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물 만들기’ 나선 박(朴)의 남자들 <집중분석>

공주님 ‘용상’은 우리가 만든다


국제전략연구소(GSI)는 이명박 대통령의 ‘두뇌집단’으로 한반도 대운하 등 대표 공약의 산파 역할을 했다. 이곳 출신들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요직에 진출했다. 초대 대통령실장이 된 류우익 서울대 교수, ‘왕의 남자’로 불리던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비핵개방 3000’ 창시자인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김영우 의원도 GSI 출신이다. 한편 ‘6인회의’는 지난 대선 때 이 대통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였다. 친형인 이상득 의원, 박희태 국회의장, 김덕룡 전 국민통합특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이재오 특임장관이 그 멤버다. 이 대통령의 또 다른 싱크탱크였던 바른정책연구원(BPI)은 백용호 대통령정책실장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2007년 경선 패배 교훈 ‘출범 늦었다’ ‘이슈 빼앗겼다’
경선 포섭용 ‘선제적 시작’, 대권 도전용 ‘복지 올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불과 8개월 앞둔 시점에 당시 박 전 대표 캠프 상황실장인 최경환 의원(현 지식경제부 장관)에게 대선 캠프를 구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캠프 개소식은 2007년 1월3일이 돼서야 마쳤다. 그 후 정책자문단을 발표하기 시작해 대선을 350여일 앞둔 시점에서 외교안보 분야 자문단 10여 명을 처음 공개했다.

‘선제적 정책행보’
2년 앞두고 싱크탱크 출범

이후 순차적으로 자문교수단을 공개하면서 다소 급조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출범이 늦어 주요 이슈에 대한 선점 또한 늦었다. 경선 기간 내내 ‘콘텐트 부족’이란 비판에 시달렸다. 특히 ‘경제’와 ‘안보’ 분야 이슈를 선점 당했다. 박 전 대표가 경선에서 석패하자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 “준비가 너무 늦었고, 주요 이슈를 빼앗겼다”라는 반성이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4년여 흐른 2010년 12월27일. 박 전 대표의 ‘싱크탱크’ 격인 ‘국가미래연구원’(원장 김광두 서강대 교수)이 출범했다. 18대 대선을 720여일 앞둔 시점이다. 지난 경선 때보다 1년 가량 앞당겼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대선을 2년여 앞둔 시점에서 ‘안국포럼’을 출범시켰다. 2007년 당내 예비 경선 당시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에게 초반 기선을 제압당한 경험이 약이 됐다. 경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은 박 전 대표는 경제·외교안보 등 15개 분야에서 발기인만 78명이나 되는 매머드급 싱크탱크를 만들었다. 이에 앞서 박 전 대표는 지난 12월20일 ‘사회보장법 전부 개정안 공청회’를 통해 복지 관련 윤곽을 제시하는 등 ‘선제적 정책행보’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3년간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내준 적이 없고 현재 다른 예비주자들보다 지지율에서 20% 가량 앞서 있다. 한 측근 의원은 “박 전 대표가 대중성에서 다른 후보들을 압도하는 만큼 국가운영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통해 지지율을 더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라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박 전 대표 측은 이런 세간의 평가에 “정책 일정을 대선 일정과 동일시하지 말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경제 교사’로 알려진 이한구 의원은 한 라디오 방송과의 전화 통화에서 “대선용 싱크탱크가 아닌 네트워크”라면서 “전문가들이 자기 전문 지식을 컨트리뷰션(제시)해서 서로 간 영향을 미쳐 결과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박 전 대표의 거침없는 움직임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한나라당 내 친박계 의원들조차 “박 전 대표의 최근 행보는 파격적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이미 대선 주자로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낸 만큼 이제 정치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며 “숨기거나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게 오히려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미래연구원의 발기인 총회가 열린 지난 12월2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그랜드볼룸의 헤드 테이블엔 한나라당 박 전 대표를 비롯해 이한구 의원, 김광두 서강대 교수, 최성재 서울대 교수, 조대환 변호사, 황부영 브랜다임 앤 파트너스 대표가 동석했다. 박 전 대표는 축사에서 “훌륭한 전문가들이 모였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난제를 극복하고, 우리나라를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드는 대업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며 “앞으로 더 많은 분이 이 모임에 참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총회에서 김광두 교수는 국가미래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선정됐다. 김 교수는 인사말에서 “통섭(通涉)의 시각에서 문제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각계 인사들이 모이게 됐다”며 “박 전 대표가 공부 모임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해와 회원으로 모시게 됐다. 박 전 대표도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월 5만 원의 회비를 내는 회원일 뿐”이라고 말했다.

