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재산 추징 막전막후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8.01.15 11:00:01
  • 호수 1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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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 한 푼 없이∼’ 길거리 나앉게 생겼다

[일요지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탄핵정국 때부터 국민들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 재산 국고 환수가 시동을 걸었다. 검찰은 지난 8일, 법원에 박 전 대통령 재산에 대한 동결 조치를 청구했다. 검찰이 추정하는 박 전 대통령 재산은 최소 60억원. 추징 이외에도 검찰이 벌금형을 내릴 가능성이 제기돼 귀추가 주목된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양석조 부장검사)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뇌물수수 및 국고손실 혐의 사건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의 재산에 관한 추징보전 명령을 법원에 청구했다. 국정원으로부터 36억5000만원의 특수활동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로 박 전 대통령을 기소한 뒤 이어진 후속 조치였다.

국고 환수

이는 재산 추징으로 가는 수순이다. 추징보전은 범죄로 얻은 불법 재산을 형이 확정되기 전 양도 및 매매 등 일체의 재산 처분을 할 수 없도록 보전하는 조치를 뜻한다. 법원이 추징보전 명령을 내리면 박 전 대통령은 재산을 팔거나 타인에게 넘길 수 없다. 

부동산은 물론 예금 등 동산도 예외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부터 2016년 7월까지 매월 5000만∼2억원씩 총 36억여원의 국정원 특활비를 수수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검찰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이 국정원 상납 자금 중 상당액을 사무실 금고에 보관,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정 운영과 거리가 먼 사적 용도로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활비 사용처는 ‘기 치료’와 ‘주사 비용’ ‘의상비’ 등으로 알려졌다.

추징보전 대상은 박 전 대통령이 28억원에 매입한 내곡동 자택과 1억원 수표 30장이다. 검찰은 수표 30장을 유영하 변호사가 보관 중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재산은 최소 60억원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3월 발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재산은 37억원. 1년도 되지 않아 23억원가량이 늘어난 셈이다. 지난해 기준 대통령의 연봉은 2억1200만원대로 박 전 대통령이 연봉을 한 푼도 쓰고 않고 모두 모았다고 해도 불가능한 증액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검찰의 이 같은 조치에 관해 유죄판결을 확신한 결과로 해석한다. 유죄 판결 전 재산을 은닉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만약 박 전 대통령이 향후 재판서 국정원 특활비 수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을 경우 조치를 당한 박 전 대통령의 재산은 국고로 환수된다.

미상의 예금까지 합하면 박 전 대통령의 재산은 검찰이 추산하는 재산보다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유 변호사가 수표 30장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의 현금 10억원을 보관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삼성동 주택을 매각하는 과정서 발생한 차익인 것으로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삼성동 자택 매매 후) 잔금 거액이 있었는데 유 변호사의 요청에 따라 윤전추 전 행정관이 수표, 현금으로 출금해 유 변호사에게 전달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유 변호사는 검찰과 통화서 수표를 자신이 관리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검찰의 출석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 수표 등 박 전 대통령 재산관리가 향후 있을 변호 등에 대한 대비라는 해명을 내놨다. 

검찰은 “정당한 거래로 나온 자금 이전이라든지 세금 신고가 된 것인지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수표 등은 박 전 대통령 소유의 재산을 유 변호사가 잠시 맡아준 상황 아닌가 생각된다”고 풀이했다.

검찰, 보유 재산 60억원 동결
벌금 가능성 대두 ‘최대 5배’

그러나 금액의 규모로 봤을 때 변호사 수임료로 보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관측이다. 앞서 박 전 대통령 사건 재판에 선임된 변호사는 유 변호사를 포함해 모두 7명으로 지난해 10월 법원이 구속영장을 추가로 발부하자 이에 반발해 전원 사임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7명 중 최고액(1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변호인은 2000만∼3000만원을 수임료를 받았다. 유 변호사가 맡고 있는 40억원을 온전히 수임료로 보기 힘든 이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40억원의 성격이 변호사 수임료라기보다 사실상 박 전 대통령 재산관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검찰 또한 해당 금액이 변호사 수임료로 지불되지 않았고 변호사들도 세금 신고를 하지 않은 점에 비춰 아직 박 전 대통령의 재산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 변호사가 지난 9일 다시 변호사 선임계를 제출한 점도 ‘재산관리설’에 무게를 싣는다. 박 전 대통령과 유 변호사의 관계가 단순 의뢰인과 변호인을 넘어섰다고 전제하더라도 가족도 아닌 변호사에게 이런 거액을 맡기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선임계를 제출한 시점 또한 검찰의 발표가 있고 하루 뒤라는 점에서 재산관리설에 힘이 실리는 상황이다. 유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추가 기소된 직후 서울구치소를 찾아 대책 마련에 고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 변호사는 법원의 재산 동결 결정 전 30억원을 다시 박 전 대통령의 계좌로 송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유 변호사에게 재산관리를 맡긴 목적이 추징에 대비한 은닉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9일 자신의 SNS에 “유 변호사가 박 전 대통령의 재산 도피에 협조한 것으로 보인다”며 변호사협회의 징계를 촉구했다.

이외에도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추징보전 대상서 제외된 나머지 현금 약 10억원의 용처 등에 대해 검찰은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또 뇌물 총액 36억원 가운데 이재만 전 비서관이 관리한 금액을 제외하고 이재만·정호성 전 비서관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한 20억원의 용처가 불분명한 상태다. 


검찰은 해당 금약의 용처를 계속 수사해나갈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벌금도 가능

유죄가 확정될 경우 뇌물혐의 액수인 36억원은 모두 국고로 환수된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원이 박 전 대통령에게 추징과 더불어 따로 벌금형을 내릴 수 있다고 관측한다. 특가법상 뇌물의 경우 법원은 징역형과 별도로 뇌물 액수의 2배 이상 5배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다. 벌금 규모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은 내곡동 자택마저 잃을 위기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박근혜 자승자박? 

검찰이 법원에 박근혜 전 대통령 재산 추징보전 청구를 제출한 가운데, 2013년 6월 개정된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별법(이하 전두환 추징법)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전두환 추징법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 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개정법에 따라 공무원이 뇌물 등 불법으로 취득한 재산에 대한 몰수·추징이 범인 외 가족을 비롯한 제3자가 정황을 알면서 취득한 불법 재산 및 그로부터 유래한 재산도 포함되도록 확대됐다. 

즉 일반법에 의하면 유영하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30억을 추징할 수 없지만, 전두환 추징법에 의해서 추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 본인에게 자승자박이 되어 버린 셈이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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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