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특집] 총수들의 쓸쓸한 연말 스케치

실적에 웃고 사정에 울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다사다난했다. 재계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유쾌하지 못한 한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강도 높은 사정당국의 압박으로 총수들 역시 무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난히 쓸쓸한 연말이다.
 

삼성은 올해 사상 최대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위기로 읽히는 모습이다. 총수의 부재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몇 해째 와병 중이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10일 밤 심근경색을 일으킨 뒤 3년여간 계속 입원 치료를 받는 중이다.

아직도 빈자리
기약없는 복귀

현재 이 회장의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측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건강하다. 이따금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갈 만큼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다만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 회장도 연말을 편하게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룹 안팎의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주가로 반영됐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자료에 따르면 이달 12일 기준 현대차그룹주 11개 종목 시가총액 합계는 93조5388억원으로 2014년 말(114조4553억원)보다 16.08% 감소했다. 시총이 뒷걸음 친 것은 10대 그룹 가운데 현대차가 유일하다. 


시총감소 원인으로는 부진한 실적 전망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증권가는 올 한해 현대차의 실적이 부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에 따라 수출 환경 여건이 부정적으로 바뀐 것이 뼈아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마음 편히 한해를 마무리하기 어렵긴 매한가지다. SK그룹 역시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해있다. 우선 그룹내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SK케미칼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SK케미칼은 가습기 살균제인 ‘홈클리닉 가습기 메이트’의 주성분을 제조해 애경에 납품했다. 그동안 양사는 제품 라벨에 독성물질인 클로로메틸이소치아졸리논(CMIT)과 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공정위는 지난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지만 올해 재조사에 들어가 결국 고발에 이르게 됐다. 공정위는 최근 심사보고서를 해당 업체에 통보하고 이를 전원회의에 상정했다. 해당 사건을 재조사한 TF는 지난 19일 “(사업자가)안전 관련 정보를 표시하지 않은 건 부당한 광고”라고 지적했다. SK케미칼과 애경이 표시광고법을 위반했다는 지적이다.

SK건설은 이달 초 검찰로부터 본사 압수수색을 당했다. 검찰은 SK건설이 평택 주한미군기지 공사 입찰 과정서 수십억원의 돈을 미군기지 공사 관계자 등에게 건네 부당 이득을 챙겼다고 보고 있다. 

SK건설이 건넨 뇌물을 받고 일감을 준 미군 관계자는 본국으로 도주했다가 현지서 체포돼 미 연방 검찰에 기소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수사에
세무조사도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그룹이 사정 당국 칼날 위에 서면서 ‘좌불안석’인 모양새다. 타깃은 LG상사다.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 4대 그룹 가운데서는 처음이다. 

그동안 LG상사는 그룹내 승계 작업의 핵심 발판으로 평가됐는데 조사4국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국세청의 중수부라 불리는 조사4국은 통상 탈세 및 탈루 정황이 포착된 경우 투입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통상 정기 세무조사의 경우 4년마다 실시하는 것이 맞지만 조사4국이 투입되는 일은 없다”며 “그동안 의혹이 있었던 부분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 오너 일가가 24.7%의 지분을 쥐고 있는 LG상사는 그동안 일감 몰아주기로 논란이 된 바 있다. 또한 상사의 특성상 역외 거래가 많은데 부적절한 자금 흐름이 포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계에서는 문재인정부 출범 후 LG그룹이 4대 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사정당국의 칼날을 받은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각종 리스크에 따뜻한 연말을 기대하기 어렵다. 신 회장은 경영 비리 관련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해 올 한해 치열하게 법정 공방을 벌였다. 부진한 실적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이다. 

롯데그룹은 긴축 경영에 들어갔다. 잘나가던 롯데백화점이 임금을 동결했다. 2009년 이후 8년만이다. 롯데백화점은 3분기 매출액 1조9020억원, 영업이익 570억원으로, 각각 작년 동기 대비 3.6%, 8.6% 줄었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유통과 면세점 사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다른 계열사도 큰 폭의 임금 인상은 어려울 전망이다. 롯데칠성음료, 롯데푸드, 롯데제과 등 식품 계열사의 경우 평년 수준인 3% 내외 수준 인상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계열사 중 실적이 양호한 롯데케미칼은 이보다 더 높은 폭으로 인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오너 일가가 검찰로부터 기소를 받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편치 않은 연말을 보낼 것으로 관측된다. 
 

업계에 따르면 허태수 GS홈쇼핑 부회장이 홈쇼핑 채널 사업권 재승인을 청탁하면서 대가로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를 검찰로부터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불구속 기소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전해졌다.


허 부회장은 고(故) 허준구 전 LG건설 명예회장의 아들로 허 회장의 막냇동생이다. GS홈쇼핑은 2013년 전 전 수석이 회장·명예회장을 지낸 한국e스포츠협회에 1억5000만원을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각종 현안들에 피로감 극대
당국 칼날 위 아슬아슬 행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승계구도를 놓고 고심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세 아들의 승계에 대한 윤곽을 잡아왔다. 