싱크탱크 79% ‘학자’
전략만 있고 전술은 없다?

연구원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근혜 인맥’은 박 전 대표를 포함 학계 정계 재계 법조계 등 78명이다. 79%(62명)가 대학교수(강사포함)·연구원 등 학자들이다. 나머지는 전직 관료, 기업인, 변호사, 의학박사 등이다. 서강대 출신이 7명으로, 서울대 출신 7명과 더불어 최다였다. 현역 의원은 경제통인 3선의 이한구 의원이 유일했다. 연구원은 서울 마포구의 한 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했고 내년 초 사단법인 신고를 마치는 대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발기인 중 유일한 현역 정치인인 이 의원은 2004년 박 전 대표가 당 대표였을 당시 정책위의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초부터 정기적으로 박 전 대표에게 경제와 복지 분야 조언을 했고, 박 전 대표가 국회 상임위를 재정위로 옮기면서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고 한다. 현안 관련 리포트도 박 전 대표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 의원은 박 전 대표의 ‘경제 대변인’ 역할도 겸하고 있다. 최근 진보 진영에서 불거진 박 전 대표의 ‘한국식 복지’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껍데기조차 보지 않고 그냥 비판한 거 같다. 그런 비평을 충분히 잠재울 수 있도록 세부계획이 준비돼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과 더불어 이번 복지 공청회와 국가미래연구원 출범을 통해 화려하게 전면으로 부상한 인물들이 있다. 이른바 ‘스터디 그룹 5인방’이다.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인 김광두(서강대)교수와, 신세돈(숙명여대), 김영세(연세대), 안종범(성균관대), 최외출(영남대)교수가 바로 그들이다. 출범식 직전 김 원장은 기자들과 간이 인터뷰 형식을 빌어 연구원의 성격을 브리핑 했다. 그는 언론과의 접촉이 자연스러웠고 주도적이었으며 달변이었다. 또한 그는 발기인 중 유일한 현역 의원인 이한구 의원과 친구이기도 하다. 마음 맞는 교수들의 참여도 그가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신세돈 교수는 행사 전 행사장 입구에 직접 나와 박 전 대표를 기다렸다. 행사장에 유일하게 있던 화환은 한나라당 심재철 정책위의장에게서 온 것이었다. 심 의장은 “복지 예산 계획이 없어 솔직하지 못하다”며 행사 3일전 ‘박근혜 복지’에 대해 비판을 한 바 있다.
 
기자가 신 교수에게 “심 의장이 보낸 화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좋은 취지에서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곁에서 본 신 교수의 첫 인상은 다소 수줍어하는 듯 보였으나 할 말은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친박계 이혜훈 의원의 남편으로 알려진 김영세 교수는 관찰 결과 세련된 언변과 자연스러운 손동작이 눈에 띄었다. 입가에 웃음을 견지한 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정연하게 주변 인물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했다. 한편 출범식 당일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름표를 반드시 패용해야 됐다. 지인의 이름표를 잰걸음으로 가져다 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안종범 교수다. 상당히 활동적으로 움직였으며, 지인과의 대화를 화장실에서 계속 이어갈 정도로 소탈하며 집중력이 높아 보였다. 아쉽게도 영남대 최외출 교수의 움직임은 포착하지 못했다.

최근 대두된 주변 그룹들과 별개로 지난 2007년 경선 이전부터 줄곧 박 전 대표를 도왔던 인물군도 있다. 홍사덕 의원,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허태열 국회 정무위원장, 서병수 최고위원, 유승민 의원,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한선교, 이정현 의원 등이다. 또한 외곽에서 박 전 대표를 지원하는 인물들도 있다. 남덕우 전 총리, 김종인 전 의원, 김용환, 김용갑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서청원 전 미래희망연대 대표, 김기춘 전 의원, 강신욱 전 대법관 등이다.

