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친일 행적’ 김무성 부친 동상 추적

꽁꽁 감춰놓고 “보여줄 수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한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고 친일과 식민지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친일에 대한 대가로 누렸던 지위와 권력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면서 후손에 의해 친일행적이 부인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그런 경우다.  
 

김용주(1905∼1985, 창시명 金田龍周, 가네다 류슈)의 ‘친일 행적’이 속속 발굴되는 가운데, 김용주의 청동 전신상 등 각종 ‘찬양시설’이 광주 전방공장과 서울 안암동 용문고등학교 등지에 있는 것을 <일요시사>가 단독으로 확인했다.

전범기업 자리
1986년 세워져

전남 광주의 전방(구 전남방직) 공장 내에 있는 김용주의 동상은 비문으로 볼 때, 김씨의 사후 1년 뒤인 1986년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동상은 전방공장 정문 입구 옆 넓은 잔디밭에 위치해 있는 대형 전신상이다. 해당 동상에 대해 광주시민들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아 그동안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해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방은 1935년 전범기업 가네보(鐘淵)공업의 전남공장이 그 모태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놓고 간 공장설비를 미군정이 인수했다가 1953년 ‘적산’(적의 재산이라는 의미)으로 김형남(후에 숭실대 초대총장)과 김용주가 함께 불하받은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엔지니어였던 김형남이 자본을 가진 김용주에게 방직공장을 인수하도록 설득한 것이다. 1961년 8월 두 사람은 이 적산 공장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분할해 나눠가졌다.

일제강점기 가네보 공장은 평균 연령 12.8세에 불과한 어린 여공들이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곳이었다. 작업반장의 폭언과 폭행, 굶주림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 했고 성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해방 후에도 방직공장은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하에서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일하는 작업장으로 악명 높았다.


현재 전방의 명예회장은 김창성(84)씨로 김무성 대표의 큰 형이다. 광주 전방공장은 현재는 가동되지 않고 있다. 중고자동차 매매단지와 대형 물류센터가 임차해 있다.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지역의 시민단체 회원 및 학생들이 광주 내 일제강점기 유적을 답사하면서 공장 정문 안쪽에 조성돼 있는 동상을 보기 위해 공장을 방문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불과 2∼3분 사이에 안에서 전방 유니폼을 입은 남자 8명이 나와 일행을 가로막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단체 관계자는 “연락을 받은 듯 갑자기 남자들이 뛰쳐나왔다. ‘나가라’며 우리 일행을 밀쳤다. ‘경찰을 불러라’ ‘사진촬영을 하지 마라’면서 실랑이를 벌였다”고 밝혔다. 일행 중 한 명이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기행을 다닌다. 동상이 있어서 보러왔다”고 양해를 구하자 “안 된다. 돌아가라”며 강하게 제지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로 안에 가동되는 공장은 없고 담양 등 타 지역으로 이전해갔다. 유통센터와 중고자동차 매매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일 뿐인데 삼엄하더라”고 덧붙였다. 
 

현장엔 역사해설사, 학생들과 교사, 해당 시민단체의 성인 회원 등이 있었다. 다음날인 15일, 김 대표는 부친의 전기 <강을 건너는 산>을 발표했다. 평소에도 김씨의 동상 앞 잔디밭에 서 있으면 전방직원들이 나와 사진촬영을 저지하고, 카메라를 뺏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 논란이 거세지면서 전방 측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용주 전신상 광주 전방공장 존재
지역 시민단체 방문했다가 문전박대

김용주 찬양시설은 포항 영흥초등학교와 서울 용문고등학교에도 존재한다. 영흥초등학교는 1911년 설립됐으나, 1936년 3월 김용주가 인수해 설립자 변경 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영흥초는 지난 2011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김용주의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 자리엔 설립자 가족을 대표해 김 대표가 참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가 <아사히신문> 조선판에 게재된 김용주의 전투비행기 헌납 기명광고를 새롭게 발굴해 기자회견을 하는 등 친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말, 김 대표가 영흥초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 대표의 큰누나이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모친인 김문희(87)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용문학원에도 김용주의 대형 초상화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안암동 소재의 용문학원은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를 함께 운영 중인 학교법인이다.

1986년 용문고 본관 뒷편에 ‘해촌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인 강당을 준공했는데, 이 강당 내 무대 우측에 김용주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해촌은 김용주의 호다.

보러 갔는데… 
직원들이 막아

김용주의 친일 행적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김씨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수산업, 해운업, 무역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김씨의 친일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면모를 띤다.

김씨는 경상북도 도회의원,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사업부장 등을 역임했다. 배우자 방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고모이며, <친일인명사전> 등 각종 친일파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되는 호남 출신 갑부 현준호(1889∼1950)와 사돈을 맺었다.

