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궁지 몰린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성공가도 스톱 ‘독종의 몰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재필 기자 = 검찰에서 손꼽히는 특별수사통으로 불리던 우병우 민정수석이 도마에 올랐다. 청와대 안팎에서 우 수석을 거론할 때 ‘실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어서 ‘리틀 김기춘’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 수석의 현재까지의 자취를 짚어봤다.

검사 시절 ‘독종’으로 불린 우병우 수석은 ‘엄친아’ 스타일의 수재였다. 1967년 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1984년 영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력고사서 전국석차 53위의 성적을 냈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 3학년인 1987년 만 20세에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가 됐다. ‘소년등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리틀 김기춘’
대통령 신임

우 수석은 1990년 제 19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검찰에 들어가 검사의 길을 걸었다. 검사 생활 내내 선두권으로 평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무를 뚝심있게 밀어붙이지만 성격이 깐깐하다는 말도 들었다.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우 수석은 서울중앙지검 형사 4부와 6부를 거쳐 대구지검 경주지청, 창원지검 밀양지청, 제주지검 등에서 일했다.

평검사 시절 우 수석의 전적은 화려하다. 그는 조폭 서방파 행동대장과 대전진술파 두목은 물론 이대병원 수련의 임용과정서 돈을 받고 혜택을 준 피부과장을 구속했다.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업체 55곳과 세균폐수를 방출한 중대부속병원 등 굵직한 병원도 적발했다. 1992년엔 대구지검 경주지청 검사로 있으면서 경주대 설립자 민자당 전 김일윤 의원을 학교공금 53억원 횡령으로 기소해 주목받았다.

지난 1999년 법무부 국제법무과를 거처 2001년 서울 동부지청 형사6부에 배치되면서 우 수석은 다시 ‘수사 검사’로 돌아갔다. 이때 영화배급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직배영화사 전 대표와 영화사 대표를 구속했다. 2002년까진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의 특별수사관으로 있었다. 당시 우 수석은 송해운·윤대진 검사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활약했다.


이용호 게이트는 권력형 게이트의 전형, 모범답안이라고 불린다. 이 게이트는 지난 2001년 이용호 G&G그룹 전 회장이 계열사 전환사채 680억원을 횡령하고 보물선 사업 등을 미끼로 주가를 조작해 구속기소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이 전 회장의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이에 검찰에 대한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로 인해 이 전 회장이 김대중정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가 구속되면서 여당, 검찰, 국정원, 금감원, 국회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여기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도 포함돼 있었다. 이용호 게이트 특검은 노무현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가장 성공한 특검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차정일 특검이 우 수석을 두고 “매우 훌륭한 검사”라는 평가를 한 기록도 있다.

‘엄친아 수재’ 20세 사시 최연소 합격
깐깐·묵묵 평검사 시절…전적은 화려

우 수석은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 등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에 접어 들었다. 그는 2002년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고, 2003년엔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 시절 우 수석은 민주당 이정일 전 의원을 상대 후보 도청기 설치 의혹으로 긴급체포하는가 하면, 잠실야구장 광고물 수의계약 뇌물수수로 이상국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카드깡을 통한 강원랜드 도박자금 제공과 메인 카지노 진입도로 보강공사 비리혐의를 받던 김광식 전 강원랜드 대표도 그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우 수석은 삼성그룹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 수사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수사진은 업무상 배임의 공소시효(7년)을 하루 앞두고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을 전격 기소했다. 그들은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직접 관여한 인사들을 표본으로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켰다. 이 아이디어는 우 수석이 낸 것으로 알려졌다.

공직자 재산 NO.1
재벌사위로 유명


지난 2008년 서울중앙지검 금용조세조사2부장 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처사촌 김옥희씨의 공천 청탁 금품수수 사건도 수사했다. 이명박정권이 출범한지 5개월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김옥희씨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미끼로 30억여원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를 받고 그 해 8월 구속됐다. 이후 2009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앙수사1과장이 되면서 ‘박연차 로비’ 사건을 맡게 된다. 여기서 우 수석의 승진 가도는 멈춘다.

박연차 로비는 지난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노건평이 뇌물 수수혐의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정관계에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노 전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대검찰청은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15억을 받았다는 차용증을 확보했다.

이후 2009년 우 수석과 이인규·홍만표가 수사에 투입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조카사위 등이 박 회장으로부터 총 600만달러(약 68억원)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중앙수사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우 수석은 이 사건의 주임검사로 미리 준비한 200여개의 질문으로 노 전 대통령을 심문했다.

그는 윗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소환 조사 후 20여일 뒤 언론에 유출되던 수사과정과 악의적 보도에 시달리던 노 전 대통령은 고향의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그 여파로 임채진 검찰총장이 퇴진하기도 했다. 이후 우 수석은 자리를 옮겨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 수사기획관을 지냈다. 지난 2011년에는 부산저축은행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이후 인천지검 부천지청장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을 거치기도 했다.

당시 김준규 신임 검찰총장과 법무부에서 함께 일하는 등 인연이 있었던 덕분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노 전 대통령을 직접 수사한 것이 약점이 되어 두 번의 검사장 승진에 실패하게 된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 수사에 참여한 것 때문에 검사장 승진이 좌절됐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 2013년 우 수석은 검찰을 떠나게 된다.

우 수석은 고위 공직자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으로도 꼽힌다. 그는 검사 시절부터 ‘재력가 사위’로 알려졌다. 지난해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발탁되며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을 공개했을 때 신고한 재산은 423억3230만원이었다. 지난 3월에는 393억6754만원으로 집계됐다.

