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더민주 새리더 추미애

뚝심 있는 여장부 추다르크가 떴다!

[일요시사 안재필 기자 = ‘추다르크’ 추미애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새 대표로 선출됐다. 야당 최초의 영남출신 대표로 지역주의를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추다르크라는 별명은 여당 텃밭인 영남 출신으로 지역감정에 맞서 영남에서 야당 지지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얻어졌다. 뚝심 있는 여장부 추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본다.

지난달 27일, 전당대회를 맞이한 야당에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여당 텃밭의 영남 출신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추미애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지난날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노동조합법 개정 논란이 약점으로 작용했지만 추 대표는 이에 맞서 여장부의 이미지를 더 굳건하게 했다.

세탁소집 둘째 딸
소신 있는 판사로

추 대표는 대구 달성군 출신으로 1958년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2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후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법대에 전액 장학금과 4년 기숙사 사용을 보장받으며 입학했다. 지난 1982년엔 제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5년까지 춘천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를 지냈다. 같은 대학 출신의 서성환 변호사와 결혼해 법조인 부부로 유명세를 탔다.

지난 1986년 춘천지방법원서 근무하던 초년 판사 시절엔 군사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념서적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소신대로 판결해 ‘껄끄러운 판사’ ‘운동권 판사’로 불렸다.

추 대표가 약 10년간 입던 법복을 벗고 정계로 진출한 것은 지난 1995년 새정치국민회 창당을 준비하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출마에 대비해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내세울 인재를 영입 중이었다.


추 대표가 정계 입문을 수락하자 김 전 대통령은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추 대표는 그렇게 야당의 여성 부대변인 1호로 정치에 입문해 이듬해인 지난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서 서울 광진구 을 새정치국민회 후보로 출마한다.

선거를 앞두고 여자는 이기기 힘들다며 외면 받은 일화도 있었다. 추 대표는 돈 안쓰는 선거를 선언하고 오직 진심 하나로 당원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떠났던 당원들은 그녀의 노력에 마음을 열고 돌아왔다. 노력을 증명하듯 선거에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 추 대표는 서울 지역구 소선거구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 됐다.

지역주의 타파할 영남출신 첫 야당 대표
“우선은 정권교체” 당내 계파 청산 숙제

그녀는 자신을 ‘세탁소집 둘째 딸’로 소개하며 “구멍가게 둘째 딸로 태어난 영국의 대처 수상이 영국병을 고쳤듯이 세탁소집 둘째 딸이 한국의 썩은 정치를 세탁하겠다”고 공약했다.

지난 1997년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추 대표는 유세단장을 맡았다. 지역주의가 극심했던 당시 여당 텃밭인 영남 출신이면서 야당인 김 전 대통령의 유세를 했기 때문에 대구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녀의 별명 ‘추다르크’는 이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다.

추 대표는 지난 2002년 제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국민참여운동본부’의 공동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녀는 노 대통령의 행보에 앞장서며 노 전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줬다.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이끌며 희망돼지저금통 사업으로 국민성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 후보 교체를 위한 후보단일화 압박이 있을 때도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김 전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별검사를 수용하는 일이 일어났다. 추 대표와 노 전 대통령이 갈라서는 것은 이 시기부터다. 특검 수용 이후 친노(친 노무현) 의원들은 새천년민주당서 분당, 열린우리당을 만든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추 대표는 분당 사태에도 새천년민주당에 남아야 한다며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의 분당에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DJ 따라 정계 입문
노 정권 때 부침

2004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였던 조순형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총선 개입 발언을 문제 삼아 탄핵을 추진했을 때, 추 대표는 ‘이성계의 3불가론’으로 탄핵에 맞섰다. 그녀의 3불가론은 첫째 탄핵 대신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고, 둘째 탄핵 찬성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지지층이 주도하고 있어 현혹되면 안되며, 셋째 그래도 탄핵을 강행하면 역풍을 맞아 총선에 참패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탄핵을 반대하는 추 대표의 행동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며 당내 비난을 샀다. 그러나 비난을 감수하며 탄핵에 맞선 그녀는 결국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손을 들게 된다.

