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5.29 10:26:13
  • 호수 1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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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권위와 여건을 상실했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문재인정부의 출범으로 대한민국은 변화하고 있다. 그중 가장 극명한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외교·안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은 대북 문제라는 난제에 직면해 있다. 그 해답을 찾고자 <일요시사>는 외교·안보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를 만났다.
 

‘리틀DJ(김대중)’ ‘정치9단’ 한화갑 총재는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호남서 태어난 그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헌정 사상 첫 정권교체의 순간임과 동시에 거물 정치인으로서 ‘한화갑’이란 이름 석자를 알린 분기점이었다.

한 총재는 김대중정부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임기 첫 한미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미국, 일본 등 세계열강을 숨 가쁘게 오가며 대한민국의 외교적 활로를 뚫고자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4선 국회의원(14·15·16·17대), 여당 대표 등 자신의 이력에 화려함을 더했다. 이제는 정치원로가 된 한 총재는 남은 일생을 한반도평화재단 일에 몰두하며 남북 교류협력과 통일에 바치고 있다.

9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 시점에 <일요시사>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한반도평화재단 사무실을 찾아 한 총재를 만났다.

다음은 한 총재와 일문일답.


- 이번 대선 정국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누가 당선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대선 기간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누가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지 드러났습니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은 유권자에게 표를 구할 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이하 민주당) 원내 다수당으로서 국정을 원만히 운영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정당·후보 지지도, 정치 환경적인 측면서 민주당이 앞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 정치 환경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입니까?
▲이번 대선은 여당이 없는 초유의 선거였습니다. 덕분에 여야 구별 없이 모든 정당이 완전 경쟁하는 구도로 진행됐습니다. 즉, 야당끼리의 경쟁이었습니다. 그렇게 5개 주요 정당이 맞붙는 초유의 정당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기존의 여야 대결이 아닌 국민의 욕구를 얼마만큼 실천해줄 수 있느냐에 성패가 갈리는 정당정치의 토대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시대정신이 변화한 결과라고 봐도 될까요?
▲국민들의 의식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지역성만 고려해 투표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유는 영남 출신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팔아 정치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나가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지난 박근혜정부를 평가해주신다면?
▲이렇게 무능하다는 게 전 국민에게 폭로됐습니다. 박근혜정부의 4년은 그야말로 낭비였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서 국사를 가지고 논쟁 한 번 해봤습니까? 장관도 자리만 지켰지 한 일이 없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닌 자기네들 자리 지키는 정부로 끝났습니다. 탄핵이 안 됐으면 민주 국가라고 말할 자격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문 대통령의 당선이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문 대통령의 당선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로 인해 당선이 어렵다는 예상도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을 압도할 만큼 다른 대선주자가 정치 지도자로서 국민들에게 리더십을 각인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국민의당 안철수 전 후보가 그랬습니다. 결국 살아난 보수 진영에 의해 ‘호남 대통령’이라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프레임에 갇혔고, 3위로 내려앉았습니다. 만약 안 전 후보가 문 대통령을 압도하는 정치적 자질을 보여줬다면 이러한 프레임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은 아직도 문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격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보수 진영서 문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과거처럼 국민 앞에 나서서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출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수는 문 대통령을 반대할 만한 모든 권위와 여건을 상실한 상황입니다. 탄핵 때문이죠.

DJ정부 일등공신, 한미회담 이끌어
9년 만의 정권교체 “예측 가능했다”

- 문재인정부의 파격 인사가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문 대통령은 보수든 진보든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인데요. 주변이 정돈된 다음 국민의 목소리를 얼마만큼 수렴해 소화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계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인재들이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면 그 공은 대통령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마음껏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용병술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임기 초지만, 문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 강경화 외교부장관 후보자에 대해 국민의당은 북핵 문제나 4강 외교를 풀어가기엔 경험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국을 봐도 국무장관이 재벌 총수 아닙니까. 그 사람이 무슨 외교 경험이 있나요? 외교부는 수십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관은 자기 주관대로 기관을 운영하는 게 아닙니다. 

외교부에는 수십 년의 외교 역량과 노하우가 축적돼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빌려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국민의당의 논리대로라면 의정활동을 가장 오래 한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죠. 전 강 후보자가 UN서 세계 문제를 다룬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외교의 영역을 넓히는 데 보탬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6월 한미정상회담을 두고 일각에서는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합니다. 외교·안보 쪽 핵심 정책 목표를 명확히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두른다는 지적인데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한미정상회담이 조속히 이뤄져야 합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북핵 문제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습니다. 일례로 북핵 문제에 있어 성과를 낸 1994년 제네바 합의도 우리나라와 북한이 대화해서 협정을 맺은 게 아닙니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한 것이죠. 미국이 주도하지 않으면 UN 결의를 이끌어내기도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쓸 수 없는 것이 북핵 문제입니다. 북한도 우리와 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그러나 이게 현실입니다. 북핵 문제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 중국과의 공조보단 미국과의 공조를 좀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우린 미국과 동맹관계니까요.

