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린 권오현시대> 왕년의 삼성 2인자들 ‘어디서 뭐하나’

야인으로 돌아가 안락한 노후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용퇴를 결심했다. 국내 대표기업 삼성의 2인자로 평가 받는 그의 결심에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의 눈길이 쏠렸다. 이제 야인으로 돌아간 권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도 시선이 모아지는 가운데 역대 삼성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삼성전자는 지난 13일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용퇴 소식을 전했다. 사측에 따르면 권 부회장은 반도체사업을 총괄하는 부품부문 사업책임자서 자진 사퇴함과 동시에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 의장직도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 수행하고 연임하지 않기로 했다.

이학수는 지금…
수천억 임대사업

권 부회장은 “사퇴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할 때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사실상 삼성의 2인자로 평가받는 그의 퇴진 소식에 역대 삼성을 1등 기업으로 이끌던 주역들의 근황에도 눈길이 쏠렸다.

그 가운데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단연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전문경영인이다. 이 전 고문은 이건희 회장 시대서 활약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회사 2인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인 그는 그룹내 재무 부문의 실력가였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소병해 실장의 후임으로 1990년 초부터 20여년동안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이후 구조조정본부장과 전략기획실장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이 회장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 전 고문의 인맥은 화려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고, 이명박 대통령과는 고려대 동문이라는 인연이 있다. 

이 전 고문은 이 회장이 2008년 경영 일선서 물러났을 때 함께 물러났다가 2010년 삼성물산의 고문으로 복귀, 이듬해 12월 삼성을 완전히 떠났다.

현재 그는 뚜렷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전 고문은 부인 자녀 등과 ‘엘앤비인베스트먼트’라는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엘앤비인베스트먼트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엘앤비타워’를 소유하고 임대사업을 벌이고 있다. 

엘앤비타워의 가치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06년 토지를 매입해 빌딩을 올려 안정적인 경제력을 확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최고 기업의 2인자라고까지 평가받는 그는 현재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권오현 부회장 퇴진…바통은 누가?
조용한 분위기 속 내부 실세들 꿈틀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의 신임 아래 이 전 고문과 쌍벽을 이루는 행보를 보였다. 윤 전 부회장의 이력은 독특하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인 그는 이병철 창업주 시절 1966년 삼성전자(당시 )에 입사한 공학도 출신이다. 그를 적극적으로 중용한 것은 이 회장의 안목이었다.


재계에선 삼성 이 회장 아래 삼성내 이학수 사단과 윤종용 사단이 나눠져 있다는 말이 나왔다. 윤 전 부회장은 지난 2006년 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료 산출을 위해 집계한 표준 보수를 기준으로 21억1000만원으로 이 회장(10억원)보다 많은 보수를 챙겨 그룹 내 그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윤 전 부회장 역시 이 회장이 물러났었던 2008년 삼성전자 부회장직서 물러나 삼성전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1년을 끝으로 삼성전자를 떠났다. 다만 이 전 부회장에 비해서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부터 맡고 있는 있는 수원삼성 블루윙즈 프로축구단 구단주로 삼성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 IEEE 명예회원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는 새만금개발사업 명예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삼성그룹서의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현 KT 대표이사)도 삼성서 알아주는 전문경영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출신인 황 전 사장은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이사로 삼성맨이 됐다. 2009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황 전 사장의 행보는 반도체의 역사였다. 

CEO 출신들
활발한 행보

반도체 메모리 용량을 1년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은 반도체 업계에 아직도 통용된다. 이는 18개월에 2배씩 증가시킨다는 인텔 공동창업주 고든 무어의 법칙보다도 빨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론은 황 전 사장이 실증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1999년에 256M 낸드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고, 2000년 512M, 2001년 1G, 2002년 2G, 2003년 4G, 2004년 8G, 2005년 16G, 2006년 32G, 2007년 64G 제품을 개발한 것. 이 같은 ‘황의 법칙’을 등에 업고 삼성은 반도체 부문 세계 1위에 안착했다.

