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드러내는 황교안의 영웅본색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6.12.19 10:40:07
  • 호수 10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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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놀음하더니 용꿈 꾸나”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동안의 자리가 족쇄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관리형 총리에서 승격되자마자 국정을 직접 챙기는 등 파격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마치 차기 대권을 정조준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당초 소극적 범위에서만 권한을 행사할 것이란 대부분의 언론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황교안 체제는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어 이다지도 적극적인 걸까.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기 직전, 그가 소극적 역할에 머물 것이란 언론의 보도는 합리적이었다. 앞선 7명의 권한대행이 그랬었고, 정권의 생명 또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나설 명분도,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황 권한대행은 세간의 예상을 깨고 국정을 직접 챙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국정에 열심인 모습이다.

권한대행이
인사권 행사?

권한대행인 그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사실상 행사했다. 황 권한대행은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임종룡 금융위원장의 유임을 시사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 후 1차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서 “경제 분야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중심의 현재 경제팀이 책임감을 갖고 대내외 리스크 및 경제 현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달라”며 “금융과 외환시장은 변동 요인이 많은 만큼 임종룡 금융위원장을 중심으로 시장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조치를 적기에 취해 달라”고 말했다. 현 경제팀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야권에선 황 권한대행의 유임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국회와의 사전협의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의당 김동철 의원은 황 권한대행의 결정에 대해 “국회와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유 부총리 유임을) 결정한 것은 국민적 우려를 더욱 증폭한다”며 유감을 나타냈다.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와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점은 논란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무엇보다 황 권한대행은 탄핵 절차를 밟고 있는 박 대통령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는 더욱 높은 상황이다.

황 권한대행은 최근 국회 대정부질문 참석 문제로 또 한번 도마 위에 올랐다. 대정부질문 불출석을 알린 것이다. 허원제 청와대 정무수석은 야당 원내대표들을 찾아가 황 권한대행의 불출석을 양해해 달라고 요청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과 국민의당은 허 수석의 요청이 있자 즉시 거부 의사를 밝혔다. 더민주 우상호 원내대표는 “본인이 대통령이 된 것처럼 출석을 안 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흘리고 계신데,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며 “폼 잡지 말고 나와서 본인의 국정구상을 설명하는 장으로 활용하기 바란다. 박 대통령 흉내는 내지 말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흉내
폼 잡지 마”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황 권한대행의 대정부질문 불출석에 대해 “단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우리 국민은 국정 공백에 대해 권한대행의 책임 있는 육성을 듣고 싶어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염려했던 대로 황교안 체제는 역시 박근혜정부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며 “국민의당 주장대로 ‘선 총리, 후 탄핵’이 됐으면 상당한 진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박근혜 아바타’라 불리는 황 권한대행을 박 대통령 탄핵 가결 전 교체했으면 지금과 같은 우려는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황 권한대행은 마치 대통령의 일정에 버금가는 광폭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 학계, 언론계 원로 인사 6명을 초청, 대화를 나눴다. 참석자들은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이영작 전 한양대 교수 등 보수 성향이 강한 인사였다.
 


이날 원로들을 초청한 목적은 임시 통수권자로서 국정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황 권한대행은 편향된 인사들만 초청, 사실상 다양한 조언을 듣길 거부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비선의 얘기만 들었던 박 대통령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유일호·임종룡 유임 사실상 인사권 행사
기다렸다는 듯이…잇달아 파격적인 행보

원로들 입을 통해 나온 얘기 또한 우려를 낳고 있다. 그들은 황 권한대행에게 “트럼프 미국 신임대통령 취임식에 직접 참석해 외국 정상들과 교류하는 방안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권했다. 사실상 ‘정상외교’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원로들의 권유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앞서 원로들이 황 권한대행을 만나기 하루 전 외교부는 “우리 정상의 내년 첫 외교일정은 오는 7월7일 독일서 개최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라며 “상반기 중에 정상급 외빈의 방한 요청도 없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원로들은 황 권한대행에게 정상외교를 권한 것이다.

