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드러난’ 롯데 재판 시나리오

‘노발대발’ 96세 왕회장이 총대 메나

[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롯데 일가의 법정 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20일 벌어진 공판서 한 가지 특이점이 발생했다. 롯데 오너 일가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혐의 내용을 대부분 부인하면서 신격호 회장에게 의혹을 떠넘기는 모습이다. 나름의 치열한 전략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이날의 법정 안 모습을 정리했다.

지난 20일 롯데그룹 오너 일가는 자신을 둘러싼 비리 혐의를 소명하기 위해 법원에 모였다. 법원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 향했다. 법원 앞에서 만난 기자들에게 별다른 말없이 재판에 참석했다.

줄줄이 법정행
어리둥절 신격호 

롯데그룹 관련 비리 재판은 이날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서관 312호서 진행됐다. 비리에 연루된 오너 일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그의 세 번째 부인 서미경씨가 오후 1시33분쯤 모습을 드러냈다.

신 총괄회장은 건강이 우려되는 모습으로 등장해 휠체어를 이용해 법정으로 향했다. 서씨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비교적 당당한 모습이었다. 서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묵묵부답한 채 법정으로 향했다.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서 서씨가 ‘캐스팅보트’로 떠오르자 여론은 그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다.

딸인 신유미씨와 함께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을 6.8% 보유한 것이 검찰 수사 결과 확인됐기 때문이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격인 호텔롯데 지분을 93.8% 가지고 있어 지배구조상 정점에 있는 회사로 꼽힌다. 모녀의 보유지분은 롯데 오너 일가 중 가장 많은 규모다. 따라서 그가 향후 롯데 일가의 경영권 분쟁서 ‘키맨’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미스롯데 출신인 그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36년 만이다. 서씨는 18세이던 1977년 제1회 미스 롯데로 선발돼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는 등 연예계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 돌연 종적을 감췄다. 1983년 신 총괄회장과 사이에 딸 유미씨를 낳았고,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신동주 롯데그룹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수행원들과 1시47분에 포토라인에 섰다. 그는 관련 혐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짧은 소감만 밝힌 후 법정으로 떠났다.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은 1시47분께 등장, 취재진의 질문에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채 법정으로 향했다.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구속 수감돼 다른 경로로 법정에 참석했다.

이날은 롯데 신 회장 3부자가 500여일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자리였다. 그동안 ‘형제의 난’으로 신 회장과 신 전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벌인 터라 서먹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마지막으로 모인 자리는 지난 2015년 11월3일 신 총괄회장의 생일 때였다.

당시 신 총괄회장의 집무실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 모인 3부자는 어색한 조우를 했다. 당시에도 ‘형제의 난’으로 형제 간 우애에 금이 간 상황이었다. 신 회장과 신 전 부회장이 신 총괄회장과 함께 했던 시간은 30~40분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짧았다.

지난해 신 총괄회장의 생일에는 신 전 부회장만 참석해 3부자간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던 터라 이번 만남까지는 500일이 걸렸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뿐이었다. 이날 법정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이들 3부자는 각자 롯데그룹 관련된 비리 혐의를 안고 있다. 신 회장은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권을 서씨 일가 등에게 몰아주는 등 총 774억원의 손해를 회사에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혐의 가지가지
형제의 운명은?
 

신 총괄회장은 858억원의 탈세, 508억원 횡령, 872억원 배임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차명으로 소유한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3%를 신영자(74)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증여하고, 1.6%를 서미경씨 증여하면서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매매로 가장하는 수법으로 세금을 탈루한 것으로 조사됐다.
 

신 전 부회장은 10년간 한국 롯데 계열사 여러 곳에 별다른 등기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별다른 활동없이 391억원 상당의 급여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날 재판정의 모습은 ‘아수라장’이었다. 롯데그룹 내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방청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법정은 치매 증상을 보인 신 총괄회장이 일본어로 고성을 지르면서 상황은 극에 달했다. 재판 시작 20분 후에 입장한 신 총괄회장은 법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니 누고” “와 이라노”라는 말을 반복했다. 재판을 그대로 진행하자 신 총괄회장은 일본어로 “롯데는 100% 내 회산데 누가 기소했냐, 책임자 불러와라”고 큰 목소리로 재판정을 혼란케 했다. 20여분 동안 고성이 이어지자 재판부는 정상적인 재판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신 총괄회장을 퇴정조치했다.

지팡이를 내던지며 횡설수설하는 신 총괄회장의 모습을 보며 피고인석의 신 회장과 신 이사장, 서씨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나 오너 일가는 혐의를 가리는 과정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내용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은 롯데 오너 일가의 모든 인사가 자신의 비리 의혹을 신 총괄회장에 떠넘기는 모습이었다.
 

신 회장 변호인은 “신 총괄회장이 신 회장에게도 월급 통장을 주지 않고 급여만 지급했다”며 “명색이 회장인데 월급 통장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부자 관계가 그렇다(폐쇄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신 총괄회장이 신 전 부회장과 서씨 모녀에게 부당 급여를 지급하고 서씨 모녀와 신 이사장에게 롯데시네마 매점 독점 운영권을 넘겨줄 때도 신 회장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했다.