당시 추 대표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안된다. 숯댕이가 검댕이를 나무랄 수 없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며 노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했다.

그러나 탄핵은 부결됐고, 역풍이 되어 새천년민주당에게 돌아갔다. 추 대표도 탄핵 유탄을 맞았다. 탄핵 찬성이라는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추 대표는 삼보일배를 통해 여론을 돌리려 했지만 국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지난 2004년 17대 총선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에 반해 열린우리당은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17대 국회의원 선거서 9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서 제외된다.

이후 지난 2007년 추 대표는 제 17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정동영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 2008년엔 제 18대 총선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 광진구 을에 재도전 해 51%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된다. 또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다.

당선 이후 삼성그룹 특검 시 삼성그룹 내부 문건에 로비를 받지 않는 정치인으로 분류돼 있다는 말도 돌았다. 그 말을 검증이라도 하듯 추 대표는 삼성그룹 특검서 로비가 있었다는 진술을 한다. 재선을 앞둔 상태에서 선거운동을 한 뒤 사무실에 오니 비서가 삼성에서 골프가방을 주고 갔다는 말을 했다. 그 안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현금이 있었는데 추 대표는 골프가방을 받지 않고 삼성에 돌려줬다.

이후 지난 2010년 추 대표는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생긴 ‘노조법’ 분쟁이 원인이 돼 다시 한번 굴곡을 겪는다. 노조법의 복수노조금지 및 노조전임자급여지급 규정에 대한 개정과 관련돼 비판을 얻었다. 개정과 관련해 여야의 대립이 계속되자 추 대표는 ‘사용자가 동의하는 경우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내놨다.

그녀의 개정안에 야당은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무력화한 노동개악이라며 반발했다. 당 내부에선 추 대표에 대한 징계도 논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여당 의원들과 함께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추 대표는 2개월 당원 자격 정지 징계를 받고 당내 입자도 줄어들었다. 그녀는 수정안을 통과시키며 야당의 출입을 막아 날치기 통과의 오명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각에선 추 대표의 이 결정이 당원이 아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입장서 어쩔 수 없었다는 옹호론도 돌았다.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태서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전임자급여지급이 금지되게 되면 사회적 혼란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는 의견이다. 그들은 추 대표가 반대표를 던진 점을 근거로 삼았다.

이후 추 대표는 2012년 19대 총선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같은 해 있었던 제 18대 대선서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 의원 선거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영향으로 지난해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 전당대회서 당 대표로 선출된 문 의원에 의해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되게 된다.

탄탄한 인지도
5선 여성 의원

당시 새정치는 비노(비 노무현)가 끊임없이 문 대표의 사퇴를 요구해 비노와 친노의 대립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현 국민의당)은 문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최고위원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이후로 비노계의 탈당 행렬이 이어졌으나 추 대표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과거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던 모습과 함께 자신이 속한 조직을 배신하지 않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 덕분인지 올해 있던 20대 총선서도 48%라는 득표율을 얻어 5선 여성의원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고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아 지진부진 했던 17대를 제외하고 도전한 모든 총선서 당선돼 탄탄한 인지도를 증명한 셈이다.
 

총선 이후 추 대표는 지난 7월28일,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활동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했던 두 개의 약점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추 대표는 지난달 12일 CBS라디오 <심현정의 뉴스쇼>서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김상곤 후보가 지난 2004년 고 노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것을 문제 삼자 “진심으로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아무리 사과한다 해도 어디 그게 갚아지겠나? 그 당시 삼보일배로 사죄도 국민께 드렸다”며 “정치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사과했다.

노무현 탄핵·노조법 날치기 통과
치명적인 2개 약점 어떻게 극복?