황 전 사장은 8년전 삼성전자를 나온 뒤에 경영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공학한림원 이사, 지식경제부 최고기술경영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단장 등을 거친 뒤 2014년 KT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아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그는 공기업 성향이 강했던 KT에 삼성의 정신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경영효율화를 극대화하며 흑자경영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애니콜 신화’ 이기태 전 부회장도 삼성의 역사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전 부회장은 불도저식 인재다. 그는 삼성 역대 부회장 가운데 가장 많은 사표를 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평사원 시절부터 부당한 지시에 사표로 맞섰던 것이다. 1985년 비디오사업부장 때 사표를 내고 강원도로 20여일간 잠적했던 일화는 업계서도 아주 유명하다.


그런 그가 삼성전자의 얼굴이 된 것은 실력이었다. 1991년 이사보가 된 이후 1994년 무선사업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전 부회장 시대가 열렸다. 당시만 해도 삼성의 휴대폰 시장서의 인지도는 시장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무선사업부는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역대 회장 그림자 근황 눈길
퇴임 후 생활 모습 각양각색

하지만 이 전 부회장 특유의 불도저 스타일에는 제격이었다. 1995년 무선전화기의 품질 이상 보고를 받고 모든 제품을 수거해 불태우고 휴대폰 브랜드 애니콜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시절 품질을 의심하는 바이어 앞에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제품 내구성을 강조한 일화는 아직도 업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그 결과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수출 초기인 1998년 4억달러서 2011년 30억달러까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 2위 자리까지 올랐다. 현재 삼성이 휴대폰 및 스마트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게 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 그도 황 전 사장과 같은 해인 2008년 회사를 떠났다. 그는 경영서 물러난 뒤 2012년까지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후 KJ프리텍 사내이사, 동양네트웍스 기타비상무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 언론의 노출을 꺼렸던 최도석 전 삼성카드 부회장 역시 삼성그룹 내 실세로 분류된다. 재무통인 최 전 부회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보조를 맞추면서 회사내 입지를 다졌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그는 제일모직 경리과를 시작으로 삼성전자 경리 부장, 삼성전자 관리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재경팀장 상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전무이사,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담당 사장 등 주요직을 거치면서 실세란 평가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최 전 부회장은 2009년부터 삼성카드로 자리를 옮겨 2010년 12월 삼성카드 부회장을 끝으로 퇴진했다.

현재 그는 현역시절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행보를 보내고 있다. 이따금 대학 강연서 자신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며 제2의 인생을 보내고 있다.

김순택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도 삼성내 2인자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김 전 부회장은 1972년 입사해 78년부터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서 20년간 일했다. 이 회장을 지근거리서 보필했던 그는 이 회장의 경영철학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7년부터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분 대표이사 부사장, 삼성SDI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2011∼2012년 6월까지 미래전략실장 직을 끝으로 삼성을 떠났다. 삼성을 떠난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비서실 출신이다 보니 대내외 활동을 의도적으로 삼가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반면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은 현재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황 전 사장은 과거 삼성그룹서 실력자로 통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방미 당시 이건희 코리아소사이어티 연설 통역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황 전 사장을 삼성그룹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꼽히고 있었다. 

경험 살려 자문
대학서 후진 양성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 팀장,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인사팀 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 실장 등 핵심 부서를 거친 그였기에 이 같은 평가가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중론. 그는 2001년 6월 삼성증권 대표이사를 끝으로 홀연히 삼성을 떠났다. 

그는 퇴직 후 2004년 우리은행 은행장, 2007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2008∼2009년 KB금융지주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5년부터는 제3대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 역시 삼성그룹을 성장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경영 일선에 물러나 있지만 고문으로 삼성그룹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

이 고문은 해외파가 즐비한 삼성전자서 토종파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고문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해 1968년 삼성전관에 입사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이 고문은 1974년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인수한 한국반도체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고문은 1985년 기흥공장 건설 초기부터 관여했다. 인재를 영입하는 데도 이 고문의 역할이 컸다. 반도체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운 당시 권오현 부회장, 조수인 사장, 전동수 사장 등을 직접 영입했다. 

그는 2008년 삼성특검 직후 삼성이 계열사 사장단 협의체를 구성 그룹 의사 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이 고문이 중심이 돼 주요 사안을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창업주 세대인 강진구 전 삼성전자·삼성전기 회장이 지난 8월 별세했다. 삼성의 역사이자 반도체의 대부로 평가받는 강 전 회장은 1927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대구사범학교와 서울대 공대 전자과를 졸업했다. 
 

