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옥중 창당설’ 막전막후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8.01.02 10:27:39
  • 호수 1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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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 모아 당 만든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2017년에 이어 2018년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검찰은 박근혜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의 수사를 조만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최근 문재인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박근혜정부가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이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이면 합의 존재를 발표했다. 그 정점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자연인 신분이 되면 친박 세력을 규합, 당을 창당하려했다는 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13일 직권으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구속기간 만료일은 그해 10월16일 밤 12시까지였다. 최장 6개월이 늘어난 박 전 대통령의 구속기간은 올해 4월16일 만료다. 기존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기소 단계서 추가된 롯데와 SK 관련 뇌물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이었다.

불출석 행보
구치소 칩거

형사소송법 70조에 따르면 법원은 피고인이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상당(타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갈 우려가 있는 경우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당시 재판부도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구속영장 발부 사유를 설명했다.

앞서 검찰은 국정 농단 사건의 중대성과 재판의 신속한 심리를 위해 박 전 대통령의 구속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었다. 석방될 경우 건강 문제나 변론 준비 등을 이유로 재판에 나오지 않으면 파행 우려가 크다는 점도 들었다.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와 재판에 비협조적이었던 점, 향후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점이 추가 영장 발부의 주된 근거였었다.


변호인단은 박 전 대통령이 불구속 상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맞섰다. 롯데와 SK 관련 뇌물 혐의의 경우 사실상 심리가 마무리됐으며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으니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서라도 불구속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유영하 당시 변호사는 “형사소송법은 무죄 추정과 불구속을 대원칙으로 한다”며 “7개월 동안 구금된 상태서 주 4회 공판을 감내했는데 또다시 일부 공소사실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해달라는 검찰 주장은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증거 인멸의 우려에 대해선 “롯데·SK 관련 제3자 뇌물공여 혐의와 관련해 중요 증인이 이미 증언이 마무리한 상태”라며 검찰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1심 선고 공판을 최대한 늦춰 박 전 대통령을 우선 석방시키겠다는 변호인단의 전략이 실패한 셈이다. 앞서 법조계 안팎에서는 박 전 대통령 측의 ‘시간 끌기’ 전략으로 그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이는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남은 재판 일정에 비춰봤을 때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전략으로 점쳐졌다. 당시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 공판을 위해 10월10일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을 증인 소환키로 결정했다. 

재판부가 추가 영장을 발부하기 전 구속 만기일이 10월16일 밤 12시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빠듯한 일정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혐의가 방대하고, 증거의 가짓수도 많아 구속 만기일 직전 선고 공판이 열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설령 심리가 끝났다 하더라도 판결문 작성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였다.
 

이 때문에 검찰은 재판 과정서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 수사기관이 작성한 진술조서 중 상당수를 증거서 철회했다. 조서 대상자를 증인으로 불러 재판이 장기화되는 상황을 막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증인을 대거 신청하는 방식으로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등을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미르·K스포츠재단 지원과 관련해선 51명을 증인으로 신청한 상태였다.

방어권 행사 및 무죄 입증을 위해 증인신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당시 변호인단의 입장이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재판이 상당시간 지연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이러한 변호인단의 움직임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선 변호인단이 박 전 대통령의 구속 만기일을 노린다는 해석이 나왔었다. 박 전 대통령을 구속 상태서 풀려나게 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변호인단
석방 전략?

변호인단은 그간 꾸준히 불구속 재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재판 초기 재판부가 주 4회 공판 진행 방침을 밝히자 변호인단은 “일본 옴진리교 재판은 1심 선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반박했다. 

박 전 대통령을 ‘고령의 연약한 여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재판 과정서 수시로 박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변호인단의 수는 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직권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가 영장을 발부했다.

재판부가 추가 영장을 발부하기 전,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석방 후 플랜이 나돌았다. 원칙적으로 구속기간이 만료되면 피고인을 석방한 다음 나머지 재판을 불구속 상태서 진행해야 한다. 구치소를 나온 박 전 대통령이 신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재개할 것이란 설이었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재판부가 추가 영장을 발부하기 전인 지난해 10월 “박 전 대통령이 불구속 상태가 되면 자신의 세력을 모아 신당을 만들 것이란 설이 있다”며 “친박(친 박근혜)계 의원 몇몇을 모아 당을 만든다는 얘기다. 과거 친박연대처럼…”이라고 말했다.

금시초문이라는 기자에게 관계자는 “이 얘기 못 들어 보셨어요?”라며 신기한 듯 쳐다보기도 했다.

창당의 목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명예회복이라고 했다. 

그간 박 전 대통령은 재판 과정서 본인의 무고함을 주장해왔다. 박 전 대통령 입장서 자유의 신분이 되면 세력을 규합해 여론전을 펼치기 한결 수월해진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을 탄핵하고 옥중생활을 하게 만든 세력에게 반격을 가할 수도 있다.