이어 “그 후로 제가 정치와 절연한 채 멀리 떠나 있을 때 대통령님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장관직을 제의하셨다”며 삼보일배를 한 것에 대해서도 “'무릎 아프지 않냐 괜찮냐. 언제 돌아올 거냐'고 말했다”고 반박했다. 탄핵이 있었지만 노 전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친분을 계속 유지한 것을 부각한 것이다.

이후 2009년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직권상정으로 통과시켜 ‘2개월 당원 정지’ 징계를 받았던 사실이 문제로 거론되자 “다자 협의체에서 논의한 것”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이렇게 추 대표는 자신의 정치적 약점 두 가지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 전당대회서 당 대표 투표 결과가 나왔다. 과반수가 넘는 추 대표의 압도적인 승리로 투표는 마무리됐다. 총 득표율은 54%라는 과반수 확보로 압도적인 결과를 보였고, 현장 대의원 투표는 51% 권리 당원 투표는 61%를 받았다. 당원 여론조사와 국민 여론조사에선 각각 51%와 61%의 압도적인 표를 받았다. 김상곤 후보는 22.08%, 이종걸 후보는 23.89%를 얻는 데 그쳤다.

추 대표가 더민주 당대표로 선출됨에 따라 여야 양쪽서 이례적인 일이 일어난 모양새가 됐다. 신임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야당 텃밭인 호남출신으로 여당의 대표가 됐고, 추 대표는 여당 텃밭인 영남 출신으로 야당의 대표가 돼 지역갈등이 무색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무너졌다는 환호도 나온다.

추 대표는 당 대표 선출 이후 수락연설과 기자회견서 대선주자 이름을 부르며 “모두 함께 공정하고 깨끗한 경선, 정당사에 길이 남을 역동적인 경선을 함께 만들자”며 제안했다. 문재인 대세론에 관해선 “누가 국민에게 희망과 감동을 줄지 민생 처방을 들고 나와 설득할 때 정권교체 가능성이 생긴다”고 언급했다. 이어 “주류와 비주류, 친문과 비문이라는 말이 안 나오도록 하겠다”며 당 대표로서의 각오를 다짐했다.

추 대표는 강한 야당을 기조로 행보에 나섰다. 그녀는 지난달 29일, 서울 현충원에 방문해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 뿐 아니라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까지 참배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3년 연속으로 불참한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과 이명박·박근혜정부 8년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제주 4·3 추념식에 참여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취임 직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반대 당론화를 거론, 시작부터 여당과 충돌이 예상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취임 이틀째인 지난달 30일, 추 대표가 개인소신보다 전체 의원들의 중론을 따르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강한 야당 강조
시작부터 충돌

지난달 31일 예정됐던 전문가 좌담회도 오는 5일로 연기됐다. 일각에선 그간 더민주가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 기조를 뒤집을 명분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이 같은 행보를 보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드 반대 당론을 밀어봤자 득이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anjapil@ilyosisa.co.kr>

 

[추미애 대표는?]

▲1958년 대구 출생 ▲경북여고 ▲한양대 법대 ▲인천·전주지법·광주고법 판사 ▲15·16·18·19·20대 국회의원 ▲제 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노무현대통령 당선자 특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

 

<기사 속 기사> 추미애 남편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 추미애 대표는 남편 서성환 변호사와 7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대학 동기동창이던 두 사람의 인연은 서 변호사의 편지로 변화를 맞이한다. 서 변호사는 추 대표보다 3살 많지만 서 변호사가 3년 늦게 학교에 입학을 해 법대 동기생으로 함께 학교를 다녔다.

연인관계가 된 후 추 대표는 대학을 나서 집까지 걸어가며 공중전화가 나타날 때마다 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연애에 집중하다 보니 사법시험서 낙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 변호사는 사고를 당해 아직까지도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게 됐다.

서 변호사는 호남 출신으로 당시 영남서 호남 사위를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추 대표의 부모님은 서 변호사의 장애와 출신을 보고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서 변호사의 진솔한 모습에 결국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 호남 출신의 남편을 둬 추 대표는 자신을 ‘호남의 며느리’라고 칭하기도 한다.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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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