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 신화’ 황제가 돌아왔다!

다시 시작된 우즈 신드롬

‘스타’가 있어야 팬들이 모이게 되고 열광하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동안 골프계에는 ‘타이거 우즈’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스캔들로 인해 빛나는 ‘스타’의 자리를 내려놓았던 우즈. 그러나 아직도 우즈가 사용할 클럽이 무엇인지, 우즈가 어떤 대회에 등장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다시 한 번 우즈가 골프계의 ‘별’로 빛나길 기대하는 팬들이 많은 모양이다.

 

통산 79승 위대한 발자취
화려한 복귀…예고된 환호

우즈는 데뷔 42주 만에 세계랭킹 1위에 등극했고 2000년 US오픈과 디오픈, PGA챔피언십, 2001년 마스터스를 연거푸 제패해 메이저 4연승 ‘타이거슬램’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996년 프로 전향 이후 ‘컷 오프’는 불과 15번.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 동안은 단 한 차례도 3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적이 없다. 142개 대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진기록도 있다. 우즈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년 동안 총 1540번의 1m 퍼팅 기회에서 홀에 넣지 못한 것은 딱 3차례. ‘1m 거리는 무조건 넣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퍼팅의 달인이고 쇼트게임에 강했다. 1999~2002년 사이 11개의 메이저에서 7승을 수확했다.

모두 염원한
전설의 귀환

30세 이전에 메이저 10승을 달성한 독보적인 1위. 메이저 최다승(18승)의 주인공 잭 니클라우스는 30세 이전까지 5승을 올리는데 그쳤다. 또한 ‘WGC의 사나이’라 불릴 정도로 월드골프챔피언십(WGC)시리즈 우승컵만 18개. 우즈는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승부사였다. 최종 4라운드를 선두로 나선 45회 가운데 43승을 이끌어 냈다. 우승확률이 무려 95.6%. 2라운드까지 선두였던 33회에서도 28승(84.8%)을 차지했다. 연장전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과 유러피언(EPGA)투어 연장전에서 통산 16승1패다. 1패는 빌리 메이페어(미국)에게 1998년 닛산오픈에서 진 것.

무엇보다도 우즈는 683주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지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프 황제’였다. 2009년 최악의 섹스 스캔들로 ‘골프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던 우즈. 수많은 스폰서가 떠났고, 6년간의 결혼 생활 역시 마침표를 찍었다. 우즈는 ‘휴업’을 선언했고, 섹스 중독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2013년 재기하는 듯 보였지만 예전의 ‘골프 황제’ 자리를 되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렇듯 아직 신통찮은 성적임에도 우즈가 골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역시 대단하다.


지난달 5일 우즈 복귀 무대로 치러진 히어로 월드챌린지의 시청률은 일년 전보다 큰 폭으로 상승했다. 월드챌린지 1라운드 시청률은 0.86%, 2라운드 시청률은 0.45%를 기록, 우즈가 출전하지 않았던 지난해에 비해 각각 190%, 200% 높았다. 우즈는 시청률 대박을 터트리며 흥행사로의 면모를 또 한 번 과시한 것이다. 골프 팬들은 부상 없이 대회를 마친 우즈의 무사귀환 자체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골프매체들도 우즈의 복귀전 성적에 합격점을 줬다. 샷감이 무르익지 않았고 거센 바람이 부는 악조건 속에서 우즈는 나흘 간 24개의 버디로 18명의 출전 선수 중 가장 많은 버디를 기록했다. 특유의 고감도 아이언샷과 퍼트감도 살아났다. 우즈는 경기 후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왔고 다시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라며 “내년도 모든 대회에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뭐 쓰나?
용품도 화제

우즈는 15위에 머물렀지만 부상 없이 월드챌린지 4라운드를 끝낸 것만으로도 오는 4월 열리는 메이저대회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 확률이 높아졌다. 미국의 도박업체 ‘웨스트게이트 슈퍼북’은 우즈의 마스터스 우승 배당률을 20-1로 책정했다.
우즈의 복귀와 함께 그가 사용하는 용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나이키의 골프공을 썼던 우즈는 나이키가 골프용품 생산을 중단하면서 다른 골프 볼을 선택해야 했다.

우즈가 선택한 골프공은 2016년 3월 출시된 브리지스톤의 ‘TOUR B330S’ 모델. 이 제품은 티샷에서 적정한 탄도와 스핀으로 거리를 더 멀리 보내고, 러프와 그린 주변에서 안정된 스핀 성능을 발휘한다. 매트 쿠차를 비롯해 프레드 커플스, 브라이슨 디셈보, 여자골퍼 스테이시 루이스 등이 같은 골프공을 쓰고 있다. 우즈는 브리지스톤과 골프공 후원 계약을 맺으며 공 후원사에 ‘메이드 인 재팬’의 신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즈는 인터뷰에서 “골프하는데 가장 중요한 장비는 공이다”라며 “스핀이 잘 먹고, 강하고 똑바로 날아가는 성능에 놀랐다. 가장 컨트롤하기 쉬운 공이다”라고 말했다.

