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서 돌아온 ‘임종석 음모론’ 셋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12.18 10:50:09
  • 호수 1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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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하지만…북 접촉설 모락모락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앞서 임 실장은 지난 9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동을 방문했다. 갑작스런 방문 소식은 수많은 추측으로 이어졌다. 청와대 2인자가 갑자기 중동으로 향한 이유를 두고 귀국 후에도 설왕설래가 계속되는 모습이다. <일요시사>는 임 실장을 둘러싼 대표적 음모론 세 가지를 알아봤다.
 

임 실장은 지난 9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아랍에미리트(UAE)와 레바논을 방문했다. 대통령 특사 자격이었다. 언론에 최초로 알려진 시점은 휴일이었던 지난 10일.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춘추관서 브리핑을 갖고 “임 실장은 해외 파견부대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9일부터 12일까지 2박4일 일정으로 UAE 연합군 아크부대와 레바논 동명부대를 차례로 방문 중”이라고 밝혔다.

나가고 발표
왜 그랬나?

이번 중동 방문을 두고 뒷말이 많은 이유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번 일처럼 청와대 고위급 인사가 출국한 후 방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박 대변인은 “임 실장의 특사 방문은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중동지역 평화 유지 활동 및 재외국민 보호활동을 현장서 점검하고 우리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했다”며 “장병 격려 외에도 10일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왕세제, 11일 미셸 아우 레바논 대통령을 접견하는 외교 일정도 수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임 실장은 UAE에 도착해 쉐이크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와 40여분간 접견했다. 레바논에선 대통령궁서 미셸 아운 대통령을 30여분간 만났다.


이 자리서 임 실장은 “양국 간 교류협력 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며 “내년 1월 부임하는 주한 레바논 대사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운 대통령에게 우리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임 실장은 앞서 문 대통령의 취임 축전을 전한 아운 대통령에게 감사 표시를 담은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청와대는 임 실장의 중동 방문의 목적이 해외 파견부대 장병 격려라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UAE에 아크부대를 파병해 군 교육훈련 지원 임무를 수행 중이며, 레바논에는 동명부대가 유엔평화유지활동을 하고 있다.

실제 임 실장은 레바논서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명부대를 방문, 파병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임 실장은 문 대통령이 전하는 장병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인사를 직접 전했다. 문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담긴 벽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자리서 임 실장은 “동명부대가 유엔평화유지군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듣는다”며 부대 활약상을 격려했다. 장병들에게 부대 노후시설 개선과 장병 복지시설 보강, 유엔 기준에 맞는 휴가제도 개선 등을 건의 받은 뒤 보완·검토를 약속했다.
 

그러나 장병을 격려하는 차원의 중동 방문이라는 청와대의 발표는 정치권 안팎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청와대 2인자가 단순히 장병 격려만을 위해 중동까지 갔을 리 만무하다는 반응이다. 

청와대는 확대해석을 차단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정치권이 말하는 것처럼 여러 정황상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국방장관 방문
한 달 만에…

그중 하나가 임 실장이 방문하기 약 한 달 전 송영무 국방부장관이 격려차 해당 부대를 방문했다는 점이다. 지난달 3∼5일 송 장관은 중동을 방문, UAE 아크부대 장병을 만나 식사를 하고, 같은 날 오만 청해부대에서 국방부장관 최초로 장병들과 함정에서 동숙했다. 

이어 5일에는 동명부대를 방문해 임무수행 현장을 점검했다. 이미 송 장관이 소화한 일정을 임 실장이 한 달 새 답습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송 장관 방문에 이어진 임 실장의 특사 파견 배경에 대해 “문 대통령이 지난 1일 공동경비구역(JSA) 장병 초청 오찬 때 ‘해외에 나가 고생하는 장병들이 눈에 밟힌다’고 했었다”며 “대통령이 직접 격려할 수 없어 빠른 시일 내에 대통령의 마음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해서 임 실장의 파견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자리의 상징성을 감안할 때 청와대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비서실장 특사 파견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방부장관과 같은 일정을 반복하기 위해 중동을 찾았을 가능성이 낮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특사 자격으로 해외를 방문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번 임 실장의 중동 방문은 노무현정부 초기인 지난 2003년 5월 문희상 당시 비서실장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 특사 파견 이후 14년 만이다.

이 때문에 무수한 설들이 양산되고 있다. 

첫 번째는 ‘세일즈 외교설’이다. UAE 방문이 원전 수출 및 중동과의 교역 확대를 위함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원전 수출이 현 정부로서 드러내놓고 추진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에 임 실장이 직접 UAE에 방문해 극비리 논의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특사 기간 중 UAE 원전 방문 계획 여부에 대해 “그런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치권도 가능성을 낮게 점친다. UAE 관계자들을 만나는 과정서 현안 중 하나로 원전 수출 문제가 언급됐을 수는 있지만, 원전이 양국 논의의 주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란 예상이다.

두 번째는 ‘MB정권 비리 관련설’이다. 앞서 MBC는 임 실장이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왕세제를 만난 것을 근거로 해당 가능성을 제기했다. 모하메드 왕세제는 지난 2009년 20조원 규모의 한국형 원전 수주를 계기로 이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워진 인물로 알려졌다. 

이에 이 전 대통령 비리를 본격 조사하기에 앞서 임 실장이 한국 정부의 입장을 UAE에 전달하기 위해 특사로 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즉 향후 외교적 마찰을 사전차단하기 위한 일정이 아니었느냐는 추측이다.

청와대는 해당 설에 대해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1일 청와대 관계자는 출입기자단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임 실장이 이전 정권 비리와 관련해 중동지역을 방문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해당 언론사에 정정 보도를 요청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청와대의 유감 표명으로 이어졌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나서 “일부 방송사의 확인되지 않은 과감한 보도에 유감을 표시한다”며 “확인 절차 제대로 해주시길 당부드린다”고 강한 톤으로 부인했다.

