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황제조사’ 논란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3.27 10:43:23
  • 호수 1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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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아직도 ‘극진한’ 대통령 대접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때아닌 ‘황제조사’ 논란이 불거졌다.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소환해 조사하는 과정서 여러 특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자연인이자 피의자 신분인 박 전 대통령에게 지나친 배려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는 국민들의 부실 수사 우려와 버무려져 파장을 낳고 있다. <일요시사>는 일련의 황제조사 논란을 짚어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1일 오전 9시13분 삼성동 자택을 떠나 9시21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했다. 8분이란 짧은 시간이었다. 이는 지나친 경호 덕분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무소속 김종훈(울산 동구)·윤종오(울산 북구) 의원은 공동논평을 통해 “소환길에 중계된 과잉경호·경비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불과 5km 남짓 거리에 수많은 경찰 사이드카와 차량이 동원되고 출근길 교통통제까지 이어졌다”고 비판했다.

과잉 경호

오전 6시경 교대역서 중앙지검까지 경찰버스 30여대가 갓길에 주차돼있었다. 박 전 대통령이 중앙지검에 도착하기 5분 전 헬기 3대가 중앙지검 상공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장에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중앙지검 등 관계기관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포토라인에 섰다.

취재 통제를 의심할 법한 상황도 연출됐다. 현직 사진기자의 전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이 중앙지검에 출석하기 전 청와대 경호실 측이 중앙지검에 법조 출입 언론사만 사진을 촬영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중앙지검 측이 이를 받아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진기자, 특히 비법조 출입기자들이 크게 항의했다. 이에 중앙지검은 기존 계획을 변경, 비법조 출입의 경우 10개 언론사에서 ‘풀단(공동취재)’을 구성하면 받아주겠다고 공지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3개 언론사에만 근접촬영을 허용하고 나머지 7개 언론사는 외곽촬영을 해야 된다는 조건이었다. 포토라인서 7m가량 떨어진 근접촬영에 비해 외곽은 박 전 대통령의 형체만 겨우 확인 가능할 정도로 먼 거리였다.

취재기자의 신분 확인 과정도 필요 이상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지검 입구에선 기자들의 소지품 검문이 이뤄졌다. 신원확인 및 신분증 반납을 거친 기자들은 곧바로 가방 검사, 탐지기 검사 등을 거쳐야만 했다. 또 중앙지검은 취재기자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한 출입증을 배포했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당시 한 촬영기자는 “우리가 범죄자냐. 왜 개인정보를 이렇게 공개하고 난리냐”고 불평하며 번호가 적힌 부분을 보이지 않게 접었다.

보안도 삼엄했다. 중앙지검은 외부인의 청사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특히 중앙지검 서문은 박 전 대통령 소환 전날부터 폐쇄됐다. 서문은 서초역 방향 출입문으로 역사와 가까워 이용자가 많은 곳이다.

박 전 대통령 입장 후 조사가 이뤄지는 1001호 조사실과 1002호 휴게실 등에는 창문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외부의 시선이 차단됐다. 중앙지검은 박 전 대통령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취재진 등 외부인의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

소환길 교통통제…시민 불편은 뒷전
취재통제, 극존칭, 주번노출 등 뒷말


영상녹화를 둘러싼 특혜 논란도 크게 일었다. 중앙지검은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는 장면을 영상녹화하지 않기로 결정해 동영상 기록물로 남지 않게 됐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 중수부 조사를 받을 당시 영상녹화를 한 것과 대비된다. 중앙지검은 “원활한 조사 진행이 더 중요했다”고 해명했지만, 검찰 안팎에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이다.

과정도 석연찮다. 통상 검찰은 피의자에게 영상녹화를 하겠다고 통보한다. 참고인의 경우 반드시 본인 동의가 필요하지만, 피의자는 당사자 의사와 관계없이 검찰이 조사 과정을 녹화할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은 소환 전날 피의자인 박 전 대통령 측에 영상녹화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이에 박 전 대통령 변호인은 부동의 의사를 밝혔다.

변호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데 검찰이 먼저 조사 과정의 영상녹화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길래 부동의했다”며 “박 전 대통령이 영상녹화 시도를 거부한 건 아니다”고 밝혔다. ‘황제조사’를 의심케 한 대목이다.

일각에선 영상녹화를 선제 조건으로 내건 특검이 박 전 대통령과 대면조사에 실패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검찰 측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란 의견도 있다.

조사 당시 검찰이 박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님’이라 호칭한 부분도 도마 위에 올랐다.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승권 중앙지검 1차장은 휴게실서 박 전 대통령을 맞아 대통령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이후 조사에서도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을 대통령님으로 불렀다. 반면 조서에는 박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기재했다.

