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스캔들’ K사-대기업 수상한 거래 추적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7.24 10:18:55
  • 호수 1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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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 집만…어떻게 알고 뚫었나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재계서 사랑받던 인테리어 시공업체 K사가 세금 탈루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공사 계약서나 공사비 입금 내역 등이 경찰 측에 넘어갔다. 사실상 고객 장부가 넘어간 셈이다. 여기에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지 오너 이름도 포함돼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가 떨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경찰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에 회삿돈이 들어간 정황을 포착하고 대한항공 본사를 전격 압수수색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지난 7일, 수사관 13명을 투입해 서울 강서구 하늘길 대한항공 본사와 칼호텔네트워크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해 공사 관련 자료와 세무자료, 계약서 등을 확보했다.

발주한 기업
발목 잡히나           

경찰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2013년 5월부터 2014년 8월 조 회장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인테리어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한진그룹 계열사인 칼호텔네트워크의 인천 영종도 호텔 신축 공사비를 전용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를 받고 있다. 그룹 회장의 집을 꾸미는 공사에 회사 공금이 투입됐다는 것이다.

경찰은 대한항공이 조 회장 자택 공사와 호텔 신축 공사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에 착안해 이 같은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호텔 공사비 중 최소 10억 원이 조 회장 자택 공사비로 쓰였다고 의심하고 있다. 

조 회장의 평창동 자택은 지하 3층, 지상 2층으로 연면적은 1403.7m²(약 420평)에 이른다. 올 1월 기준 국토교통부와 서울시가 산정한 개별주택가격은 33억6000만원이다. 공사가 한창이던 2013년 말에는 ‘공사비와 땅값을 합치면 100억원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경찰은 대기업 회장들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를 주로 맡아 하던 K사 대표의 횡령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서 이 같은 비리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모 K사 회장은 5월 경찰 조사에서 “대한항공 측이 먼저 조 회장 자택 인테리어 비용을 영종도 호텔 공사 대금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진 오너 자택 인테리어 공사
회삿돈 들어간 정황 포착 수사

K사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건설업계나 재계에선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시공사다. 지난해 시공능력순위 국내 9위에 올랐으며, 건설업계 지망생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 순위서도 1위를 기록했다. 
 

K사는 호텔 및 상업·사무·주거공간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설계하는 회사다. 1965년 반도조선 아케이드에 L사로 처음 문을 열었다. 외국 항공사의 티켓 부스 인테리어를 시작으로 국내 유수의 호텔과 외국계 기업의 디자인을 맡으며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의 전문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1975년 부천공장을 준공, 1979년에는 K사로 법인 전환해 사세를 확장했다. 

1980∼90년대 상공부장관상인 수출의 날 100만불 수출의 탑을, 건설부장관상인 전문건설공사 유공자 표창을 수상했다. 현재까지 그랜드하얏트서울, 신라호텔, 웨스틴조선서울, 반야트리, W서울워커힐을 비롯해 국내 유명 호텔의 인테리어와 분더숍, 10코르소코모, 랄프로렌 플래그쉽 스토어, 벤츠 등 상업 공간, 골프 클럽, 크루즈 등의 수많은 프로젝트를 도맡아 했다.

재계서 사랑받던 인테리어 회사가 어쩌다 고객 등에 칼을 꽂은 ‘키맨’이 된 걸까. 시작은 K사 오너 형제간의 갈등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회사 공사 맡기고
덤으로 회장 집도

K사는 설립 초기부터 가족기업이었다. 형인 장모 회장과 동생인 장모 부회장이 회사를 경영했다. 장 회장은 1939년생으로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한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다 K사를 세웠다. 네 살 아래인 장 부회장은 경기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형의 회사 경영을 도왔다. 


두 사람 간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어 초창기만 해도 형제간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2008년까지만 해도 장 회장이 61.00%, 장 부회장이 27.83%, 그리고 장 회장 아들인 장모 사장이 1.7%의 지분을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2011년 장 회장은 다른 지분들을 대거 인수해 지분율을 71.00%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다가 2015년부터 아들 장 사장이 37.83%로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장 회장 지분은 34.33%로 줄었다. 후계경영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나머지 27.84%는 K사가 보유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돌연 장 부회장이 지분 매각을 하면서 경영에 손을 뗐다. 업계에서는 형과 동생이 K사 경영권 승계 관련해서 다툼이 있었다고 입 모았다. 이에 장 부회장은 회사 경영서 손을 떼면서 장 부회장 쪽 인사들이 회사 내부 비리(대기업 오너 간의 커넥션)를 폭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관계자가 참여연대를 찾아가 관련 내용을 제보했으며, 참여연대가 경찰에 자료를 넘기면서 수사는 시작됐다. 

초창기 경찰 수사의 표면적인 이유는 K사의 무자료 거래에 의한 세금 탈루 혐의였다. 하지만 경찰의 칼끝은 재계로 향했다는 것. K사 수사 과정서 “이건희·이재용씨 자택 공사비용을 삼성물산이 수표로 줬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사건은 특수수사과에 배정됐다. 

