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승부사’ 김기태 기아 타이거즈 감독

‘V11’ 호남은 지금 축제 중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달 30일, 2017 KBO리그 한국시리즈 5차전. 기아 타이거즈는 우승까지 1승만 남겨놓은 상황. 이범호의 만루포로 앞서 나가던 기아는 두산 베어스의 거센 공격에 9회말 7 대 6까지 몰렸다. 그러자 김기태 기아 감독은 승부수를 띄웠다. 6차전 선발로 예정돼있던 에이스 양현종을 마운드에 올린 것. 팬조차 반신반의했던 카드는 기아의 11번째 우승으로 되돌아왔다.
 

6회까지는 기아 타이거즈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됐다. 한국시리즈에 올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을 거머쥔 ‘코시 불패’의 기아로선 기록을 이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3회초 타자 이범호가 두산 베어스의 투수 니퍼트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치면서 대거 5점을 뽑아냈을 땐 KBO리그 2017 시즌이 싱겁게 마무리됐다는 성급한 결론도 나왔다. 시리즈 전적 3 대 1, 6회 말까지 7점차, 이대로 가면 가을야구는 기아의 최종 승리로 끝날 참이었다.

9회 승부수
5차전서 끝

극장은 7회에 열렸다. NC 다이노스와의 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서 10점 이상을 올리며 폭발적인 타선 응집력을 발휘했던 두산의 반격이었다. 두산은 7회 말에만 6점을 뽑아 기아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잠실구장에 모인 팬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시리즈 전적서 기아가 여유롭게 앞선 상황이었지만 기세 싸움인 단기전서 역전패는 치명적이었다.

그때 기아 불펜서 투수 양현종이 몸을 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양현종은 지난달 26일 2차전서 두산 타선을 9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좌완 투수 사상 두 번째로 한국시리즈 완봉승을 거둔 기아의 에이스다. 


그가 불펜서 몸을 푸는 모습이 실제 중계에 잡히자 야구 관련 커뮤니티는 물론 포털 사이트 중계로 경기를 보고 있던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6차전 선발로 예정돼있던 양현종을 5차전서 당겨 썼다가 패하면 분위기 자체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기태 기아 감독은 양현종을 마운드에 올렸다. 시리즈를 5차전서 끝내겠다는 의지의 승부수였다. 

실패하면 엉켜버린 투수 운용 문제로 두산에 우승을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태였다.

양현종이 1사 만루에 몰리면서 김 감독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기아는 적시타 하나로 끝내기를 당할 위기였다. 하지만 양현종이 두산의 타자 김재호를 플라이 아웃으로 잡아내면서 5차전은 기아의 승리로 끝났다. 

기아의 11번째 우승이자 8년 만에 통합 우승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누던 김 감독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담긴 기쁨의 눈물이었다.
김 감독은 우승 직후 기자회견서 “너무 좋다. 우리 선수들, 두산 선수들 추운 날씨에 열심히 했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고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기자가 ‘경기 중 아찔했던 순간’에 대해 묻자 “좋은 날에는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그 선수의 가족들이 보고 있지 않나. 오늘 같은 날은 잘했던 선수들이 부각됐으면 한다”고 공을 돌렸다. 이어 “모든 선수를 칭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이 팀을 맡은 지 3년 만에 우승을 이룬 것은 물론 두산의 한국시리즈 3연패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김기태 리더십’이 주목받고 있다. 그의 리더십을 소개할 땐 형님, 큰형님, 동행, 지게 등의 단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감독으로서 구단을 이끌기보다는 ‘선수들과 함께 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선수, 코치…우승과 인연 멀어
프로 발들인지 27년 만에 영광

김 감독은 2014년 11월 기아 감독으로 부임할 때부터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했다. FA(자유계약 선수)와 트레이드를 통해 수혈한 선수들, 기존 기아 선수들, 신인 선수들로 조합된 팀을 하나로 묶는 게 시급했다. 

김 감독은 ‘동행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선수들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소통을 통해 팀 전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성적 향상을 꾀한 것이다.

감독이 나서서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서로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베테랑들을 대우해주면서 그들이 팀을 이끌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 감독의 리더십은 미디어를 대할 때 특히 두드러졌다. 선수들의 장점은 얘기하되 단점은 말하지 않았다. 특정 선수가 실책을 저질러도 질책보다는 칭찬을 우선시했다. 기아 선수들은 김 감독의 비호 아래 자신 있게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다.

