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청와대 캐비닛 파일 공개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7.31 10:21:03
  • 호수 1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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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해도 알지? 무언의 시그널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청와대 캐비닛서 이전 정권서 작성된 문건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당초 청와대는 박근혜정권 당시 제작된 문건을 공개하며 추가 공개는 없을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최근 이명박정권 당시 문건이 발견되면서 문건 발견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등 추가 공개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에 아직도 청와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문건의 존재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청와대가 새로운 캐비닛 문건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정권이 남기고 간 문서 목록을 전수조사하는 과정서 이명박(MB)정권 당시 청와대가 생산한 문건을 찾았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5일 <연합뉴스>를 통해 “MB정부 당시 작성된 문건이 발견됐다”며 “그중에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와 관련한 내용도 포함돼있다”고 전했다.

계속 발견되는
문건들 내용은?

제2롯데월드 인허가 건은 당시 각종 의혹을 낳으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국방부는 성남 서울공항 이·착륙 전투기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며 인허가를 반대했지만 MB정부는 공항 활주로 각도를 3도 트는 조건으로 롯데에 신축 허가를 내줬다. 일각에선 MB가 직접 신축 허가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STX 관련 문건도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STX와 MB정부 사이에 오갔던 의혹으로는 해군 차기고속정 사업 수주가 있다. 당시 STX는 군수 사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MB정부로부터 해군 차기고속정 방위산업체로 추가 지정돼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당시 해군의 수장이던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은 옛 STX그룹 계열사로부터 7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형을 확정 받은 상태다. 최근 발견된 STX 문건에 당시 군 고위 관계자 내지는 정권 인사가 연루된 내용이 들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청와대는 문건의 추가 발견 소식에 발을 빼는 모양새다.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언론 보도에 대해 청와대 측은 “확인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설사 문건이 존재한다고 해도 공개를 할 것인지, 공개를 해도 무방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 청와대는 이번에 발견된 문건의 공개 여부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 알권리’를 고려한다면 공개하는 것이 맞지만, ‘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롯데·STX
무슨 내용?

또 외교·안보 같은 중대한 내용도 함께 공개될 수 있어 고심 중이다. 추가 문건이 발견된 곳은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서 안보실서 박근혜정권 때 제작된 문건이 발견되자 청와대는 관련 소식을 알리면서도 외교·안보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해당 내용은 발표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캐비닛 문건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시점은 지난 14일이다. 당시 청와대는 박근혜정부 때 사용한 민정수석실 캐비닛서 300쪽의 문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삼성 경영권 승계’ ‘문체부 압력’ ‘세월호 유족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 등 담고 있는 내용이 파격적이었다. 

청와대는 발견된 문건 가운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있다고 알려 파장을 낳았다.


해당 민정수석실 자료들은 2013년 1월 작성된 MB정부 시절 자료 1건을 제외하면 모두 박근혜정부 때인 2014년 6월11일부터 2015년 6월24일까지 만들어졌다. 내용은 장관 후보자 등 인사 자료, 국민연금 의결권 등 각종 현안 검토 자료와 지방선거 판세 전망 등 기타 자료 등이다. 

해당 자료들 중 일부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으로 이관됐으며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이원석)에 배당됐다.

이후에도 문건 발견 소식이 이어졌다. 3일 뒤인 지난 17일 청와대는 정무기획비서관실서 박근혜정부 시절 정책조정수석실서 생산한 다량의 문건을 추가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수현 대변인은 “(총 1361쪽의 문건 중 254쪽에 대한 분류 및 분석 작업을 마쳤는데) 254쪽의 문건은 비서실장이 해당 수석비서관에게 업무를 지시한 내용을 회의 결과로 정리한 것”이라며 “문서 중에는 삼성 및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내용, 현안 관련 언론활용 방안, 위안부 합의, 세월호, 국정교과서 추진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있다”고 밝혔다.