복귀 후 우즈의 스윙 변화에 대한 관심도 높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공식 홈페이지는 우즈의 스윙이 복귀 전과 비교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분석한 영상을 게재했다. 이 영상은 2015년의 우즈 스윙과 히어로 월드챌린지에 출전한 우즈의 스윙을 비교했다. 먼저 어드레스 자세에서 스탠스가 약간 좁아졌고 양팔의 모양이 과거에는 ‘역 K’ 모양이었다면 현재는 ‘Y’자에 가까운 모양으로 바뀌었다. 과거엔 공이 왼쪽으로 쏠려 있었는데 현재는 거의 중간에 놓여 있다. 백스윙 톱을 보면 과거보다 최근 영상에서 허리 턴이 더 이뤄진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허리 수술 및 재활을 거치면서 허리에 부담이 적어졌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임팩트 때 과거 화면을 보면 왼발 바닥이 살짝 들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임팩트 순간 오른발이 밀어내는 힘이 과거에 훨씬 더 강한 느낌이다. 피니시 자세도 다르다. 과거보다는 역 C자를 그린 것처럼 허리가 크게 휘었지만 지금은 거의 일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즈가 확실히 파워 넘치는 과거 스윙에 비해 보다 안정적이고 힘을 다소 덜 쓰는 방향으로 스윙을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우즈 모든 것이 화제
미국 대통령들도 반색


우즈의 영향력은 미국 대통령과 우즈의 관계에서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플로리다 주 자신의 골프장에서 그 어떤 다른 프로도 아닌 ‘골프 황제’ 우즈와 첫 골프 라운딩을 했다. 다른 동반자 4명과 18홀을 함께 돈 것이다. 트럼프는 2013년 우즈가 트럼프 도랄 골프장에서 열린 월드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 상패를 수여한 인연이 있다. 뿐만 아니라 두바이의 트럼프 골프클럽의 설계도 우즈가 맡아 하고 있다.

우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기념관 단지에 조성될 골프장 설계까지 맡았다. 우즈와 오바마 대통령은 각별한 관계다. 2008년에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즈는 “믿기 힘든 일이다. 오바마는 미국은 물론 다인종을 대표한다. 내 생애 이런 일(유색인종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이 일어날 것을 늘 기대했다”며 “내 아버지는 그토록 염원했던 유색인종 미국 대통령 당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행운아다”라고 격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변화된 것들
쏠리는 시선

코스 설계가로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우즈가 처음으로 맡은 ‘PGA급 코스’ 설계로 3000만 달러(약 356억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되어 흥미를 더하고 있다. 시카고는 개장한 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골프장 ‘잭슨 파크 골프 코스’와 ‘사우스 사이드 골프 코스’를 전장 7300~7600야드의 18홀짜리 정규 코스와 9홀 파3 코스로 구성된 ‘PGA급’ 골프장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를 개최할 수 있는 최고급 골프장으로 변신을 꾀하고, 내년 봄 착공해 2020년께 개장할 계획이다.

이 골프장의 1번 홀 티박스는 대통령 기념관 본관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재개장 이후 이 골프장에서는 PGA투어 플레이오프 시리즈인 BMW 챔피언십 2021 대회 개최도 거론되고 있다. 시카고는 골프장 재설계 비용의 80%를 기금 모금을 통해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즈 역시 기금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계획이다. 나머지 20%는 세금으로 충당될 예정이다.

우즈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대회는 제네시스 오픈이다. 오는 2월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위차한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열리는 제네시스 오픈에 우즈가 출전을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퍼시픽 팰리세이즈는 로스앤젤레스 근방에 있는 소도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즈는 리비에라 골프장과 인연이 깊다. 16살 때 PGA투어 데뷔전을 치른 곳이 바로 리비에라 골프장이다. 우즈는 “데뷔 전을 치른 곳에 다시 돌아와 경기하게 돼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즈는 프로 전향 후 7차례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경기를 치렀지만 우승은 한 번도 없었다. 우즈가 세 번 이상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건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열린 대회뿐이다.

골퍼라면…
우즈와 함께

우즈는 ‘고향’ 팬 앞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 하고 성적도 신통치 않자 2005년을 마지막으로 리비에라 골프장에 아예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린이 까다로운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에서 펄펄 나는 ‘퍼팅의 달인’ 우즈가 리비에라 골프장 그린에서 고전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1년이 넘는 기간에 부상 치료와 재활을 거쳐부활을 꾀하는 우즈가 어쩌면 악몽 같은 기억을 남긴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열리는 대회를 2017년 첫 정규대회로 택하려 한다는 것 자체도 흥미롭다.

제네시스 오픈은 현대자동차가 타이틀 스폰서를 맡은 대회로 2017년부터 10년 동안 개최된다. 대회 운영에는 타이거 우즈 재단이 참가하기 때문에 우즈에게는 여러모로 의미 깊은 대회다. 우즈의 출전으로 입장권 판매 증가와 TV시청률 상승 등 대회 흥행에 대형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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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