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엘시티 비리’ 마산고 마피아의 비밀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1.09 10:28:41
  • 호수 10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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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뒤덮은 검은 브로커 그림자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엘시티(LCT)’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 부산지방법원은 지난달 30일 이우봉 비엔케미칼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검찰은 엘시티 비리의 ‘몸통’인 이영복 청안건설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 및 제3자 뇌물 취득)로 이우봉 대표에게 영장을 청구한 바 있다. 부산 지역 재계는 이우봉 대표를 엘시티 비리의 ‘키맨’으로 지목하고 있다.
 

부산 해운대 엘시티 비리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달 28일, 이우봉 비엔케미칼 대표를 긴급 체포해 조사를 벌였다. 이 대표가 이영복 청안건설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정황을 확인한 검찰은 이 돈이 엘시티 인허가와 관련해 허남식 전 부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갔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했다. 이 대표는 허남식 전 시장의 최측근 인사다.

이영복 비자금
이우봉 역할은?

이 대표와 허 전 시장은 마산고등학교(이하 마고) 동기다. 부산 재계는 허남식 전 시장이 부산시장으로 있던 지난 10년 동안 지역 곳곳에 마고 출신 동문들을 포진시켰다고 주장한다. 마고 출신들이 지역 사업들을 독식, 부당이득을 취해왔다는 것이다.

부산시 관급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선 마고 출신 경영진이 필요하다는 말이 부산 건설업계의 정설로 통할 정도다. 부산시가 1년에 사용하는 예산은 약 12조원에 이른다. 부산 재계는 이를 두고 ‘마고 마피아’라 부른다.

마고 출신인 이우봉 대표는 인적 네트워크의 허브로 분류된다. 허 전 시장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부산 정재계 인사들에게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해왔다. 이 회장도 그중 하나였다. 부산상공회의소(이하 부산상의) 한 내부자 제보에 따르면 이 회장을 조성제 부산상의 회장과 이어준 사람이 바로 이 대표였다.


이 대표와 조 회장, 이 회장 모두와 잘 아는 사이라고 밝힌 내부자는 최근 본지와의 통화에서 “조성제 회장은 이영복 회장과 친분이 없다. 내가 두 사람과 같이 술을 마셔봐서 안다. 두 사람이 친하면 어떻게든 이름이 나오고, 한번은 마주쳤을 것인데 지난 10년 동안 두 사람이 만난 적도 없고 이름이 나온 적도 없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지난해 7월 엘시티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이 회장 구명운동을 펼쳤다. 부산상의 임직원 및 의원들에게 탄원서 서명을 지시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부자는 “한날 부산상의 측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와 엘시티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탄원서를 급하게 내야 한다며 서명을 종용했다”며 ”탄원서 내용이 구구절절했다. 그냥 선처를 바란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A4용지 2장에 이영복 회장의 용비어천가를 적어놨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누구의 지시냐고 물어보니 조성제 회장의 직접 하명이라고 하더라”고 설명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구명?

이는 정식 절차를 무시한 처사였다. 사안에 대한 내부 의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임의원회의도 없었다. 무엇보다 구명하려는 엘시티 시행사 ‘엘시티PFV’는 부산상의 회원사도 아니었다.

이에 대해 내부자는 “부산상의 회원사는 부산에 약 1000개 정도 있다. 이들 회원사는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5000만원까지 회비를 낸다. 그러나 엘시티는 회원사도 아니고 한 번도 회비를 낸 적이 없다. (조성제 회장이) 탄원서 제출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 회장은 120명 중 100명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 이 회장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측에 탄원서를 넘겼다. 그러나 줄곧 반대 의사를 표했던 이들이 복수의 언론사에 이 같은 사실을 제보해 탄원서 제출은 결국 무산됐다.


납득할 수 없는 조 회장의 행동은 결국 이 대표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게 내부자의 주장이다. 이 대표는 이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또한 이 대표는 조 회장의 부산상의 회장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황이 있다.

지난 2011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뒤풀이 자리서 유력 언론사 경영진들과 이 대표 등 여러 명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에 열릴 부산상의 회장 선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동석자의 말에 따르면, 해당 자리에 당시 조 후보와 3선에 도전하던 신정택 부산상의 회장이 시간차를 두고 찾아왔다.
 


조성제·신정택은 팽팽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언론사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향방이 결정될 상황이었다. 당시 술자리서 있었던 일에 대해 동석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유력 언론사 사장과 매우 가까워 보이기에 옆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이우봉 대표라고 하더라. 알고 봤더니 이우봉과 언론사 사장은 서울대 선후배 사이였다. 그 사람(이우봉 대표)이 조성제를 회장으로 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성제가 왔다간 후 사장은 참석자들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른 사람들은 부산상의 선거에 관여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핵심 키맨으로 떠오른 이우봉
이영복 금품 받은 혐의 구속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언론사에서 신정택 회장이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취지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산상의 회장을 두 번만 하겠다던 신정택 회장이 약속을 깨고 3선에 도전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신 회장은 낙마했고 조 회장이 2012년 3월 새로운 부산상의 회장에 올랐다.