우 수석의 장인은 고 이상달 기흥CC 및 정강중기·건설 회장이다. 이 회장은 4명의 딸을 뒀는데, 이 중 한명이 우 수석과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우 수석이 20대 새내기 검사 시절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지난 2008년 사망했고 그의 재산은 부인과 4명의 딸들이 물려받았다. 그의 부인은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 주식을 2200주(자본금의 20%)를 보유하고 있다. (주)에스디엔제이홀딩스는 현재 기흥 CC를 운영하고 있는 (주)삼남개발의 모회사로 자산총액은 토지를 포함해 1967억원에 이른다.

우 수석의 재산은 지난해 기준으로 본인과 부인 명의 예금 183억2077만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아파트 등 건물 66억8651만원, 사인간 채권 165억8051만원 등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그의 검사장 탈락은 노 전 대통령 수사보다 ‘너무 많은 재산’이 문제였다는 견해도 있다. 검사가 재산까지 많다면 사회에서 질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강직했는데…
먹구름 낀 앞날


두 차례 승진에서 떨어지며 검찰을 떠났던 우 수석은 박근혜 정권 2년차인 지난 2014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로 새 출사표를 냈다. 그는 민정수석실의 민정비서관으로 근무하며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리틀 김기춘'이라고 불린 것도 이 시점부터다.
 

청와대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우 수석은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 등 까다로운 일들을 무난하게 마무리하면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높은 신임을 얻는다. 상관인 김영한 전 민정수석을 통하지 않고 김 전 실장에게 직접보고를 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에 김 전 수석은 사석에서 “재임 7개월 동안 제대로 박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김 전 수석은 ‘정윤회 문건’ 유출자를 회유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청와대 문건 유출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지난해 1월 ‘항명사태’를 일으키며 사의를 표명한다. 일각에선 우 수석이 김 전 실장에게 직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생긴 갈등이 사의의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민정비서관 시절 이미 우 수석은 민정수석실 파견 인원의 상당수를 교체하는 데 앞장서는 등 실 내의 권한이 컸다는 말도 전해진다. 당시 한 청와대 관계자는 “조직을 다잡고 일을 밀어붙이는 기질 면에서 김기춘과 우병우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다”고 했다.

김 전 수석의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우 수석은 청와대에 들어간 지 8개월 만에 민정수석이 됐다. 노무현정부 시절 전해철 민정수석(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같이 40대에 민정수석에 오르는 기록을 세운 셈이다. 동급의 자리인 법무부장관으로 당시 황교안 국무총리가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우 수석과 열 살 정도 차이가 난다. 이 같은 초고속 승진도 흔치 않다.

‘뒤 구린’ 굵직한 사건들
알고 보니 수백억 ‘갑부’


민정수석의 자리는 무겁다. 민정이라는 글자 그대로 민심의 동향, 국민들의 여론을 파악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을 주업무로 삼는다. 국정의 모든 부분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공직사회 감찰과 기강 확립 등으로 청와대 업무 대부분에 관여하니 정치 등 모든 면에서 민정수석이 연관되지 않은 일이 없는 셈이다. 일도 많고 정보도 많이 얻다보니 민정수석의 자리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뇌물수수 등의 혐의나 업무상 실수로 책임지고 불명예 퇴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근혜정권에 들어 민정수석의 자리는 3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우 수석은 검찰 시절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 잡히면 과도하게 앞뒤 안가리고 수사를 한다” “너무 직선적인 성격으로 배려심이 없다”는 평가를 통해 타협이 없는 강직함과 배타적인 이미지를 갖게 됐다. 평검사 시절부터 그는 외압과 로비에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각에선 그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 2부의 부부장검사를 지내고 대구지방검찰청 특수부장에 있던 지난 2003∼2004년을 최고로 꼽는다. 서울중앙지검이 국내 모 대기업 수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이 기업은 부장검사부터 평검사까지 모든 인맥을 찾아 로비할 사람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유독 우 수석만 수사 중 기업 측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다.

대구지검에서는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광고 비리 사건을 꼽는다. 지역에서 상당한 힘을 자랑하던 한나라당 전 강신성일 의원과 열린우리당 배기선 전 의원을 수사하면서 쏟아진 온갖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대구지검 특수부는 결국 두 사람을 소환조사했다. 이로 인해 대구지검에서는 특수부의 전성기가 열렸다는 평가도 받았다.

‘최연소 사시 합격자’ ‘40대 민정수석’ 등 화려하고 성공적인 타이틀을 달고 있는 우 수석은 최근 화제의 주역이 됐다. 게임회사 넥슨에 부탁해 처가의 부동산을 매입시켰는지 모른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의혹
무너질 위기

의혹의 핵심은 장인이 물려준 강남역 부근 1300억원대 부동산을 상속세 때문에 매물로 내놓았으나 매입자가 나오지 않아 세금 부담이 가중되던 와중 이를 넥슨이 매입해줬다는 것. 이 때 넥슨은 당시 공시지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매입했다고 한다. 평소 강직하고 성실한 이미지로 청와대의 젊은 실세가 된 우 수석이지만 이번 일로 그의 승승장구에 먹구름이 꼈다.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anjapil@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민정수석실 굴욕사

박근혜정권 민정수석실은 ‘수난’을 겪고 있다. 3년간 3명의 민정수석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현 정권 초기 곽상도 민정수석은 장관 후보자들의 낙마 등 연이은 인사 검증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 2013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뒤를 이어 홍경식 전 민정수석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무총리 후보자 2명의 낙마에 책임을 지고 임명 10개월 만에 교체됐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전임자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임명 7개월 만에 퇴진했다.

김 전 수석은 전임자들과 다르게 청와대에 ‘항명사태’를 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으로 청와대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라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사표를 냈다.

김 전 수석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문건 유출 사건 이후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의 출석 여부가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정치 공세”라고 주장하며 출석 지시를 거부하기도 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