재계에서는 태양광, 화학은 첫째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 금융은 둘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 건설은 셋째 김동선 한화건설 전 팀장에게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맡길 것으로 예상해왔다.

문제는 셋째 김 전 팀장이었다. 김 전 팀장은 두 차례 폭행사건을 일으키면서 자질 논란이 불거지는 모양새다. 연초에 폭행사건으로 한화건설을 떠난 뒤 1년이 못가 또다시 술자리서 폭행 시비가 불거졌다. 

1년에 두 차례나 자제력을 잃은 모습을 보이면서 승계 후보자의 자격에 적절성이라는 물음표가 찍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김 회장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는 분위기다.


노사 갈등
편법 승계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는 노사간 팽팽한 갈등을 올 한해 마무리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됨에 따라 해결 방안 모색에 골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현재 2016년도와 2017년도 임금과 단체협약 통합교섭을 두고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최근 권명호 울산 동구청장은 지난 20일 동구청 광장서 지역 전통시장 상인과 소상공인 등 60여명과 함께 현대중공업 노사의 연내 임단협 타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만큼 임단협에 가지는 지역사회의 관심이 높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뚜렷한 해결방안이 나온 것은 아니다. 최근 실무교섭과 본교섭을 번갈아가며 진행하면서 연내 임단협 마무리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양측 간 입장차가 워낙 커 해를 넘길 것이란 전망이 중론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사정 당국의 칼날 위에 있다. 경찰은 호텔 공사비 30억원을 자택 공사비로 유용한 혐의(특정경제범죄법위반 배임)로 조 회장과 배우자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따르면 조 회장과 이 이사장은 2013년 5월부터 2014년 1월까지 본인의 소유 평창동 자택 인테리어 공사비용 총 70억원 가운데 30억원을 비슷한 시기에 영종도 H2호텔(전 그랜드하얏트인천) 공사비용으로 떠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두 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할 만큼 강력한 수사 의지를 표명했지만 검찰이 반려하면서 불구속 상태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조 회장이 현재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향후 치열한 법리 다툼이 있을 전망이다.

조 회장의 제수인 최은영 전 한진해운(현 유스홀딩스)은 법정구속 상태다. 이달 8일 열린 1심 재판서 재판부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 전 회장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또 벌금 12억원과 추징금 5억300여만원을 선고했다. 최 전 회장은 한진해운이 자율협약 신청을 발표하기 전 미공개 정보를 알고 가지고 있던 주식을 매각해 약 10억원의 손실을 피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최 전 회장과 검찰은 법원이 선고한 양형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함에 따라 해를 넘겨 법정 다툼을 이어갈 전망이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사정 기관의 압박을 받고 있어 마음 편한 연말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회장은 현재 가족 명의의 회사를 통해 수십억원 대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국세청으로부터 고발당했다. 공정위도 친족회사 7곳을 대기업집단 소속 회사 현황 신고 때 누락한 정황을 포착해 검찰에 고발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역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공정위가 미래에셋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관련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어서다. 문제가 확대될 경우 지배구조 개편에 큰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미래에셋대우는 지난 7월 금융당국에 신청한 발행어음 사업 인가 심사가 보류됐다고 지난 15일 공시했다.

미래에셋대우는 “지난 7월 신청한 발행어음 사업 인가와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서면 자료 요청 등 조사 진행으로 인가 심사가 보류될 것이라고 금융당국으로부터 지난 14일 통보받았다”고 설명했다.

악화된 건강관리부터
해결 못한 문제들까지

자본시장법상 대주주를 상대로 형사소송 절차가 진행되고 있거나 금융위, 공정위, 국세청, 검찰청, 또는 금감원 등의 조사, 검사 등의 절차가 진행되는 경우에는 인허가를 보류한다. 금감원은 자산 운용사를 대상으로 한 통상적 검사 도중 미래에셋대우의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달 초 금융감독원서 미래에셋대우가 공정거래법 위반 징후가 있다며 통보해왔다”며 “관련 절차에 따라 해당 업체에 자료 요청을 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래에셋대우 지배구조 문제는 여러 차례 지적됐다. 특히 계열사들이 박현주 회장(48.63%)과 부인(10.24%) 등 박 회장 일가가 최대주주인 미래에셋컨설팅에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이 있었다. 

미래에셋대우는 이번 공정위 조사와 관련해 “현재 내부거래 관련 자료 제출을 준비 중”이라며 “공정위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도 올해 초, 조현준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겨줬지만 총수 시절 벌어진 일이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10월 탈세 혐의로 진행된 2심 재판이 재개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조 명예회장은 2003년부터 10여년간 8900억원대 분식회계를 통해 법인세 1237억원을 포탈하고 2007~2008년 효성 회계처리를 조작해 주주배당금 500억원을 불법으로 취득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서 법원은 조 명예회장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다만 조 명예회장이 고령에 과거 담낭암 판정을 받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점을 들어 법정 구속하지는 않았다.

2018년도…
강한 압박 예고

익명을 요구한 재계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재계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가 이어지고 있다”며 “지배구조 상단에 있는 기업 총수들의 피로감이 상당히 누적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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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