재판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10월부터 국회 안팎서 돌아

억울하다는 박 전 대통령의 심경이 가장 잘 드러난 시점이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석방이 무산된 지난해 10월16일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열린 속행 공판서 “구속돼서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참한 시간들이었다”며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돌아왔고 이로 인해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 구속 기한이 끝나는 날이었으나 재판부는 검찰 요청을 받아들여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며 “다시 구속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란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고 실망감을 토로했다.
 

관계자의 말처럼 박 전 대통령은 친박연대를 통해 위기 상황서 돌파구를 찾은 전력이 있다. 지난 2006년 6월 한나라당 대표직서 물러난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서 이명박 당시 후보와 격돌했지만 패배했다.

박 전 대통령이 대권을 잡는 데 실패하자 친이(친 이명박)계는 친박계에 대한 ‘공천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반발한 친박계는 원외에서 친박연대를 조직, ‘박근혜 마케팅’을 통해 지역구 5석, 비례대표 8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친박 무소속 연대도 12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이들은 친박연대를 해체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해 세를 확장했다.

정치권서 박 전 대통령은 정치적 승부수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례로 지난 2004년 한나라당이 소위 ‘차떼기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천막당사를 열어 보수 지지층 결집에 성공한 바 있다. 

‘선거의 여왕’이란 타이틀은 이러한 박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을 대변하는 별명이었다.

“억울하다”
정계 복귀?

재판부가 영장을 발부키로 결정한 배경에도 창당설을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 발부 사유는 증거인멸 우려였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석방될 경우 공범 등 증인들과 접촉해 이들이 진술을 번복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다. 

기존 진술을 번복하거나 증언을 거부하는 것 역시 증거인멸에 해당한다.

또 박 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 갖고 있던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증거 인멸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고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면 증인들에게 부여되는 심적 부담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당시 변호인단은 박 전 대통령을 석방시키면 신속한 재판을 위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전략이 10월16일을 기점으로 급변한 점도 창당설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시간끌기 전략을 사용하던 기존 변호인단이 모두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틀 뒤인 10월18일 박 전 대통령의 해외법률컨설팅을 맡고 있는 MH그룹은 그가 ‘교도소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CNN>에 보도토록 했다. 이어 MH그룹은 박 전 대통령 인권침해 사태에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했다.

재판부 세력규합 우려해 추가 영장?
‘조기 출소 프로젝트’로 전략 변경?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해당 소식을 접한 후 자신의 SNS에 “박 전 대통령은 무죄판결을 받겠다는 목표를 포기한 것 같다. 대신 법정서 형이 확정되기 전, 조기 석방을 목표로 ‘조기 출소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 인권침해 여부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 노 원내대표는 “MH그룹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는 로드니 딕슨이다. 그가 속한 영국 로펌에 따르면 올해(2017년) 8월10일 박 전 대통령의 UN탄원을 목적으로 사건을 수임했다고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은 그때부터 이미 무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피해자, 피억압자, 중증환자 코스프레를 통해 국내외서 조기 석방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로 치밀한 준비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창당설에 대한 정치권의 시각은 다양하다. 

일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허무맹랑하다는 이도 존재한다. 여권 관계자는 “자존심이 강한 박 전 대통령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석방됐을 때 본인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무슨 수라도 썼을 것”이라며 “창당도 하나의 옵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야권 관계자는 “국회서 나도는 설이야 한두 가지겠느냐”며 “본인(박 전 대통령)도 여러 듣는 얘기가 있을 텐데 창당까지 고려했겠나. 그분(박 전 대통령)은 성격이 신중한 편이라 확신이 없으면 무리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가능성을 낮게 봤다.
 

법조계는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이번 달 마무리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공판 기일이 1월4일까지며 이후 한두 차례 공판이 더 열리겠지만, 1월10일이면 결심공판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사선 변호인들이 집단사퇴하면서 재판을 지연시키는 요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산술적으로 최순실씨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리는 1월26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도 함께 내려질 수 있다. 앞서 재판부는 최씨에 대한 결심공판서 오는 1월26일 최씨의 선고공판을 열겠다고 밝혔다.

석방→출소
계획 변경?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전 재판부가 상당 기간 고심하는 기간을 거칠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앞서 최씨의 결심공판서 재판부는 “6주 후인 2018년 1월26일 금요일에 오후 2시10분에 선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한다면 6주간의 시간을 가진 최씨의 선고처럼 박 전 대통령의 선고 역시 6주간의 시간을 두고 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선고는 오는 2월 중으로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만화책에 빠진 박근혜 심리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보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2월25일 JTBC <뉴스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최근 외부 접견을 끊은 채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와 최배달이 등장하는 <바람의 파이터> 등을 탐독하고 있다.

해당 책은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는 공통된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현재의 수감생활을 일종의 시련이자 성장통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발판으로 한층 성숙한 정치인으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해석한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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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