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 떠난 박세리 ‘과거와 미래’

그녀의 골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 골프의 ‘살아 있는 전설’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가 은퇴했다. 지난달 13일 국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KEB하나은행챔피언십 1라운드가 끝난 직후 팬들과 함께하는 ‘열린 은퇴식’을 거행했다.

살아있는 전설에 찬사 쏟아져
통산상금 1000만달러 넘어서
아시아 최초 명예의 전당 입성

박세리는 지난 7월 US여자오픈 이후 해외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사실상 은퇴였지만 공식 은퇴 무대는 고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선택했다. 박세리는 ‘한국 골프 역사의 개척자’다. 중·고교 시절 이미 국내 아마와 프로 무대를 평정한 그는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든 뒤 통산 25승(메이저 5승)을 수확했다. 통산 상금 1000만달러를 넘어선 한국인 최초의 프로골퍼로 기록된 그는 2007년에 아시아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입성, 세계 여자골프계의 산 역사로 올라섰다.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보여준 ‘맨발 샷’ 투혼은 외환위기로 시름에 잠겨 있던 많은 국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이후 수많은 ‘세리 키즈’가 생겨났고 이들이 진출한 LPGA투어는 ‘K골프의 독무대’가 될 정도로 그가 후배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컸다. 그 중 한 명인 박인비(28·KB금융그룹)는 브라질 리우올림픽 골프 역사상 최초로 ‘골든슬램(커리어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당시 여자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은 박세리였다. 그는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후배들이 해낸 것이 자랑스럽다”며 “나보다 후배들이 더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IMF 잊게 했던
LPGA 명장면
 

은퇴 후 박세리는 후배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박세리는 “한국 선수들의 훈련 여건은 역설적으로 후배들을 강하게 키우는 데 도움은 됐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며 “후배들이 해외 무대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하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박세리는 “후배들이 은퇴 이후 인생에 대해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다”며 “틈틈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정신적 휴식과 재충전이 연습량과 맞물릴 때 더 좋은 성과가 따라오고, 더 많은 기간 투어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세리는 원래 육상 선수였다. 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우기 전 소년체전에서 단거리, 중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튼튼한 하체를 다진 그는 골프에 입문하자마자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대전 갈마중 3학년 때인 1992년에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라일앤드스콧여자오픈을 제패, ‘천재의 등장’을 알렸다. 프로 무대에 뛰어든 1996년에는 12개 대회에서 4승을 쓸어 담아 상금왕에 올랐다.

박세리대회서
떠난 박세리

1997년 LPGA 퀄리파잉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한 박세리의 파란은 LPGA에서도 이어졌다. 1998년 5월 메이저대회 LPGA 챔피언십, 7월 US여자오픈 등 2개 메이저 대회를 잇달아 제패했다. LPGA투어에서 첫 승과 두 번째 우승을 모두 메이저대회로 장식한 선수는 박세리로 당시최초였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유일하게 선수 이름을 내건 대회가 있다. 지난 9월30일부터 사흘간 경기 여주 솔모로CC에서 열렸던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총상금 6억원)이다. 이 대회는 KLPGA투어의 대표적인 자선 대회로도 유명하다.

대회 기간 중 15번 홀(파 4)에서 선수들이 티샷한 공이 페어웨이에 조성된 ‘OK-PAY존’에 들어가면 대회 주최사가 장학기금 300만원을 낸다. 또 선수들은 상금의 10%를 기부한다. 이렇게 조성된 장학 기금은 배정장학재단을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 골퍼들에게 전달된다. 배정장학재단은 지난해부터 중고생을 대상으로 ‘세리키즈 장학생’을 선발, 프로선수가 될 때까지 장학금과 훈련비 등으로 1인당 2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또 해마다 대학생 선수들을 대상으로 20여명의 ‘행복 나눔 스포츠 장학생’을 뽑아 프로골퍼를 향한 꿈을 키워주고 있다.