해방 후엔 대한해운공사 사장, 주일본공사, 전남방직 사장 겸 신한제분 회장, 민주당 국회의원, 신한해운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회장, 동해제강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9월17일 연구소 측은 기자회견을 열어 김용주의 친일행위에 대한 새로운 증거자료를 공개한 바 있다. 연구소는 김용주가 고위직에 있는 동안 ‘애국기 헌납운동’을 선전했다면서 <아사히신문> 국내판 1944년 7월9일자에 실린 일본어 기명 광고를 공개했다. 김용주는 또 같은 신문 국내판 1943년 9월8일자에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이라는 내용의 일본어 기명 광고를 실어 조선청년들의 징병제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연구소 측은 기자회견에 앞서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친일행위자의 후손이나 연고자가 ①친일인물에 대한 기념사업을 하는 경우 ②친일행적을 부인 또는 왜곡하는 경우 ③친일청산운동을 방해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 측의 대응이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 연구소의 판단이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김용주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김 대표가 공당의 대표로서, 공공연한 대권 행보자로서 선친의 친일행적과 관련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그간의 행태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27일에 반박 보도자료를 내고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를 근거로 부친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조선인 학교를 세우는 등 애국자였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치안유지법 위반이 사실이라면 도의원에 선출될 수 없다. 동아·조선일보에 실린 인사는 동명이인이다. 김용주가 1920년대에 문화운동에 관계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경력이 1940년대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지난 2011년 일본정부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조선인 공탁기록’에도 김용주의 친일행위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영흥초·용문고에도…
대형 흉상·초상화 전시 
 

기록에 따르면, 일제 말기, 일본정부가 전쟁 수행을 독려하기 위해 전투기, 조선, 군수물자 등을 생산한 전범기업 주식을 일본과 조선의 유력자를 대상으로 판매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일제의 전쟁 승리를 의심치 않았던 친일파들이 투자 목적과 충성심을 앞세워 가장 적극적으로 매입했다.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총 51만7504엔어치를 매입, 최고액을 기록했다. 명성황후 친척 민규식이 46만8200엔, 김용주의 사돈인 현준호가 9만3425엔으로 그 다음을 이었다.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도 전범기업 니혼고주파중공업의 주식 7500엔을 매입한 것이 확인됐다. 이외에도 1204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호남은행 현준호 일가를 비롯해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경성방직(현 경방) 및 삼양사(현 삼양그룹) 설립자 김연수, 배우 이지아씨의 조부인 김순흥, 대한국민항공사(대한항공 전신) 설립자 신용욱, 명성황후 민씨 일족, 유명 사립대 설립자 등 현재 확인 가능한 500여명 중 사회 유력자 집안이 대거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투자한 전범기업들은 2차 대전 당시 조선인 동포들을 끌고가 강제노역시키던 기업들로, 당시에도 조선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서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친일파 동상이 철거되고 일본식 지명이 변경되거나 친일파 묘가 이장됐다. 김 대표 본인에게 연좌제를 지울 수는 없으나 김용주의 친일행적이 명백한 만큼 공공재인 학교와 주주들이 주인인 주식회사 내에 있는 찬양시설은 철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계의 대체적 반응이다. 앞으로 광주전남지역의 시민단체는 김용주의 동상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동상 철거를 적극적으로 의제화 해 나갈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행적 확인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사무국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던 인사들의 찬양시설이 전국 도처에 세워져 있다”며 “후세에 좀더 투명한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선 이러한 친일 찬양시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시설이 어떻게 현재까지 서 있게 됐는지 안내문이나 단죄비를 세워서 올바른 역사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친일파 찬양시설 철거 사례      

‘일제잔재지우기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친일파 찬양시설이 철거되는 예도 부쩍 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소재 광신고교는 지난 2001년 12월 이 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친일파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했다.

박흥식의 아들 박병석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음에도 동문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을 빌려 동상이 철거됐다. 이에 앞서 민족문제연구소 관악동작지부 회원 등은 학교 앞에서 박흥식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수개월 동안 시위를 벌였다. 학교 측은 고심 끝에 동상을 철거키로 결정하고 이같은 사실을 연구소 측에 알린 후 그해 말 철거했다.

지난 2000년 7월엔 서울 중앙여고가 일제 말기 제자를 정신대에 내보낸 황신덕씨의 동상을 철거한 바 있다. 지난 2005년 전북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에 걸렸던 수당문 현판이 철거됐다. 수당은 경성방직(현 경방) 사장 김연수의 호로, 경기장 건립 당시 김연수가 기부금을 내면서 현판이 걸리게 됐다. 경방은 조선 농민에게 헐값에 사들인 면화로 조선주둔군의 군복 천을 생산해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1939년엔 만주국 심양 근처 소가둔에 남만방적을 설립, 1943년부터 ‘관동군’ 군복 천 생산을 개시했다.    

광주에선 시민단체들의 오랜 문제제기를 통해 광주중외공원에 세워져 있던 친일인사 안용백의 흉상을 지난 2013년에 철거했다. 안용백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면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사설을 쓰고 창씨개명에 앞장선 인물이다. 지난 2014년엔 광주 서구 백일로가 ‘학생독립로’로 명칭이 변경됐다. 지난 삼일절엔 백일초등학교가 성진초등학교로 개명됐다.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을 딴 지명과 학교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2013년엔 강원도 춘천과 정선군에 이범익 전 강원도지사의 단죄비가 각각 설치됐다. 단죄비는 그의 친일행각을 꾸짖는 내용을 새긴 것으로 공적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이범익 단죄문설치추진위원회는 단죄문에서 “조선시대 관리인들의 공덕비를 모아 놓은 이 비석군에 일제강점기 대표 친일파인 이범익의 비석이 포함된 것은 잘못됐다”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강원도민의 뜻을 모아 광복 68주년을 기념해 단죄문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1929∼1935년까지 강원도지사를 지낸 이범익은 조선총독부 정책을 앞장서서 선전해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특히 1938년 9월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고문한 부대인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하는 등 악명이 높았다. 지난해 7월엔 경기 군포시 산본2동 능안공원 내 친일작가 이무영의 작품비가 철거됐다. 이무영은 친일파 청산을 헐뜯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신>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