2017 시즌 전 기아로 이적한 타자 최형우는 “프로야구 지도자 가운데 ‘형님 리더십’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감독님은 많다”며 “그런데 선수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분은 우리 감독님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한국시리즈서 기아와 맞붙은 김태형 두산 감독도 “김기태 감독은 친화력이 좋다. 내가 못 가진 친형과 같은 리더십이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선수를 믿고 맡기는 김 감독의 스타일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냈다. 경기 중 부진했던 선수들도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서고 마운드에 올랐다. 팀의 승리와 패배에 일희일비하는 팬들조차 김 감독의 방식에는 토를 달지 않을 정도. 

대를 이어 기아를 응원 중인 광주의 김은지(29)씨는 “나를 포함해 많은 팬들이 감독님의 장점으로 ‘사람이 좋다’를 꼽을 것”이라며 “가끔 사람이 너무 좋아 속이 터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감독님의 리더십 덕분에 11번째 우승을 이뤄냈다”며 기뻐했다.

통합우승 비결
큰형님 리더십

김 감독의 리더십은 곧장 성적으로 나타났다. 김 감독 부임 전 2년 연속 9위에 그쳤던 기아는 2015년 7위로 시리즈를 마감하며 가능성을 드러냈다. 순위는 7위였지만 마지막까지 포스트시즌 진출 다툼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정규시즌 5위를 기록,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올랐다. 1승1패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저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는 최형우를 영입하며 단숨에 우승 후보로 지목됐다. 그리고 김 감독 부임 3년째 기아는 왕좌에 올랐다. 


2009년 이후 8년 만에 정규시즌에 이은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통합 우승이었다.

김 감독에게 이번 우승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선수 시절을 포함 27년간 프로야구 판에 있으면서 처음 얻은 우승 반지기 때문이다. 1982년 6개 구단으로 시작한 프로야구 리그는 2015년 10개 구단 체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감독들이 각 구단을 거쳤다.

이들 중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가장 높은 고지에 올라봤던 감독은 35년 프로야구 리그 역사상 13명에 불과하다. 혼자서 무려 10번의 우승을 이끈 김응용 감독을 포함, 김재박·류중일 감독(4회), 김성근 감독(3회) 등 일부 감독들이 우승을 독식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름을 새기기 힘든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명단에 김 감독의 이름이 추가됐다. 김 감독은 기아의 연고지인 광주서 태어나고 자라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해태나 기아에선 한 번도 선수나 코치 생활을 한 적이 없다. 이번 우승이 김 감독에게 값진 이유다.

현역 시절 레전드
좌타 거포로 명성

김 감독은 현역 시절 남부럽지 않는 선수 생활을 보냈다. 팬들 사이서 ‘레전드’라고 회자될 정도의 활약이다. 올해로 48세인 그는 광주서림초-충장중-광주제일고를 거쳐 인하대를 졸업한 후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신생팀 특별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데뷔 첫 해부터 홈런 27개를 쳐내 장종훈에 이어 홈런 2위에 오르며 좌타 거포의 등장을 알렸다. 다음해인 1992년엔 출루율 1위로 첫 개인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4년에는 홈런 25개로 홈런왕에 올랐다. 현재 상황과 비교했을 때 홈런 25개는 홈런왕을 차지하기에 적은 수치였지만 당시 김 감독의 신분은 방위병이었다.

김 감독은 방위병 신분으로 원정 경기에 제약을 받아 126경기 체제였던 리그서 18경기를 결장한 108경기만 뛰고도 홈런왕을 따냈다. 1997년에는 타율 0.344로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쌍방울서 활약하던 8년간 무려 6번의 개인 타이틀을 따내며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부침이 시작된 건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이었다.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쌍방울은 핵심 선수들을 팔아야 했다. 이 과정서 김 감독 역시 1998 시즌이 끝난 후 팀 동료와 함께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삼성서도 2년 동안 홈런 54개를 때려내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2011년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출장 수가 44경기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현금 11억원이 포함된 6대 2 대규모 트레이드를 통해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겼다.