새누리당 친박(친 박근혜)계는 황 권한대행을 중심으로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를 재편했다. 앞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 러브콜을 보냈던 친박계가 이젠 황 권한대행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일각에선 황 권한대행을 두고 ‘대안’이 아닌 ‘대망론’이라 평할 정도다. 만약 그가 현 시국을 안정시킨다면 강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를 수 있다는 이유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황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오르는 등 친박계 전략이 통하는 결과가 나와 관심을 모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알앤써치’가 무선 100% 방식으로 실시한 12월 2주차(11~12일) 정례조사의 결과를 보면 황 권한대행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포인트 오른 3.6%를 기록했다.
 

이로써 그는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26.5%), 반기문 유엔사무총장(21.9%), 이재명 성남시장(15.5%),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6.9%)에 이은 차기 대선 주자 ‘TOP 5’에 진입했다. 이는 보수층의 기대감이 결집된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황 대망론
친박계 지원

이에 친박계는 측면 지원에 나섰다. ‘신박’ 원유철 전 원내대표는 <불교방송> 라디오와의 인터뷰서 “황 권한대행도 아주 훌륭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라고 본다”고 치켜세웠다. 강성 친박 조원진 최고위원은 “황 권한대행은 야당의 겁박과 횡포에 추호의 흔들림 없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장우 최고위원은 “대통령 행세부터하고 있다”고 말한 더민주 추미애 대표를 비난하며 “황 권한대행의 반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은 대선주자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당초 꼽혔던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중 김 전 대표는 불출마를 선언했고, 남 지사는 탈당했다. 비박계인 유 의원, 오 전 시장, 원 지사는 언제 탈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영입을 추진했던 반 총장은 제3지대서 출마할 것이 유력하다(본지 1092호 ‘반기문-손학규-정진석 3자 막후 연대설’ 기사 참조). 결국 친박계가 내세울 사람은 황 권한대행이 유일한 상황이다.

황 권한대행이 최근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서 여·야·정 협의체 구성 제안에 대해 즉답을 피한 것도 석연찮다.

정 의장은 해당 자리에서 황 권한대행에게 “마침 정치권에서 국정협의체를 제안했는데, 그 협의체를 활용해 민생이나 경제를 살리자는 제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국민의 뜻을 잘 받들어 국정 전반에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만 답했다.

지명직이 국정을?
대의민주 훼손 논란

즉답을 피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고 정치권은 말한다. 이면에 국정 운영을 진두지휘해 자신의 존재감을 높인다는 복안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를 시사하듯 황 권한대행은 정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AI, 경제 침체, 대중국 관계 등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또한 황 권한대행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THAAD) 배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위안부 합의 등에 대한 현안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국정화, 사드, 한·일 협정, 위안부 합의 등에 대한 추진은 황교안 체제가 박근혜정권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야권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이러한 현안들을 노선 변경 없이 추진하겠다는 황교안 체제의 의지로도 읽힌다.
 

이에 야권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더민주 박경미 대변인은 국회 현안브리핑을 통해 “대통령 놀이에 나선 황 권한대행은 지금 용꿈을 꾸나.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황 권한대행이 마치 대통령인 양 행동하고 있다. 황 권한대행이 뻔뻔하게 대통령 코스프레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대행은 대행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황 권한대행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중심이 돼 여권의 대선주자로 발돋움하겠다는 일그러진 ‘영웅본색’으로 읽힌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때의 고건 권한대행과는 사뭇 다른 행보라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고 권한대행이 권력의 뒤에 있었다면, 황 권한대행은 전면에 나서고 있다.

‘박근혜 아바타’
국민의 선택은?

황 권한대행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아닌, 박 대통령에 의해 ‘지명’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모습을 국민들은 쉬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는 헌법 제67조 제1항에 적시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현 시국처럼 민의의 엄중함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라면 반발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만약 황 권한대행이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공직기강비서관, 헌법재판소장·헌법재판관 등에 대한 인사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한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황교안 체제를 향해 실체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우병우 청문회’ 관전포인트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오는 22일 열리는 제5차 청문회에 참석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과연 어떤 질의가 이어질 지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핵심은 우 전 수석의 장모인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과 국정농단의 주인공인 최순실씨와의 관계 규명이다. 앞서 차은택씨 변호인은 지난 2014년 김 회장과 최씨가 골프를 쳤다고 공개했다.

이에 민정수석 발탁 과정에 최씨의 영향력은 없었는지 집중적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또한 우 전 수석이 최씨의 국정농단 전모를 알면서도 고의로 묵인·방조했는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과의 업무 불화설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연결고리는 어떠한지에 대한 집중 추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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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