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사위들 경영 성적표

잘 키운 백년손님 열 자식 안부럽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이 있다. 사위에 대한 정이 자식에 대한 정에 못지않다는 뜻도 되고 사위도 때로는 처가의 자식 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재계의 사위 역할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누구의 사위, 누구의 남편이라는 꼬리표서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재벌가 사위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재계 사위들의 경영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다. 오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경영 무대서 활약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다. 견고한 실적을 견인한 사위가 있는가 하면 부침을 겪는 사위들도 제법 보인다. 

실적에 따라
희비 엇갈려

재계 사위들 가운데 올 상반기 성적이 가장 좋은 인물은 안용찬 제주항공 부회장이다. 제주항공은 상반기 사드로 인해 중국 관광객들이 감소했음에도 매출이 39.7% 늘었고, 영업이익은 167.3% 급증했다. 

또 상반기 매출로는 처음으로 4000억원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최근 3년 연간 실적을 살펴봐도 제주항공은 매출과 영업이익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안 부회장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장녀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과 결혼 후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로 입사해 그룹 일원이 됐으며 2012년 초부터 제주항공 경영을 맡고 있다. 안 부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MBA 과정에 재학 중 채은정씨을 만났다. 


애경화학 총무이사와 애경산업 전무를 거쳐 1995년 사장 자리에 오른 안 부회장은 적자에 시달리던 애경산업을 흑자로 돌려세우고 취임 초 800%가 넘던 부채비율을 200%대까지 낮추며 ‘낙하산 사위’라는 꼬리표를 뗐다.

신정훈 사장이 이끌고 있는 해태제과는 상반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뒷걸음질쳤다. 매출은 0.9% 줄었고, 영업이익은 23.9% 감소했다. 하지만 경쟁사인 롯데제과는 매출과 영업이익이 2.3%, 0.2% 증가했다. 

신 사장은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의 사위로, 윤 회장의 외동딸 윤자원씨와 결혼하며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미국 미시간주립대 MBA를 거쳐 외국계 경영 컨설팅 기업인 베인앤컴퍼니서 근무하며 크라운제과의 해태제과 인수 작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인수 작업을 진행하던 때만 해도 그는 이미 윤자원씨와 결혼한 상태였다. 공전의 히트작 허니버터칩은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한 사례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둘째 사위로 그룹 금융계열사를 맡고 있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회사별로 수익성이 엇갈렸다. 올 상반기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의 매출은 모두 두 자릿수 이상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현대캐피탈이 38.5% 감소했다. 

카드와 커머셜은 각각 37.6%, 239.1% 증가했다. 현대캐피탈의 이익 감소는 현대기아차의 판매가 부진한 탓이다. 지난해까지 3년간 추이도 현대카드와 현대커머셜은 매출이 늘어났지만 영업이익은 줄었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정 부회장은 1985년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과 결혼한 뒤 1987년 현대종합상사 기획실에 입사했다. 이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전무와 기획재정본부장을 지냈고 기아차서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을 지내는 등 계열사를 넘나들며 그룹 차원의 지지를 받았다. 


올해 15년 차 CEO로서 국내 500대 기업 내의 여신금융사 중 최장 재임 CEO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곧바로 임원
쏟아지는 관심

박순호 세정그룹 회장의 사위이자 박이라 부사장의 남편인 김경규 전무는 O2O·글로벌사업본부를 책임지면서 신성장동력 발굴에 더 힘쓰는 분위기다.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김경규 전무는 2007년 세정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입사했다. 2012년 ‘인디안’ 사업본부장과 전략기획실 담당임원을 겸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013년 ‘웰메이드’ 사업본부장을 맡아 기업의 중대한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신임을 얻었다. 올해 1월 전무로 승진과 함께 경영 일선서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장녀 허세경씨 남편인 김하철 일진반도체 대표는 사실상 독자경영 체제를 구축해 놓은 상태다. 김 대표는 2010년부터 일진반도체를 이끌고 있다. 현재 일진반도체는 현재 허세경씨와 김 대표가 각각 34.2%, 14.7% 지분을 가졌다. 

‘뜨는’ 슈퍼 사위들…조력자로 맹활약
눈칫밥 뜨면서 활발해지는 일선 참여

성우하이텍그룹의 사위 2명도 그룹사 이사, 대표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명근 성우하이텍 회장의 장녀 이보람씨 남편인 조성현씨는 2007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 한 뒤 현재는 성우하이텍 이사로 재직 중이다. 

이 회장 차녀 이아람씨 남편인 한창훈 리앤한 대표는 LG패션(현 LF)에 근무하다 성우하이텍 이사로 그룹으로 들어왔다. 2013년에는 스포츠 패션 브랜드 EXR코리아 수장에 오르기도 했지만 실적부진으로 관련 사업을 철수하기도 했다.

휠라코리아에도 쟁쟁한 실력을 갖춘 사위가 활약 중이다.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의 사위인 이성훈 아큐시네트코리아 대표이사다. 2005년 윤 회장의 딸 수연씨와 결혼한 그는 휠라코리아의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를 역임한 바 있다. 