강 전 회장이 사회생활 첫발무터 삼성그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육군 대위 복무를 마치고 KBS와 미8군 방송국,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에 비로소 삼성맨이 됐다.

당시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합류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지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 전 회장의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이라는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 회장은 동양방송 평이사였던 그와 점심식사도 함께 하고 위성 중계되는 권투경기를 시청하기도 했다.  

강 전 회장은 회고록에 “흔이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막연히 ‘회장님께서 나를 눈여겨 보시나보다’ 정도로 생각했지 삼성전자를 맡기실 줄은 몰랐다”고 기술했다.

그는 선대 회장이 1973년 삼성전자 대표이사로 임명하자 1969년 창립 이후 5년간 적자이던 회사를 단번에 흑자로 전환시켰을 정도로 경영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선대 회장의 신뢰 속에 강 전 회장은 삼성전자 상무·전무·사장을 거쳐 삼성전자부품·삼성정밀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삼성의료원 강북병원재단 이사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00년 12월31일 건강문제와 후진양성을 이유로 삼성전기 회장직서 사임, 37년간 몸담았던 삼성을 떠났다. 

실제 강 전 회장은 후진양성에 힘썼다. 

강 전 회장은 발명특허협회 부회장, 한국전자통신 사장, 한국전기·전지시험검사소 이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평통 자문위원, 전자공업진흥회 회장, 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한·벨기에경제협력위원장, 한·헝가리경제협력위원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고문,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한국엔지니어클럽 회장, 표준과학연구소 이사장, 중동학원 이사장,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내며 대내외에서 두루 인정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포함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쏟아지는 러브콜
스카우트 1순위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임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성그룹내 실세들이 2008년을 기점으로 경영 일선서 물러난 경우가 많다”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인사가 있는 반면 언론서 자취를 감춘 실세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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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폴 적색수배’
황하나 근황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마약 투약 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를 받은 황하나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해 1월31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황씨를 형사 입건했다. 앞서 황씨는 2023년 9월, 영화배우 고 이선균을 협박한 유흥업소 실장 김모씨 등과 함께 내사를 받아왔다. 지난해 2월 과천경찰서는 황하나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간이시약 검사 등을 통해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했다. 수사를 받던 황씨는 돌연 태국으로 출국했다. 실제로 황씨는 지난해 3월 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마약과 성매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추가 혐의가 드러나자 태국에 있는 황씨를 검거하기 위해 인터폴 적색수배와 현지 영사 조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폴 적색수배 중인 황씨는 지난 1년 사이 캄보디아로 이동했다. 유튜브 채널 ‘크라임넷’을 운영하는 제보자 A씨에 따르면 현재 프놈펜 소재 한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한국인 남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태국으로 도주한 황씨는 자동차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는 현지인 N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N씨는 태국 상류층을 뜻하는 ‘하이소(High-Society)’로 분류되는 유명인사다. 황씨의 지인이자 한국에서 모델 활동을 했던 여성 Y씨는 “(자신과 함께) N씨가 클럽, 유흥업소 등에서 황씨와 파티를 즐겼다”고 알려왔다. 태국에서 상위 10% 미만에 속하는 재벌인 하이소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파티를 즐길 뿐더러, 전관예우 등에 따라 현지 경찰의 수사가 어려운 대상이다. 황씨가 N씨의 비호를 받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왔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Y씨를 비롯한 다수의 제보자는 황씨가 태국, 캄보디아 등을 오가며 성매매, 마약 유통 등에 가담했다고 전했다. 황씨는 한국에 있던 Y씨 등을 불러 현지 남성과의 성매매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 황씨는 과거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에이미(이윤지) 등 유명인들과 어울리며 여유로운 삶을 이어갔다. 현지 정보망에 따르면 황씨는 하이소들과 함께 했기에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하이소의 권력이 얼만큼인지 나타내는 실제 사례도 있다. 스포츠음료 ‘레드불’ 공동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의 뺑소니 사망사건이다. 