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옹성’ 육사 잔혹사

70년 만에 간판 내리는 ‘육방부’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군 수뇌부 인사서 육사 출신이 철저히 배제됐다. 육사 출신의 국방부 장악을 없애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이번 인사 결과에 육사 출신 장군의 ‘공관병 갑질 사건’도 크게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육사 안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사고들은 육사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이미 국민의 신뢰는 바닥을 치는 상태. 높았던 육사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청와대서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서 육사 출신들의 불만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전날 단행된 문재인정부 첫 군 수뇌부 물갈이 인사서 육사 출신들이 상당수 배제된 것을 두고 육사 출신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그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학교 출신 배제
정해진 수순?

문 대통령은 “국방부장관부터 군 지휘부 인사까지 육·해·공군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육사 출신들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군의 중심이 육군이고, 육사가 육군의 근간이라는 것은 국민께서 다 아는 사실”이라며 “이기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 우리 군의 다양한 구성과 전력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8일 문 대통령은 군 수뇌부 대장 8명 중 부임 1년이 안 된 엄현성 해군 참모총장을 제외한 7명의 대장을 교체했다. 이번 인사는 그 규모는 물론 육군·육사 배제, 기수 건너뛰기 등에서 ‘역대 최강의 태풍급’으로 불릴 만하다.

이번 인사서 군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합참의장)에 정경두(57·공사 30기) 공군 참모총장이 내정됐다. 정 총장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합참의장에 공식 임명되면 이양호 전 합참의장 이후 23년 만의 첫 공군 출신 합참의장이 되는 것이다.


특히 정 총장이 합참의장에 임명되면 해군 출신인 송영무 국방부장관과 함께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을 모두 비육군이 맡게 된다.

또 육군 참모총장에는 김용우 합참 전략기획본부장(56·육사 39기)이, 공군 참모총장에는 이왕근 합참 군사지원본부장(56·공사 31기·이상 중장)이 각각 임명됐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에는 김병주 3군단장(55·육사 40기)이, 1군사령관에는 박종진 3군사령부 부사령관(60·3사 17기)이, 제2작전사령관에는 박한기 8군단장(57·학군 21기)이, 3군사령관에는 김운용 2군단장(56·육사 40기·이상 중장)이 각각 임명됐다.

해군 출신 국방부장관에 합참의장까지 공군 출신 정 후보자를 내세우면서 군 수뇌부의 핵심 요직서 육사 출신이 밀려났다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팽배한 분위기가 읽힌다. 이번 인사는 국방개혁을 명분으로 그동안 군의 주류였던 육군, 육사 출신들을 가급적 배제하려는 기조를 보여줬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참모총장만 간신히…물먹은 수뇌부 인사
학군·3사 등 비육사시대 “대통령 의지”

이는 문 대통령이 청문회 과정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해군 출신인 송영무장관 임명을 고수한 데서 어느 정도 예측됐던 결과였다. 

노무현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민정수석 등으로 근무했던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초기에 육군·육사 출신을 중용한 것이 당시 국방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요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사서 합참의장과 함께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육군 참모총장에 1969년 이래 처음으로 비육사가 임명되느냐는 것이었다. 합참의장에 비육군이 임명되면 육군 총장까지 비육사를 임명하기 어렵겠지만 합참의장에 육사 출신 육군이 임명되면 육군 총장에는 비육사가 임명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간신히 한자리
속은 부글부글

결국 육군 참모총장은 육사 출신서 임명됐지만 학군·3사 등 비육사 출신 2명이 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됐다. 과거 정부에선 비육사 출신이 1명가량 야전군사령관에 포함돼있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들어선 ‘육사 독식’ 경향이 강해져 논란이 일었었다.
 

이번 인사는 육사 출신이 국방부를 장악한다는 ‘육방부(陸防部)’를 혁파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한 소식통은 “육군, 특히 육사 출신들이 육사 배제 흐름에 대해 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부글부글하면서 이번 인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공군 출신 합참의장에 이어 육군 총장도 비육사가 임명됐다면 어떤 형태로든 불만이 표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국방당국 관계자는 “육군의 경우 서열 및 기수 등 기존 인사 관행서 탈피해 육사, 3사, 학군 출신 간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고 능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육사 출신의 축소에는 박찬주 전 2작전사령관의 갑질 논란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육사 동기들인 37기는 박 전 사령관을 포함해 이번 인사서 모두 물러났다.