이 부사장은 휠라코리아 합류하기 전부터 ‘재무통’으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연세대 경제학과와 미국 로체스터대 MBA를 졸업한 그는 삼성증권 IB사업본부 M&A팀, 엔씨소프트 재무전략담당을 거쳐 2007년 휠라코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2011년 미국 골프 용품 회사인 아큐시네트를 12억2500만달러에 인수하며 회사 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인물이다. 아큐시네트는 골프 용품 세계 1위 브랜드 ‘타이틀리스트’를 보유한 회사다.

이 대표는 2015년 아큐시네트코리아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 4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성과로 말하는 
숨은 실세들 

차기 경영인이 되기 위한 경영 수업에 나선 사위도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사위 정종환씨가 대표적이다. 정씨는 이 회장의 장녀 이경후씨의 남편이다. 2010년 8월 CJ 미국지역본부에 입사한 정씨는 지난 3월 정기임원인사를 통해 부인과 함께 상무대우로 나란히 승진했다.

정 본부장은 미국 컬럼비아대서 학사(기술경영)와 석사(경영과학) 학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컬럼비아대 석사 재학 시절 만나 교제했으며 2008년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는 중국 청화대에서 MBA 과정도 마쳤다. 

2003~2006년 글로벌 IT컨설팅 업체인 켑제미나이, 2006~2008년 씨티그룹서 일했다. 결혼 후에도 모건스탠리 스미스바니(2008~2010년)서 근무했다. 2015년 8월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장례식 당시 고인의 영정사진을 들고 영결식 운구 선두에 선 바 있다.

CEO를 맡는 것은 아니지만 고위 임원으로서 회사에 속한 사위도 표정은 다소 엇갈린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차녀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과 결혼한 김재열 사장은 스포츠사업총괄로 재직 중인 제일기획이 상반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증가하며 대외 행보 발걸음이 가볍다. 김 사장은 ISU집행위원과 평창동계올림픽 국제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스포츠사업은 제일기획의 실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정유경 신세계 사장과 혼인한 문성욱 부사장이 글로벌패션본부로 있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상반기 영업이익이 20% 감소했다.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와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경영학과를 졸업한 문 부사장은 소프트뱅크코리아 차장으로 근무하던 중 경기초등학교 동창인 정 부사장과 인연을 맺고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5년 신세계인터내셔날 상무로 승진한 뒤 이마트 해외사업총괄 부사장을 맡아 2011년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중국 이마트의 순손실을 절반가량 줄이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4년 말에는 신세계인터내셔날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아내인 정 사장이 1990년대부터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와 패션사업 영역을 구축해온 곳이다.

결혼하자마자 별 달고 진두지휘
낙하산 꼬리표 떼느라 절치부심

이외에도 김도환 S&T홀딩스 사장, 한경록 한솔제지 상무, 신동철 반도건설 전무, 이진철 신안 사장, 최성재 교원 호텔사업부문장 등이 주목받는 재계 사위들이다. 특히 최평규 S&T그룹 회장의 장녀 최은혜씨와 결혼한 김동환 사장의 경우 S&T홀딩스가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21% 증가하자 그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아졌다. 

아예 독립해서 잘나가는 사위도 꽤 찾아볼 수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장녀 구연경씨와 결혼한 윤관 블루런벤처스 사장이 대표적이다. 스탠퍼드대서 경제학과와 심리학을 복수전공하고 경영공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0년에 블루런벤처스의 전신인 노키아벤처파트너스에 입사했다. 

2006년 결혼 이후에도 LG그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벤처기업을 발굴, 육성하고 해외 진출까지 돕는 역할에 열심이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장녀 구근희씨의 남편인 이준범 회장은 이계순 전 경남도지사의 차남으로 LS가로서는 관료 집안과의 첫 혼사였다. 화인은 주방세제, 화장품, 샴푸 등의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해 주로 LG생활건강에 납품한다. 화인유통까지 합하면 연매출은 약 500억원대다. 

이인정 회장은 구태회 명예회장의 막내딸 혜정 씨와 결혼한 후에도 그룹 밖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누전차단기와 배선용 차단기, 무선주파수인식기술(RFID) 사업 등에 진출했으며 납품처는 LS산전, 루셈, SK하이닉스 등이다. 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의 장녀 구은정 태은물류 대표와 결혼한 김중민 회장 역시 주로 금융, 인력 파견 사업 등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범 현대가 계열에선 정희영 선진종합 회장이 눈길을 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8남1녀 중 외동딸인 정경희씨의 남편으로 그는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 요직을 거쳤다가 40대 중반 돌연 독립해 해운업체 선진종합을 창업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선진종합의 2013년 매출액은 269억원에 그치지만 당기순이익이 39억원에 달하는 알짜 회사다. 

독자 행보
이색 사위들

정몽구 회장의 맏사위인 선두훈 코렌텍 대표(아내 정성이 이노션 고문)는 고 선호영 전 대전선병원 회장 차남으로 정형외과 의사 경험을 살려 인공관절 제조업체 코렌텍을 창업했다. 선 대표는 선병원 영훈의료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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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