오라윳은 2012년 9월 방콕 시내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하고 있던 경찰관을 치어 숨지게 한 후 도망쳤다. 그러나 경찰은 사고 후 스트레스로 술을 마셨다는 오라윳 측 주장을 인정하고 음주 운전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오라윳은 불기소됐고, 이후 마약 복용에 따른 처벌도 면했다. 경찰 추적 중에도 호화 생활 동남아 오가며 ‘환락 파티’ 2022년 현지 언론에 따르면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마약법 개정으로 만료됐다고 현지 검찰총장실 대변인이 밝혔다. 1979년 제정된 마약법을 보면 코카인 불법 복용자는 6개월~3년 징역에 처하고 공소시효는 10년이다. 오라윳의 공소시효는 그해 9월3일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12월 발효된 새로운 마약법에 따르면, 코카인 복용은 징역 1년에 공소시효는 5년이다. 이에 따라 오라윳의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는 자동 기각됐다는 것이다. 오라윳은 이를 틈타 해외로 도주했다. 불기소 결정 뒤 반정부 집회가 열릴 만큼 반발은 심했다. 결국 총리 지시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검찰과 경찰의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는 정황도 포착했다. 검·경은 뒤늦게 부주의한 운전에 의한 과실치사에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도 추가했다. 하지만 오라윳의 행방은 묘연하다. 검찰은 경찰이 오라윳을 체포해 데려오기 전까지는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할 수 없다고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현재 오라윳에게 남은 혐의는 과실치사뿐이며 공소시효는 2027년 9월3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를 종합하면, 황씨는 동남아로 도주하기 전 마약을 투약한 것과 더불어 지인에게 마약을 권하기도 했다. 황씨의 지인 J씨는 취재진과 전화 통화에서 “황하나가 나에게 좋은 거 있는데 해볼래?”라며 팔에 주사로 된 약물을 주입했다. 그는 “좋은 거라길래 설마 했는데, 속이 울렁거리면서 구토를 하게 됐다”며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에 주사기들이 놓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J씨는 “마약을 투약한 것 같다”고 경찰에 자수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이어 황씨는 지난해 3월19일 취재진과 통화에서 “술은 왜 마셔요? 마약이 더 좋은데”라며 “왜 기자들은 내 기사만 쓰는지 모르겠다. 다른 약쟁이들도 많은데, 좀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황씨의 아버지 황재필씨는 “딸이 적색수배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카카오 메시지를 읽었지만, 묵묵부답이다. 태국 재벌 ‘하이소’ 조력 “나 잡아봐라” 수사망 피해 한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로 전환된 황하나에 대해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고 말했다. 적색수배가 내려진 황씨가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앞으로 1년 이상 태국에 재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이자, 동방신기 출신 박유천의 전 약혼녀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은 2018년 9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수차례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황씨는 2019년 11월 항소심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면서 석방됐다. 앞서 여러 차례 마약 투약으로 처벌받은 이력도 있다. 2015년 5~9월 자택 등에서 필로폰을 세 차례 투약했다. 2018년 4월에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처방 없이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집행유예 기간 중인 2021년 7월9일 재차 마약을 투약해 1심 판결로 추징금 40만원에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9년에 마약 투약죄로 선고받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종범죄 재범에 이종범죄까지 저지른 대가로 가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당시 마약 혐의와 함께 2020년 11월, 시가 500만원 상당의 명품 신발 등을 훔친 혐의도 받았다. 기소된 이후 세 차례 반성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28일 2심 판결서 검찰은 황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다. 황씨는 최후 진술에서 “휴대전화도 없애고 시골로 내려가 열심히 살고 제가 할 수 있는 성취감 느끼는 일을 찾아 열심히 살아보겠다”면서 “지난 3~4년간 수면제나 마약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제가 너무 하찮게 다뤘고 죽음도 쉽게 생각하며 저를 막 대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변론했다. 그해 11월15일 2심 판결서 재판부는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년8개월을 선고했다. 추징금은 4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태국서 이동 이후 2023년 이선균 마약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황씨를 포함해 총 8명이 마약을 투약한 단서를 포착하고, 일부는 형사 입건해 내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황씨는 내사자 신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내사 대상에 오른 인물 1명과 성명불상자 1명을 공갈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사실도 파악했다. 다수의 제보자들은 “황하나는 이선균이 협박당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이선균을 협박해 금품을 뜯은 전직 영화배우 박모씨와 유흥업소 여종업원 김씨의 협박 행각이 검찰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