- 지난 정권의 사드 배치 합의로 미·중 사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드 문제는 박근혜정부가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또 중국의 양해도 못 구한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중국과 국민에게 ‘북한의 핵탄두를 막기 위해 사드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입장을 솔직하게 털어놨어야 한다고 봅니다.

- 그렇다면 사드를 국내에 배치한다는 결정은 옳았다고 보시나요?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중국은 우리만큼 북핵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중국은 UN 결의도 무시한 채 북한에 돈과 기름을 주지 않습니까.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중국의 말만 듣고 우리가 미국과 관계를 끊어버리면 북한만 이로울 뿐입니다. 애초에 중국이 북핵을 막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중국에 북핵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면 사드를 철수하겠다고 요구해야 합니다.
 

- 문 대통령은 줄곧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사드 배치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오는데요.
▲북한에 대해서는 양동작전을 써야 합니다. 사드 배치가 안보를 위한 결정이듯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협력도 안보를 위해서입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한반도 평화유지 비용인 것이죠. 전쟁이 발발하면 하루 1억달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개성공단은 1년에 1억달러가 소요됩니다. 교류협력을 통해 공존을 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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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정부는 개성공단 재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북한에 개성공단 같은 것을 더 많이 만들었으면 합니다. 북한에 우리의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은 안 됐지만 우리 경제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로 확대돼야죠. 그것이 실질적인 통일입니다.

우리는 말이 같고 문화가 같고 피가 같은 단일 민족입니다.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에서의 우리 영역을 넓혀가서 최종적으로 영토까지도 합쳐야 합니다. 차츰차츰 넓혀가야 합니다. 남북이 같은 영토처럼 왕래할 수 있고 가족도 만날 수 있으면 그것이 통일 아니겠습니까.

- 북한과의 교류협력은 북한을 도와주는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편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우리가 비료, 쌀을 원조할 때 북한에 돈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국내 물품을 우리 정부가 사서 줬죠. 국내산 쌀을 사면 우리 농민에게 돈이 갑니다. 과거 경수로 지어질 때도 노동력만 북한 것이지 물자는 전부 우리 쪽에서 갔습니다. 돈은 남한 사람들이 버는 것이지 북한이 아닙니다. 

- 지난 대선 정국서 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개성공단 재개가 북한 노동자들을 위한 공약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돈으로 따지면 북한 노동자에게 200달러도 지급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 중소기업은 훨씬 더 돈벌이가 되죠. 우리 기업 돈벌이시켜주는 공약입니다. 

- 그렇다면 북한과의 교류협력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까요?
▲미국과 협의해 발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정부 때 햇볕정책은 클린턴 미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같이 수반됐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과의 교류협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 문재인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여부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아직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당장 남북 교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대통령 되기 전부터 주장했지만, 취임하고 3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그런 전례를 생각한다면 급하게 갈 필요는 없습니다.

- 일본과는 위안부 합의 문제가 최대 난제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너무 서둘렀습니다. 그런 자세로 접근하면 외교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다른 열강과의 외교도 마찬가지입니다.

- 일본 측은 합의한 사안을 이행하라는 입장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내용이 담긴 무라야마·고노 담화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이를 무시하면서 우리 측에는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담화 내용을 가지고 “너희는 이제 와서 왜 다른 말을 하느냐”고 일본을 압박해야 합니다. 사실 일본은 우리에게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자격이 없습니다.

- 문재인정부의 성공을 위해선 어떤 점에 주안을 둬야 할까요?
▲문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 연구하겠지만 사실 박근혜정부가 잘못한 것을 시정만 해도 박수받을 것입니다.

- 반대로 국민은 어떤 시선으로 문재인정부를 바라봐야 할까요?
▲국민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언제든지 시비를 가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는 좋은 정치를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대통령은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며, 그 권력은 국민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권력은 결코 대통령만의 것이 아니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chm@ilyosisa.co.kr>


[한화갑은?]

▲전남 신안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제14·15·16·17대 국회의원
▲전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
▲전 민주당 대표
▲현 한반도평화재단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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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