔업, 농어촌정비법상 농어촌민박사업 중 하나로 신고해 영업하고 있다. 

이 중 대다수 게스트하우스는 ‘농어촌 민박’을 선택한다. 규제가 느슨하기 때문이다. 

농어촌 민박사업은 농어촌지역에 거주하는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을 이용해 농어촌 소득을 늘릴 목적으로 투숙객에게 숙박과 취사시설 등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숙박업은 공중위생관리법과 소방안전법상 위생·소방 기준을 충족해야 하지만 농어촌민박사업은 이를 피해갈 수 있다. 특히 제주도는 제주 시내 일부 지역이 농어촌지역으로 지정돼있어 도심지서도 농어촌 민박사업을 통한 게스트하우스 운영이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게스트하우스를 ‘호텔’이나 ‘여관’처럼 별도의 숙박 개념으로 정하고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운영상태를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흥욱 제주여행소비자권익증진센터장은 “불법 게스트하우스 문제가 불거지면 관광산업 전반에 부적정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게스트하우스를 별도의 숙박시설로 분류해 법적 기준 및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서비스 규정, 등급제 시행 등의 제도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자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원 강릉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황모(35)씨는 “블로그 후기 조작 등으로 일단 손님을 끌어모아 한철 장사만 하는 게스트하우스도 있다”며 “이번 사건이 자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사건 이후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는 비상이 걸렸다. 기존 예약이 줄줄이 취소됐고 예약 문의도 뚝 끊겼다. 몇몇 비정상적인 운영을 하는 게스트하우스 때문에 실제 외국인을 상대로 민박업을 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혼자 오려던 여성분들이 예약을 취소하겠다는 연락이 계속해서 오고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게스트하우스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 19일 광주광역시서 제주도로 2박 3일 ‘혼행(혼자 하는 여행)’을 온 대학생 오모(여·22)씨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가 뉴스를 보고 겁이 났고 부모님도 호텔서 지내는 게 아니면 여행을 못 보낸다고 하셔서 시내 호텔에 묵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취소
아직 정신을…

한라산 근처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이모(38)씨는 “결국 곪았던 문제가 터진 것”이라며 “이번을 계기로 고칠 것은 확실히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파티 문화가 나쁜 게 아니지만 무허가로 술과 음식을 팔며 유흥을 즐기는 변질된 파티 문제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실제 제주 곳곳에는 클럽을 방불케 하는 DJ 파티를 운영하거나 24시간 소등 없이 파티를 여는 것을 무기로 여러 파티 게스트하우스가 경쟁적으로 영업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성비(性比) 잘 맞춰주는 게스트하우스’ ‘헌팅하기 좋은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 홈런(성관계를 뜻하는 은어) 치는 법’ 등 게스트하우스를 클럽이나 나이트클럽처럼 묘사한 홍보 글이나 이용자 후기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상황에도 일부 게스트하우스들은 투숙객에게서 돈을 받고 음주파티를 벌이는 불법영업 행태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경찰청은 지난달 21일 제주도 내 게스트하우스 불법행위를 일제 점검한 결과 9곳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제주시 구좌읍의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는 투숙객 1인당 3만원을 받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다가 적발됐다. 제주시 애월읍의 한 게스트하우스는 손님 20명에게서 각각 참가비 1만8000원을 받고 랍스타와 주류를 제공한 혐의다. 

제주시 한림읍의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는 손님 8명에게서 참가비 1만5000원씩을 받아 주류를 제공하다가 단속됐다. 한림읍의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 역시 파티비 명목으로 1인당 1만5000원씩 받고 주류를 제공한 혐의다. 

신고를 하지 않고 음식점 영업을 할 경우 식품위생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 3곳은 민박요금표나 신고필증을 게시하지 않았다가 적발됐다. 민박요금표를 게시하지 않을 경우 농어촌정비법에 따라 과태료 100만원을 물리도록 하고 있다. 경찰은 한림읍 소재 게스트하우스 업주 A(41)씨 등 9명을 식품위생법 위반 등으로 형사 입건하고 행정기관에 통보키로 했다. 

불법·편법업소 우후죽순
양심적인 농촌민박에 불똥

경찰은 각종 SNS 상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술과 음식 등을 판매·제공한다고 홍보하면서, 불법 영업을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사전 첩보수집 및 112신고 자료 등을 확보해 점검을 실시했다. 

경찰은 행정, 소방 등 유관기관 합동으로 제주도 내 모든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종합 안전진단을 실시, 일정한 안전기준을 충족한 업소에 대해서는 ‘안전 인증제’를 추진할 예정이다. 

강희용 제주경찰청 생활질서계장은 “업주가 주류를 제공하려할 때 손님들 스스로가 불법행위로 인식하고, 이를 사양하거나 112 신고를 한다면 무분별한 음주파티 문화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관광학부 교수는 “행정이 현실을 뒤늦게 따라가는 처지지만 지금은 이런 조치라도 필요하다”며 “다만 행정기관이 매기는 게스트하우스 안전 등급은 실제 게스트하우스 이용자들이 느끼는 안전이나 만족도와 괴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평가에 이용자 경험을 반영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법 업소 불똥
자정 노력 필요

제주시 오등동서 1992년부터 농어촌민박업을 해온 감귤농가 김모(73)씨도 “여행자에겐 소박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농촌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농가에겐 농외소득원이 되는 모범적인 농촌 게스트하우스도 많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짜 농어촌민박’이 타격을 입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감독 방안이 마련돼야 하고, 업주들의 자정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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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