아직도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잇단 황제조사 논란에 대해 “검찰의 수사방식 중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며 “이미 청와대와 자택 압수수색을 스스로 포기했고 6만쪽에 이르는 특검 자료를 단 며칠 만에 검토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상녹화를 사실상 알아서 생략하고 특별 휴게실 마련 등 이례적인 황제조사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비판했다.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는 “수사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라며 “논란이 없도록 애초에 조사 과정을 영상녹화했어야 했다”고 전했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박근혜정권 만든 29명 흥망사
잘된 사람 한 명도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70년 헌정사에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4년 전 인수위 기간을 거쳐 호기롭게 출범했건만, 각종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수사선상에 오른 사람은 비단 박 전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박근혜정권을 위해 힘써온 사람 중 일부도 각종 혐의로 곧 재판장에 소환될 예정이다. <일요시사>는 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박근혜정권 출범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흥망사를 정리했다.

[구속]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장관은 재판을 앞두고 있다. 안 전 수석은 최순실을 도와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을 주도한 혐의, 조 전 장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 작성을 지시·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박근혜정권 출범 후 ‘경제 책사’ ‘박근혜의 여자’로 불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이젠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뀌었다. 안 전 수석은 인수위 당시 고용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조 전 장관은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을 했다.


[구설]

인수위 대변인이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2013년 5월 대통령 미국 방문을 수행하던 기간 워싱턴DC에서 주미한국대사관 인턴이던 20대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자리서 물러났다.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로 처벌을 면했다. 현재 ‘윤창중칼럼세상’을 운영하며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김용준 전 인수위원장은 박근혜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지 5일 만에 두 아들 병역 문제,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사퇴했다. ‘총리 잔혹사’의 신호탄이었다. 현재 법무법인 넥서스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홍기택 전 경제1분과 위원은 KDB금융그룹·산업은행 회장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리스크담당 부총재를 지냈다. 현재 홍 전 위원은 대우조선해양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현역]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은 인수위 때부터 2016년 11월까지 국민대통합위원장을 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활동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진영 의원은 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낸 후 박근혜정부 초대 보건복지부장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반대해 장관직을 사퇴, 급기야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공천에서 배제됐다. 탈당한 진 의원은 민주당에 입당해 용산에서 당선됐다.

자유한국당 유민봉 의원은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였다. 이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을 거쳐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 12번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옥동석 전 국정기획조정분과 위원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인재개발원은 인사혁신처 소속의 교육기관이다. 옥 전 위원과 함께 국정기획조정분과 위원을 했던 강석훈 전 의원은 청와대 경제수석을 하고 있다. 박효종 전 정무분과 위원은 제3기 방송통신심의위원장으로 발탁됐다.

외교국방통일분과 위원이던 김장수 전 국방부장관은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뒤 주중 한국대사로 임명됐다. 윤병세 전 외교국방통일분과 위원은 현재 외교부장관이다. 경제2분과 간사 이현재 의원은 지난 총선 때 경기 하남시에서 당선됐다.

이승종 전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위원은 제16대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을 거쳐 제2기 지방자치발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대통령 소속 자문위원회다.

최성재 전 고용복지분과 위원은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으로 재직하다 제5대 한국노인인력개발원장을 지내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준정부기관이다.

모철민 전 여성문화분과 위원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거쳐 현재 주프랑스 한국대사로 있다. 김현숙 전 여성문화분과 위원은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을 하고 있다.

[외곽]

장훈 전 정무분과 위원은 인수위 기간이 끝난 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복귀했다. 박흥석 전 경제1분과 위원은 럭키산업 대표이사로 복귀해 활동 중이다. 이혜진 전 법질서·사회안전분과위 간사는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다. 곽병선 전 교육과학분과 위원은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임기가 끝난 후 인천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인수위 당시 19대 국회의원이던 류성걸 전 경제1분과 위원은 바른정당 4·12재보궐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서승환 전 경제2분과 위원은 2015년 3월까지 국토교통부장관을 지내고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로 돌아갔다.

장순흥 전 교육과학분과 위원은 한국원자력안전위원회 전문위원장으로 활동했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창조경제분과 위원을 지냈다. 최근 세계 NGO 컨퍼런스 조직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안상훈 전 고용복지분과 위원은 국무총리 소속 사회보장위원회 민간위원, 대통령 자문 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 민생경제분과위원장을 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글로벌사회공헌단장이다.

임종훈 전 행정실장은 인수위 후 2014년 3월까지 박근혜정부 첫 청와대 민정수석실 민원비서관을 지냈다. 현재 홍익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칩거]

김진선 전 취임준비위원장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서 내려온 과정이 석연찮아 그 배경이 주목받고 있다. 유진룡 전 문체부장관은 최근 특검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김 전 위원장의 사임을 강요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19대 국회의원이던 김상민 전 청년특별위원장은 지난 2016년 11월 정두언·정문헌·이성권 전 의원 등과 함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탈당했다. 앞서 김 전 위원장은 이정현 당시 당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인 바 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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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