당선에 일조한 이 대표는 그해 비엔그룹 고문으로 위촉된다. 조 회장은 비엔그룹의 명예회장이다. 이후 이 대표는 2015년 12월 비엔케미칼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한다. 보은 인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역 재계는 비엔그룹·비엔케미칼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엘시티 비리와 관련해 특혜 대출 의혹을 받고 있는 부산은행이 비엔 측에도 특혜 대출을 해줬다는 것이다.
 


비엔그룹은 지난 2011년 3월, 대선주조를 1630억원에 인수하면서 자금난을 겪기 시작한다. 당시 비엔그룹은 인수금의 10%만 내고 90%에 해당하는 1500억원을 산업은행과 부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 그런데 인수전까지만 해도 100억원대에 가까운 흑자를 기록하던 대선주조가 인수 당해 연도인 2011년부터 100억원대 적자로 돌아선다.

부실기업에
215억 대출

기대 수익에서 200억원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대선그룹은 1500억원을 대출받은 상태였기에 금융 인수 이자비용만 연간 75억원을 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도부터 조선 경기가 하강하기 시작, 유동성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비엔그룹의 중심 업종은 조선기자제다.

이에 비엔그룹이 선택한 카드가 바로 대출이다. 지난 2011년 6월, 조 회장은 계열사 비엔케미칼에 대한 부산은행 대출을 성사시킨다. 당시 부산은행은 총 221억원(장기대출 215억원+단기대출 6억원)을 차입해 줬다.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비엔케미칼 측은 주남공장 토지, 건물과 기계 등 258억원을 담보로 설정했다. 그러나 해당 유형자산은 2015년 공시자료 기준으로 토지 56억원(공시지가 32억원), 건물 96억원, 기계 62억원 등 총 214억원으로 부산은행이 대출해준 금액에 밑돈다.

복수의 전문가들은 비엔케미칼의 재정 상태를 봤을 때 금융권으로부터 도저히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수 기업을 감사했던 부산지역 회계전문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비엔케미칼의) 재무제표를 보면 꽤 장난질이 심하다. 쉽게 말해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회사인데, 장부상으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며 “2013년에 90억원을 주식 증자시켰고, 2014년 자본잠식이 일어난다. 문제는 자본잠식이 일어남에도 현금성 자산은 2014년 2억9000만원서 2015년 9억8000만원으로 약 7억원 가까이 증가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자본잠식 상태인데도 현금은 불어난 것이다. 이건 장부조작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복-조성제 오작교 역할
“당선에 힘써 보은인사 받아”

또 다른 전문가는 이메일로 “(비엔케미칼의) 설립자본은 22억원이었지만, 2014년 비엔철강의 장기대여금을 현물출자 전환해 112억원으로 증자했다”며 “그런데 매년 50% 매출 상장에도 불구하고 매해 30억원가량 마이너스 나고 있다. 현재 누적적자는 120억원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순부채로만 마이너스 252억원으로 사실상 회생 불가한 부실기업이다. 더욱이 비엔케미칼은 93억원 매출에 영업이익이 6000만원에 불과해 당해 연도 10억원이 넘는 이자비용도 충당하지 못하고 있다“며 “완전 자본잠식 상태로 자력에 의한 기업 회생에 전환점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즉 부산은행은 상환을 기대할 수 없는 기업에 대출해 준 셈이다. 금융권이 대출을 해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이 상환 능력이라는 점에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에 대해 부산은행 홍보팀 관계자는 “은행서 특혜 대출이 있을 수 있겠나.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비엔케미칼이 자본잠식 상태인 것은 개별 부서에서 검토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명했다.

현재 부산은행은 상환을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고 있어 더욱 의구심을 낳고 있다. 부산상의와 비엔케미칼 측 해명을 듣기 위해 연락했지만 “담당자가 부재중”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양측에 메모도 남겼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때문에 지역 재계에선 수많은 의혹들이 양산되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조 회장과 이장호 BS금융지주 고문 간의 친분이 대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설이 돌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은 그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조 회장이 이장호 고문의 부산은행장 연임을 도와주지 않아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최근 이장호 고문은 엘시티 비리와 관련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부산지검 특수부(임관혁 부장검사)는 지난 4일, 이장호 고문의 자택과 개인 사무실에 수사관들을 보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양산되는 의혹
친분 때문에?

특수부는 이 고문이 엘시티 이 회장으로부터 금품이나 금전 혜택을 받고 1조7800억원가량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 이뤄지도록 부산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또한 부산은행의 지주사인 BNK금융그룹이 지난 2015년 1월, 엘시티 시행사에 3800억원을 대출해 준 사실도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이 고문을 곧 소환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엘시티 배덕광 혐의는?

검찰이 엘시티 이영복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배덕광 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지검 특수부(임관혁 부장검사)는 이영복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배 의원을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하고 지난 5일 새벽 돌려보냈다.

그러나 배 의원은 이날 검찰 청사를 나서면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지금까지 엘시티 측으로부터 향응과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검찰에) 확실하게 해명했다”고 말했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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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