더구나 김용우 신임 육군참모총장이 전임 장준규 총장보다 3기수 아래인 육사 39기여서 육사 37기와 38기는 동시에 군복을 벗게 됐다. 육사 37기는 이전 정권서 군단장급(중장) 8명, 대장 3명을 배출하면서 군사정권 시절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기수로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국 총장이나 의장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무관의 기수’로 전락했다.

육사 37기의 그늘에 가려 대장을 1명밖에 배출하지 못했던 임호영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조현천 국군기무사령관, 정연봉 육군참모차장 등 육사 38기도 모두 군복을 벗었다. 전역하는 육사 38·39기 가운데엔 군내 사조직인 ‘알자회’ 출신들과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장관 등 전 정부 군 수뇌부 인맥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포함돼있다.

청와대는 갑질 의혹이 있는 후보자는 철저히 배제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한 육사 출신 중장이 합참의장 후보에 올랐지만 막판에 공관병 갑질 의혹이 제기돼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도도 말썽
이미지 추락


이번 인사의 육사 출신 배제는 육사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되는 육사 생도들의 사건·사고도 육사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했다. 지난 2월 졸업을 하루 앞둔 육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 3명이 ‘성매매 혐의’로 퇴교 조치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최고의 군인이 되고자 4년간 피땀 흘린 노력이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물거품이 됐다.

당시 육군의 한 관계자는 “육사 4학년 생도 3명이 이달 초 정기 외박을 나갔다가 일탈 행위를 했다는 생도 제보가 있어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며 “이들 생도를 형사 입건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생도 3명이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고, 생도 품위 유지를 위반한 것으로 드러나 징계위에서 퇴교 조치가 내려졌다”고 말했다.

그는 “졸업과 임관을 앞둔 시점이어서 육사에서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법과 규정에 의해 강력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라며 “특히 성범죄에 대해서 무관용 원칙에 따라 원 아웃(one out)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계속되는 생도 사건사고
“못 믿겠다” 여론 확산


이번 사건은 익명의 생도가 육본 인트라넷의 ‘생도대장과 대화’에 제보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육사 법무실 관계자는 “퇴교 심의에 회부될 정도로 증거를 확보했다”며 “사관학교법 시행령에 군기 문란과 제반 규정을 위반하면 퇴교 처분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국방부가 익명의 제보 및 투서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는데도 사관학교서 졸업을 하루 앞둔 생도에 대해 퇴교 조치한 것은 너무 성급한 조치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육사 관계자는 “아무리 무기명으로 제보를 했다고 해도 제보 내용이 구체적이고 생도 3명의 신원까지 구체적으로 적시돼있어 조사했다”고 말했다. 육사 징계위서 퇴교 처분이 내려짐에 따라 해당자들은 곧바로 학교를 떠났다.
 

지난해 9월에는 여생도가 동기를 장기간 성추행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가해 여생도는 한민구 국방부장관을 보좌하는 ‘장군의 딸’로 알려졌다. 

A 생도(21)는 지난해 3월부터 약 4개월간 같은 생활관을 사용하는 2명의 여자 동기생을 뒤에서 껴안거나 신체의 특정 부위를 만졌다. 그들의 침대에 함께 누워 허벅지를 더듬기도 했다.

당시 육군 관계자는 “피해 여생도들이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했지만 A 생도의 유사한 행동이 몇 차례 반복되자 자제할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다 지난해 7월 A 생도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심이 간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피해 여생도들은 상담관을 찾아 방을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육사 측은 뒤늦게 진상조사에 나섰다. 육군 관계자는 “학교 측이 A 생도에게 진상을 확인했다”면서 “본인이 육사 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했고 자퇴한 뒤 의대를 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육사는 즉시 훈육위원회를 열어 A 생도를 자퇴 처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A 생도의 성추행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 육사는 생도들의 일탈 행위에 대해 징계위원회를 열어 처벌한다. A 생도의 경우 이 과정이 생략됐다.

현역 장성인 A생도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군인권센터 관계자는 “A 생도의 아버지가 국방부장관을 지근 거리서 업무를 챙기는 실세”라며 “육사 생도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생도대장(준장)과 A 생도의 아버지가 육사 동기여서 편의를 봐줬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 같은 의혹에 대해 부인했다.

육사 측이 소문 확산을 막기 위해 생도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때문에 ‘A 생도가 왕따를 당해 자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성추행 피해 생도들이 가해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국민들 비난
어떻게 극복?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과 군인에 대해 우리는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또한 현대 전쟁의 승패는 군 지휘관들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된다. 이런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곳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장차 장교가 될 생도들이 이 지경이라면 앞으로 이들에게 군 지휘권을 맡겨도 될지, 이들을 믿고 단잠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과연 육사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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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