한장 한장 캐비닛 여는 청와대 속셈은?
대놓고 못하고…정치적 메시지 담겼나

그런 가운데 청와대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전반의 과정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김관진 문건’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드 도입결정부터 조기배치 과정까지 수많은 의혹을 풀 수 있는 단서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민감한 외교·안보 관련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있어 비공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의혹들 중 문건 내용에 포함된 것이 있는 반면, 아직 거론되지 않은 사안도 존재한다. 청와대의 전수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서 정권과 연결된 의혹들을 추가로 발견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먼저 MB정권과 관련된 대표적인 의혹은 4대강 사업이다. 4대강 사업은 이미 지난 2010년부터 3차례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박근혜정권서 관련 정보가 문건으로 작성돼 캐비닛에 보관됐을 가능성이 크다.

MB정권서 있었던 ‘노무현 논두렁 시계’ 공작도 핵심 사건 중 하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 변호사는 6년 뒤인 2015년 2월 <경향신문> 기자들과 저녁자리서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국정원이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청와대를 지목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4대강·성완종
핵심 의혹들

자원외교 사업도 MB정권서 시작돼 박근혜정권 시절 큰 주목을 받은 사안이다. 지난 2015년 3월 검찰은 자원개발과 관련해 그동안 의혹의 중심에 있었던 한국석유공사와 경남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사정기관을 통한 정보 수집이 일상 업무인 민정수석실서 이와 관련된 서면 보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자원외교 수사는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로 이어졌다. 비리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선상에 있던 성 전 회장은 지난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에 앞서 성 전 회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나는 MB맨이 아니다”며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시신으로 발견된 성 전 회장의 상의 주머니에선 메모지가 발견됐는데 ‘유정복 3억, 홍문종 2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등 실명과 로비로 추정되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기록돼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성완종 리스트’라 불렀다. 2015년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사건 중 하나라는 점에서 청와대 측이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서 MB와 맞붙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MB의 BBK 사기 연루를 주장했다. 이후 서로에 대한 고소·고발전이 이어졌고 결국 MB는 당선자 신분으로 BBK 특검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 때의 앙금은 18대 총선서 친이(친 이명박)계의 친박(친 박근혜)계에 대한 공천 학살로 이어졌다.

‘논두렁 공작’ 배후는?
‘정윤회 수사’ 보고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만기 출소한 김경준 전 BBK 투자자문 대표는 자신에게 ‘기획입국’을 제안한 사람이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라고 주장했다. 유 변호사는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후보 측에 있었다. MB 측과 갈등을 벌였던 박 전 대통령이 BBK와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2년 차에 터진 정윤회 비선실세 의혹은 최순실 사태의 전초전이었다. 청와대는 당시 유출된 문건에 대해 ‘찌라시’라고 비난하면서 이 같은 의혹을 보도한 <세계일보> 사장과 기자 등을 검찰에 고소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은 형사1부에 문건 내용의 진위를 특수2부에 문건유출 부분을 배당해 뒷말을 낳았다. 실제 검찰은 문건 유출 경위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는 등 석연찮은 점을 보였다. 

곧 청와대가 개입해 짜맞추기식 수사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에 대한 동향보고가 민정수석실을 통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박근혜정권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논란을 기획해 찍어내기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채 전 총장은 취임 후 곧바로 ‘국정원 대선 댓글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이 의심된다”고 결론 내렸는데, 이는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에 불안함을 느낀 당시 청와대가 지시를 내려 채 전 총장에 대한 뒷조사를 실시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윤회·채동욱
의혹의 키맨들

이 같은 의혹을 담은 문건이 추가로 발견될지는 미지수다. 발견된다고 해도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개 여부와 관계없이 만약 추가 문건이 발견된다면 ‘적폐청산’의 연장선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내부에선 문건 내용 공개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교·안보 등과 같이 민감한 사안이 아니라면 불법적인 지시가 담긴 것으로 판단되는 문건을 수사기관으로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찔리는 자유한국당

청와대 캐비닛 문건 공개와 관련해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이 무력시위를 펼쳤다. 한국당은 보도자료를 통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과 성명 불상의 청와대 직원들을 공무상 비밀누설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변인은 “우리가 발견한 문건 중 ‘비밀’ 분류도장이 찍혀 있는 문건은 없다”며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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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