신 회장 측은 “신 총괄회장이 수도권은 미경이네, 지방은 유미네 주라고 직접 지시했고 자필로 메모지에 주주 명단을 하나씩 정해주기도 했다”고 했다. 가계도까지 슬라이드로 띄우며 신 총괄회장이 가족들의 이권을 직접 챙겼음을 주장했다.

신 회장 측이 신 총괄회장의 지시받고 실행한 인물로 지목한 채정병 전 롯데카드 대표 측 변호인 역시 “신 총괄회장은 채 전 대표에게 매점을 임대하라고 지시하면서 적정 임대료로 제대로 받으라고 했다”며 “채 전 대표는 적법하게 임대료를 정했을 뿐”이라고 전했다.

서씨 측도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신 총괄회장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서씨는 롯데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6월 돌연 일본으로 사라져 많은 추측을 낳은 가운데 이번 재판에 참여해 그의 입에 시선이 쏠렸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경영비리 의혹을 둘러싼 롯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 지난해 6월 일본으로 출국한지 9개월 만이다.


일본행을 택한 서씨는 이후 검찰의 거듭된 소환 요구에도 응하지 않다가 20일 열린 첫 공판기일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씨는 그동안 신 총괄회장과의 사이에 낳은 외동딸 유미씨의 도쿄 자택과 도쿄 인근 별장 등을 오가며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검찰의 재산 몰수 압박에도 귀국하지 않던 서씨가 첫 공판기일에 맞춰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그의 주장에 눈길이 쏠렸다. 그가 내세운 전략 역시 신 회장과 마찬가지로 신 총괄회장에 혐의 떠넘기기였다.

서씨 측 변호인은 “서씨에게 배임의 의도가 있거나 그런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배임 혐의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런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서씨는 ‘수익성 있는 새로운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신 총괄회장에게) 말했을 뿐이며 (사업권을 받는 과정서) 관여한 사실이 일체 없다”며 “영화관의 매점 사업은 임대해선 안 되고 반드시 회사가 직영해야 한다는 검찰의 전제도 잘못됐다”고 강조했다.

장녀인 신영자 전 이사장도 아버지 신 총괄회장에게 혐의를 넘겼다. 신 전 이사장 변호인은 “영화관 매점 임대는 시작부터 유지 관리까지 신 총괄회장의 의사에 따라 이뤄져 신 전 이사장은 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경영권 다툼
각자 셈법은?
 


롯데가의 오너 일가들이 자신의 혐의를 신 총괄회장에 떠넘기자 치열한 법리적인 고민이 있었던 거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일각에선 신 총괄회장이 건강상태 문제로 형 집행이 사실상 어려운 만큼 신 총괄회장이 모든 죄를 안고 가는 형식을 취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신 총괄회장의 나이는 올해 96세다. 건강도 최근 급격히 악화돼 수차례 병원 입원을 했으며, 인지능력에도 이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지난해 롯데수사 당시 신 총괄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택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신 총괄회장이 징역형을 받더라도 형 집행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으로 판단되고 있다. 롯데 총수 일가의 혐의를 신 총괄회장이 안고 가는 형식이 될 경우 징역형에 대한 부분은 대부분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대목이다.

신 총괄회장 자신은 건강을 이유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논리를 펴고 있는 상황이다. 신 총괄 회장의 변호인은 “구체적인 경영 일선서 물러난지 오랜 피고인에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지시 사항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정책본부의 구체적인 판단과 업무 집행 과정서 계열사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신 전 부회장은 법정에서는 아버지 신 총괄회장과 보폭을 맞추는 모습이었지만 법정밖에서는 신 총괄회장의 주식을 압류하는 등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최대한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법정서 신 전 부회장의 변호도 동시에 맡은 신 총괄회장 측 변호인은 “한국과 일본의 그룹 경영 전반에 관여한 신 전 부회장이 그에 상응한 보수를 지급받는 건 당연하고 적법한 일”이라며 “이 사건의 수사 과정서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은 법정 밖에선 신 총괄회장의 건강상태를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최근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주식 지분에 대해 압류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신 전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에 아버지의 악화된 건강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각서 제기됐다. 신 전 부회장은 이같은 비판이 제기되자 “아버지(신 총괄회장)의 상장주식에 대해 현재 강제집행할 의사가 없다”고 해명했다.

신 전 부회장 측은 이날 배포한 입장자료를 통해 “신 회장은 자신의 주식재산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주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롯데 총수 일가는 신 총괄회장의 건강을 둘러싸고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 총괄회장이 롯데를 둘러싼 모든 비리 혐의를 안고 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서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합심한 분위기
법원의 판단은?
 

법정서 자신의 혐의를 소명한 이들은 재판이 끝난 뒤 각기 법원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들 오너 일가가 이번에 진행되는 혐의와 관련돼 다시 한 자리에 모두 모이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한국 기업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재벌 총수 일가의 법정공방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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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