5년전 MB 안국포럼 격
5인방 활동도 각양각색

‘친박 좌장’이던 김무성 원내대표가 이탈한 뒤 내부에서는 좌장 자리를 두고 얘기가 많았다. 중진의 홍사덕 의원, 친박 몫 최고위원을 지낸 허태열 의원, 현 최고위원인 서병수 의원 등이 거명되기도 했다. 이 중 국회부의장을 지낸 6선 의원 출신의 홍사덕 의원은 서청원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된 상황에서 친박의 큰 형님 역할을 했다. 여전히 박 전 대표와의 관계는 매끄럽다.

2007년 대선 예비 경선 당시 캠프 상황실장을 역임한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도 대표적 박 전 대표 측 인사다. 최 장관의 임명 당시 ‘친박 달래기’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박 전 대표의 측근 중 측근이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직전 발생한 박 전 대표의 피습사건의 현장과 병상 생활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이는 당시 비서실장인 유정복 의원(현 농림부 장관)이었다. 그는 자타공인 박 전 대표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오랜기간 박 전 대표를 최단 거리에서 보필했다. 박 전 대표측 인사들은 유 장관의 입각에 따른 ‘공백’을 걱정하기도 했다.

‘한국형 복지’ 공청회 스타, 새롭게 떠오른 ‘스터디 5인방’
‘구관이 명관’ 오래도록 자기 자리 지키는 친박 인사는?

박 전 대표와 서강대 동문인 ‘서강 라인’ 서병수 최고위원도 박 전 대표의 든든한 우군이다. 최근 각종 현안 관련 ‘친박’ 대표주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승민 의원도 빼놓을 수 없는 박 전 대표 라인이다. 박 전 대표측 대표적 책략가인 유 의원은 지난 2007년 대선 예비 경선 당시 캠프 정책총괄단장을 맡았다. 박 전 대표 비서실장 시절 정무·기획·연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박 전 대표를 보필하기도 했다.


한선교 의원은 지난해 12월 박 전 대표의 ‘한국형 복지’ 관련 국회 공청회 행사 당시 말끔하게 사회를 봤다. 한 의원 역시 지난 2007년 경선 당시부터 박 전 대표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현안 관련 박 전 대표의 상대 진영과 공방을 벌이는 것 또한 그의 몫이다. 공식적인 ‘박근혜의 입’은 여전히 이정현 의원이다. 2007년 대선 예비 경선 캠프 대변인을 지낸 이후 인연이 쭉 이어졌다. 언론과의 접촉 빈도가 많지 않은 박 전 대표이기에 지금도 주요 사안이 발생할 때 이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의중을 기자들에게 직접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그를 항상 박 전 대표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이라는 호칭을 단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지난 12월2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은사인 남덕우 전 총리가 직접 박 전 대표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서강대 교수 출신인 남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2002년부터 약 2년간 박 전 대표의 후원회장도 맡았다. 김종인 전 의원도 박 전 대표 ‘경제 가정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 전 의원도 서강대 교수 출신으로 박 전 대표가 소득세 추가 감세 철회 정책을 세우도록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김 전 의원은 정운찬 전 총리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의원이 박 전 대표와 정 전 총리 사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지도 관심거리다.

김용환, 김용갑, 김기춘 전 의원 등도 박 전 대표 고문 그룹이다. 박 전 대표는 이들과 가끔씩 점심 식사를 하며 조언을 듣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충청 출신인 김용환 전 의원은 특히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는 데 상당한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관이 명관’ 오랜 측근
‘묵묵한’ 원로 자문그룹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최근 가석방된 서청원 전 미래희망연대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한 6선 의원 출신이다. 서 전 대표는 출감 후 그를 기다리던 지지자 2000여 명에게 “박 전 대표가 ‘한국형 복지’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든든했다”며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차기 대선에서 박 전 대표를 지원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주로 박 전 대표에게 정무적 판단과 관련된 조언을 해준다. 또 자신의 사조직인 ‘청산회’를 통해 박 전 대표의 지지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신욱 전 대법관도 눈에 띈다. 그는 검찰 출신으로 서울고검장과 대법관을 역임했고 2007년 예비경선 당시 박 전 대표 캠프 법률특보단장을 지냈다. 당시 캠프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았던 김기춘 전 의원이 검찰 후배인 강 전 대법관을 박 전 대표에게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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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