 

올해 대회에서는 그동안 골프 대회장에서 볼 수 없었던 이색풍경이 펼쳐졌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의 캐디빕에는 이 대회 호스트인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에 대한 감사와 응원 글귀가 적혀 있었다. 캐디빕은 기본적으로 선수 이름과 대회를 주최하는 스폰서 기업의 명칭이나 로고가 적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출전 선수들이 각자 캐디빕에 대선배 박세리에 대한 감사글을 적어 넣은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박세리는 1번홀부터 눈물을 흘렸고 18번홀의 티샷을 마치고 그린으로 걸어올 때는 내내 울었다. 18번홀 그린에서 열린 은퇴식을 끝으로 지난 25년간의 골프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식장은 눈물바다였다. 박세리는 본인은 물론이고 ‘영원한 스승’이자 아버지 박준철 씨, 그리고 ‘세리 키즈’의 후배와 팬들까지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박세리는 “너무 감동적이다. 세계 어느 골프대회에서 이 같은 캐디빕을 볼 수 있겠는가. 후배들의 정성에 내가 더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고 감격했다. 박세리는 특히 “아빠와 긴 포옹을 하면서 아빠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 심장 같은 분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과 똑같이 울고 계셨다”며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성장했고, 친구이자 애인 같은 역할을 해 줬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국골프 알린
진정한 선구자


은퇴식에는 첫날 경기를 마친 후배 동료 선수들을 비롯해 손가락 부상으로 시즌을 접은 박인비(28·KB금융그룹), 야구선수 출신 선동렬(53)과 박찬호(43)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미 은퇴한 뒤 내년 2월 둘째 출산을 앞둔 박지은(37)도 참석했다.박세리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IMF 시절 온 국민에게 힘을 줬던 마지막 ‘전설’이 떠났다. 박찬호와 박세리는 한국 스포츠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린 선구자였다.

이날 박세리의 은퇴식엔 많은 유명 선수들이 자리를 함께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박찬호였다. 박찬호는 “세리가 은퇴한다고 해서 만사를 제치고 왔다”고 말했다. 박찬호와 박세리는 외환 금융위기를 겪던 90년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국민 스포츠 스타였다. 해외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했던 시절 박찬호와 박세리는 오로지 실력으로 자신의 이름과 함께 한국을 알렸다. 박찬호와 박세리를 보고 자란 다음 세대들은 선구자가 닦아 놓은 길을 더욱 넓히고 있는 중이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는 추신수, 박병호, 김현수, 오승환, 류현진, 이대호 등이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리그의 위상을 높이고 있고 LPGA서도 ‘박세리 키즈’들이 뛰어난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박찬호는 “세리에게 ‘너와 난 나무다. 열매였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열린 것이다. 이제는 많은 후배 선수들이 열매가 됐고 사람들이 취향에 걸맞게 즐기고 있다. 이제 그 열매들을 따 먹은 사람들이 또 다른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해야 될 것 같다”고 기뻐했다.

박세리도 “아마 같은 시기였던 것 같다. 9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외국에 나가서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박찬호씨와 저는 시도를 했고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후배들에게 꿈을 키워준 것 같다. 그러면서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선구자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단어 자체도 힘들고 부담스러운 자리다. 다행히 후배들이 있어서 제가 올라갈 수 있었고 박찬호씨도 마찬가지다”고 힘줘 말했다. 선구자들이 심은 풍성한 나무에서 달콤한 열매들이 열린 것이다.

업적 설명하는
명예의 전당

<골프닷컴>은 골프전문 기자들의 방담을 담아 골프계 주요 소식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코너를 싣는다. 최근호에서 복귀를 번복한 타이거 우즈 이야기 등과 더불어 공식 은퇴식을 한 박세리에 관한 분석도 했다. <SI>의 시니어 에디터 마크 고디치는 “크리스티나 김(미국 골프선수)은 박세리에 대해 ‘선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선수는 남녀 통틀어 또 없었다’고 평가했다”며 타 매체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했다.

<SI>의 시니어 라이터 마이클 뱀버거는 “홀오브페이머(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들의 홀오브페이머”라는 한마디로 박세리를 정의했다. 그는 “박세리는 가장 리드믹하고 파워풀한 스윙을 반복했던 선수인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저평가됐다”고 말했다. <SI>의 시니어 라이터 개리 반 시클은 “아놀드 파머가 미국 골프에 한 일을 박세리는 한국 여자골프에 했다”고 평가했다. <SI>의 시니어 라이터 앨런 십넉은 “박세리는 여자 골프의 혁명이었다. 박세리의 은퇴식에서는 대회 중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선수들까지 한마음으로 축복을 보내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골프매거진의 시니어 에디터 조 파소브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그는 “2004년에 한국에서 나온 한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인들은 타이거 우즈가 아니라 박세리의 플레이를 더 보고 싶다고 했다. 많은 걸 말해주는 데이터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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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