경찰은 이런 증언을 토대로 K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여, 공사 계약서나 공사비 입금 내역 등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지난 5월30일 경찰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일부 대기업 회장 개인 주택 공사 비용으로 회삿돈이 사용되거나 불법 조성된 비자금이 활용됐다고 볼 정황과 증언이 확보돼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오너 형제 불화
세금 탈루 조사

K사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의 보수와 각종 인테리어 공사를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맡았으며, 삼성물산 한 직원이 비용 결제를 전담했다. 이들 부자의 집은 화장실 보수, 정원 조성 및 상주 직원들의 숙소 개선 등을 이유로 수시로 공사가 이뤄졌다. 경찰은 공사비용의 규모가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했다.  

 

대부분 삼성물산과 삼성증권으로 출처가 추정되는 수표가 사용됐다. 이같은 내용의 언론보도가 보도가 나가자, 삼성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일부 언론을 통해 “공사는 이 회장 개인이 삼성물산에 의뢰하고 삼성물산이 다시 업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공사대금은 회장 개인 돈에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밝혔다.

K사는 그동안 수많은 재벌 기업 공사를 해왔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신세계·대림·아모레퍼시픽·LG·현대자동차그룹·미래에셋대우 등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대한항공만 해도 인천 영종도 하얏트호텔 외에 서울 서소문빌딩 임원실 공사 등을 이 업체에 맡겼다. 

특히 범삼성가 쪽 공사가 많다. 삼성그룹의 경우 서울 서초타운 실내인테리어 공사부터 삼성전자 서천연수원·홍보관, 삼성SDS VIP존, 삼성서울병원, 안양베네스트 클럽하우스 등 계열사 공사 여러 개를 이 업체에 맡겼다. 


신세계그룹으로부터는 신세계백화점 본점·강남점, 이마트 일부 매장, 트리니티CC 클럽하우스 공사를 따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중에서는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이 일부 시설 공사를 이 회사에 발주했다. 

호화 주택·대형 빌딩 전문
의심스런 공사비…알고도?

이 뿐만 아니라 재벌기업 오너 소유로 추정되는 자택 공사도 많이 했다. 감사보고서에는 유엔빌리지 23호 주택, 한남동 65호 주택, 한남동 22호 주택, 판교 대장동 주택(경기도 판교신도시), 한남동 5호 주택, 평창동 주택, H주택 등이 공사 내역으로 적혀 있다. 하나같이 재계인사들이 모여 사는 부촌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들이다.

사정기관에 따르면 재계에서 K사에 일감을 맡기는 이유가 법인 공사비를 부풀려, 이중 일부를 오너 일가의 자택 공사하는 수법에 능통하기 때문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재계 관계자와 사정 기관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K사가 유력 일간지 오너 자택도 공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일요시사> 취재결과 K사는 2013년 해당 일간지 본관 임원실 인테리어 공사를 수주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뿐만 아니라 해당 일간지 오너와 장 회장은 친분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테리어 업계 관계자는 “2000년도 초반 해당 일간지 오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K사 회장이 조문객으로 오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경찰에서도 관련 내용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사까지 진행될지 미지수다. 


일각에선 경찰이 해당 일간지까지 수사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K사에 답변을 요청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부 자료 확보
재벌가로 불똥 

다만 경찰이 확보한 K사 자료를 토대로 재계를 향한 수사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는 노심초사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부분 대기업들이 걸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회사도 K사에 일감을 맡겼는데 경찰 수사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또 터진 오너 리스크

한진그룹이 또 다시 오너 리스크에 떨고 있다. 그룹 총수가 공사비 횡령 의혹에 휩싸이면서 그룹 재무개선의 한 축인 진에어 기업공개(IPO)는 물론 한진 회사채 발행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당장 진에어과 한진은 최종 수사결과가 나온 상황이 아닌 만큼 예정대로 조달을 강행한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선 반복적 행태의 한진그룹에 대한 싸늘한 시선이 신정부의 재벌개혁 기조와 맞물리면서 부정적 여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관투자자 입장에선 거듭된 오너 리스크로 청약 참여에 대한 부담감은 커지고 있다. 일부에선 최악의 경우 IPO가 심사과정서 철퇴를 맞을 수 있단 분석도 나온다.

지난 1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진그룹은 지난 7일 조양호 한진 회장이 자택공사 인테리어 공사비 중 상당액을 인천 영종도 호텔 신축공사비(약 10억 원)에서 빼돌려 쓴 혐의로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경찰의 압수수색 대상은 한진칼 자회사인 칼호텔네트워크 자재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그룹의 오너 리스크가 재부각되면서 자연스레 초점은 진에어 IPO와 한진 회사채로 쏠리고 있다. 당장 진에어와 한진 측은 노심초사하면서도 진행 중인 딜엔 큰 변수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계획대로 2017년 연말 상장, 이달 말 회사채 발행을 강행할 예정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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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