출국 후 청와대 발표…도대체 왜?
단순 “장병 격려 위해” 사실일까?

세 번째는 ‘북한 접촉설’이다. 고조되고 있는 대북 긴장과 맞물려 임 실장이 문 대통령으로부터 모종의 특명을 받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해당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임 실장이 방문한 UAE·레바논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분위기 속에서도 북한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실제 해당 국가들은 최근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는가 하면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임 실장이 북한 고위관계자를 만나 한‧중 정상회담서 다룰 북핵·미사일 관련 이슈를 조율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역대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최측근이 북한 고위 관계자를 제3국서 만나는 일이 종종 있어왔다. MB정부 임태희 당시 노동부장관은 지난 2009년 10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싱가폴을 방문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남북 정상회담 관련 비밀접촉을 벌인 바 있다. 


임 장관은 이듬해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도 과거 대북 소통을 총괄했었다. 선례에 비춰보면 북한 접촉설이 아주 허황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해당 설에 대해서도 ‘선긋기’에 나섰다. 

청와대 측은 “그런 계획(임 실장의 북한 인사 접촉)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북한과 접촉하면서 일정을 언론에 공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논란은 여전하다.

임 실장 또한 출국 전 “다른 문제는 몰라도 대북 접촉 같은 것은 내가 하지 않겠다”며 “북한 문제와 관련해 내게 편견이 있기 때문에 대북 접촉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임 실장이 말한 편견은 본인이 과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임 실장은 지난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을 주도해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임 실장 본인이 만약 대북 문제 전면에 나설 경우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불편한 북
민감한 청

그러나 해당 설은 임 실장이 귀국하고 하루가 지나 문 대통령이 방중 일정에 돌입하면서 크게 확산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13일 서울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중국 베이징으로 출국했다. 공항에는 임 실장, 한병도 정무수석, 박수현 대변인 등이 나와 배웅했다.

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취임 후 처음이다. 한·중 수교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취임 7개월 만에 방중이 성사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국빈자격으로 베이징·충칭에 이르는 3박4일 중국 방문일정을 소화했다. 

중국 방문 이틀째인 14일은 이번 순방의 하이라이트인 시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들 세 가지 설 외에도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방선거 출마설’이다. 내년 6·13 지방선거에 앞서 임 실장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부 차원서 포석 놓았다는 추측이다. 

임 실장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현재 서울시장 또는 전남도지사 차출설에 휩싸여 있다. 문재인정부가 이런 임 실장을 외교 전면에 내세워 유력 후보로 키우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당 내 서울시장 출마를 저울질 중인 인사들 사이에서 해당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역대 정권 비밀리 북 만나
귀국 후 문 시진핑 만나러

역대 정부를 막론하고 특사는 중진급 인사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번 정부도 지난 5월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미국)을 시작으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중국), 문희상(일본), 송영길(러시사) 의원 등을 특사로 파견했다. 임 실장의 선수·경력이 앞선 특사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에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또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 부대를 깜짝 방문했던 효과를 현 정부서 노렸던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임 실장은 중동과 인연이 있다. 17대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노무현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며 12일간 단식농성을 펼친 바 있다. 그는 농성 당시 “정부가 끝내 대규모 전투병 파병을 결정하고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며 당시 정부·여당의 결정을 완강히 반대했다.
 

이 같은 이력이 있기 때문에 임 실장이 적임자로 지목됐을 것이란 해석이다. 청와대가 밝힌 것처럼 해외 파견부대 장병 격려가 주 목적이라면, 특사 활동을 통해 파병 반대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됐을 것이란 의미다.

임 실장이 실제 중동서 어떤 일정을 보냈고 귀국해 문 대통령에게 어떤 보고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임 실장의 정확한 동선이나 주요 인사와의 만남 내용 등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문 중국행
바통터치?

청와대는 이런저런 설에 대한 선긋기에 여념이 없지만 특사 소식을 뒤늦게 밝힌 것이 결국 문제를 키웠다고 볼 수 있다. 임 실장의 행보를 둘러싸고 의혹이 확대·재생산 됨에 따라 빠른 시일 내 임 실장이 언론 등에 자신의 행적을 직접 설명하는 자리를 가질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중국 의전’ 결례 논란

중국이 국빈 자격으로 초청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외교적 결례를 보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일례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문 대통령이 중국으로 온 당일 다른 일정을 소화했다. 문 대통령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시 주석은 베이징이 아닌 난징으로 향한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나라의 대표인 시 주석이 안방을 비운 셈이다.

이는 다른 사례와 극명히 대비된다. 지난달 7∼8일 한국을 국빈 방문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출국을 할 때 동남아시아 순방을 떠나는 문 대통령이 탄 ‘공군 1호기’가 트럼프 대통령이 탄 ‘에어포스원’의 이륙을 확인한 뒤 출국한 바 있다.

약속이 변경되는 사태도 있었다. 

중국 경제의 사령탑이자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와의 만남이 당초 추진했던 오찬 형식이 아닌 늦은 오후의 면담 형식으로 변경됐다. 또 지난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23년 만에 이뤄진 한국 대통령의 첫 방중임에도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않고 공동 언론발표조차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 체계 배치 문제에 아직도 앙금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 관영 매체인 CC-TV가 내보낸 문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앵커는 사드 관련 질문에 집중했고 “중국어에는 언필신 행필과(言必信 行必果·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며 카메라 앞에서 ‘3불(三不)’ 관련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3불이란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참여하지 않고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으며 ▲한·미·일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란 내용으로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갈등을 푸는 과정서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제시한 원칙이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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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