신생팀이었던 SK는 거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 감독은 고참으로서 2003년 팀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2005년 SK서 은퇴할 때까지 15시즌 통산 1544경기에 출전, 타율 2할9푼4리, 1465안타, 249홈런, 923타점의 기록이 그의 찬란했던 선수 생활을 방증한다. 또 홈런왕, 타격왕, 4차례의 골든글러브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1년 프로야구 리그 출범 30주년에는 투수 선동열, 포수 이만수 등과 함께 올스타 10인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김인식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감독은 지난 2월 일본의 훈련장을 찾은 김 감독에게 “확실한 좌타 강타자가 없는 대표팀 상황에 김기태가 있었으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김 감독은 뛰어난 개인 성적은 물론 현역 시절 거쳐 갔던 모든 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이미 리더십으론 정평이 나 있었다. 은퇴 후에는 SK서 1군 타격보조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 일본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서 육성코치와 2군 타격코치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LG감독 시절 성적 부진으로 나락
기아 부임 3년 만에 ‘특급사령탑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대표팀 타격코치로 한국의 퍼펙트 우승에 기여했다. 베이징 올림픽서의 금메달이 이번 우승 전까지 김 감독이 경험한 사실상 유일한 우승 경력이었다. 2010년에는 국내로 복귀, LG 트윈스의 2군 감독과 수석코치를 역임했다. 그러다 2012년 LG의 사령탑에 오르면서 감독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LG서의 감독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런(Run)기태(도망가는 기태)’ ‘포기가 빠른 남자’ 등의 오명을 얻었던 것도 이 시기다. 김 감독이 팀을 맡을 무렵 LG의 전력은 누수가 상당한 상태였다. 

FA 자격을 얻은 이택근, 조인성 등 주전 선수들이 모두 이적을 택했고, 투수 2명이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구제명당했다. 전력 보강이 필요한 시기에 전력 약화 상태로 시즌을 맞이한 LG는 그해 8개 구단 중 7위에 머물렀다.

김 감독이 부임하고도 가을야구에 실패하자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부임 다음해 LG는 정규시즌서 2위를 차지하며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LG 감독 시절에도 특유의 형님 리더십과 코팅 스태프와의 철저한 분업화는 야구판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감독의 지휘 아래 성적이 향상된 LG의 2014년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2014년 4월23일 김 감독은 삼성과의 시즌 2차전이 열린 대구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독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다. 

이날 LG 측은 “김기태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감독이 사의를 표명할 당시 LG는 시즌 개막 후 18경기에서 4승1무13패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었다. 선수단은 삭발식을 갖고 투혼을 불살랐지만 경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퇴 소식에 팬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팀의 성적 부진을 책임졌다고는 하나 아직 많은 경기가 남은 상황서 일찌감치 포기한 게 아니냐는 원성이 뒤따랐다.

이런 상황서 김 감독과 기아의 만남이 이뤄졌다. 기아는 당시 선동렬 감독을 선임했다가 팬들의 반발에 부딪혀 방향을 선회한 상태였다. 선 감독은 팬들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스스로 감독직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계약까지 마친 감독이 전격적으로 사퇴하자 입장이 난감해진 기아가 선택한 게 김 감독. 김 감독은 기아의 요청에 오랜 고민 없이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계약기간 3년에 계약금 2억5000만원, 연봉 2억5000만원으로 총 10억원의 계약조건이었다.

LG서 자진사퇴
기아선 우승감독

기아에 부임할 무렵 김 감독의 어깨엔 ‘명가 재건’이라는 팀의 목표와 명예회복이라는 개인의 목표가 얹힌 상태였다. 2014년 김 감독이 기아 유니폼을 입을 무렵 “팬들에게 박수 받는 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 이후 3년 만에 김 감독은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김 감독과 기아는 앞으로 3년 더 함께 동행한다. 그는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하게 강한 팀으로 자리 잡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김 감독의 마음은 벌써부터 2018 시즌을 향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2018시즌 10개 구단 감독은?' 사령탑은 정해졌다

KBO리그 2017 시즌이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10개 구단은 5개월여의 담금질을 거쳐 2018 시즌을 준비한다. 2017 시즌이 끝난 지 1주일 남짓이지만 10개 구단의 다음 시즌 감독은 모두 정해진 상태. 경기만 없을 뿐 2018 시즌이 시작됐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8년 만에 통합 우승으로 V11을 달성한 기아는 김기태 감독과 재계약했다. 계약 조건은 기간 3년에 계약금 5억원, 연봉 5억원 등 총액 20억원의 초특급 대우다. 김 감독의 몸값은 3년 전 기아로 올 때와 비교해 두 배나 뛰었다.

류중일·김기태 최고 대우 1·2위

삼성 라이온즈서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긴 류중일 감독은 3년 계약에 총액 21억원으로 KBO리그 최고 대우를 받았다. 한용덕 전 두산 수석 코치는 한화 이글스의 새 사령탑을 맡았다. 한화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승부욕과 포용력이 있어 내년 시즌이 기대된다는 평가다.

조원우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올해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하며 2012년 이후 5년 만에 가을 야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 외 김태형 두산 베어스 감독, 김경문 NC 다이노스 감독, 트레이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장정석 넥센 히어로즈 감독, 김한수 삼성 감독, 김진욱 kt 위즈 감독은 계약기간이 남아 2018년에도 팀을 이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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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