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친일 행적’ 김무성 부친 동상 추적

꽁꽁 감춰놓고 “보여줄 수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한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았고 친일과 식민지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 친일에 대한 대가로 누렸던 지위와 권력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면서 후손에 의해 친일행적이 부인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그런 경우다.  
 

김용주(1905∼1985, 창시명 金田龍周, 가네다 류슈)의 ‘친일 행적’이 속속 발굴되는 가운데, 김용주의 청동 전신상 등 각종 ‘찬양시설’이 광주 전방공장과 서울 안암동 용문고등학교 등지에 있는 것을 <일요시사>가 단독으로 확인했다.

전범기업 자리
1986년 세워져

전남 광주의 전방(구 전남방직) 공장 내에 있는 김용주의 동상은 비문으로 볼 때, 김씨의 사후 1년 뒤인 1986년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동상은 전방공장 정문 입구 옆 넓은 잔디밭에 위치해 있는 대형 전신상이다. 해당 동상에 대해 광주시민들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아 그동안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해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방은 1935년 전범기업 가네보(鐘淵)공업의 전남공장이 그 모태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놓고 간 공장설비를 미군정이 인수했다가 1953년 ‘적산’(적의 재산이라는 의미)으로 김형남(후에 숭실대 초대총장)과 김용주가 함께 불하받은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엔지니어였던 김형남이 자본을 가진 김용주에게 방직공장을 인수하도록 설득한 것이다. 1961년 8월 두 사람은 이 적산 공장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분할해 나눠가졌다.

일제강점기 가네보 공장은 평균 연령 12.8세에 불과한 어린 여공들이 하루 12시간씩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곳이었다. 작업반장의 폭언과 폭행, 굶주림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 했고 성폭력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해방 후에도 방직공장은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하에서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일하는 작업장으로 악명 높았다.


현재 전방의 명예회장은 김창성(84)씨로 김무성 대표의 큰 형이다. 광주 전방공장은 현재는 가동되지 않고 있다. 중고자동차 매매단지와 대형 물류센터가 임차해 있다. 지난해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지역의 시민단체 회원 및 학생들이 광주 내 일제강점기 유적을 답사하면서 공장 정문 안쪽에 조성돼 있는 동상을 보기 위해 공장을 방문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불과 2∼3분 사이에 안에서 전방 유니폼을 입은 남자 8명이 나와 일행을 가로막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단체 관계자는 “연락을 받은 듯 갑자기 남자들이 뛰쳐나왔다. ‘나가라’며 우리 일행을 밀쳤다. ‘경찰을 불러라’ ‘사진촬영을 하지 마라’면서 실랑이를 벌였다”고 밝혔다. 일행 중 한 명이 “학생들을 데리고 역사기행을 다닌다. 동상이 있어서 보러왔다”고 양해를 구하자 “안 된다. 돌아가라”며 강하게 제지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로 안에 가동되는 공장은 없고 담양 등 타 지역으로 이전해갔다. 유통센터와 중고자동차 매매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일 뿐인데 삼엄하더라”고 덧붙였다. 
 

현장엔 역사해설사, 학생들과 교사, 해당 시민단체의 성인 회원 등이 있었다. 다음날인 15일, 김 대표는 부친의 전기 <강을 건너는 산>을 발표했다. 평소에도 김씨의 동상 앞 잔디밭에 서 있으면 전방직원들이 나와 사진촬영을 저지하고, 카메라를 뺏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김용주에 대해 친일파 논란이 거세지면서 전방 측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용주 전신상 광주 전방공장 존재
지역 시민단체 방문했다가 문전박대

김용주 찬양시설은 포항 영흥초등학교와 서울 용문고등학교에도 존재한다. 영흥초등학교는 1911년 설립됐으나, 1936년 3월 김용주가 인수해 설립자 변경 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영흥초는 지난 2011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김용주의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 자리엔 설립자 가족을 대표해 김 대표가 참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가 <아사히신문> 조선판에 게재된 김용주의 전투비행기 헌납 기명광고를 새롭게 발굴해 기자회견을 하는 등 친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말, 김 대표가 영흥초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 대표의 큰누나이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모친인 김문희(87)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용문학원에도 김용주의 대형 초상화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안암동 소재의 용문학원은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를 함께 운영 중인 학교법인이다.

1986년 용문고 본관 뒷편에 ‘해촌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인 강당을 준공했는데, 이 강당 내 무대 우측에 김용주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해촌은 김용주의 호다.

보러 갔는데… 
직원들이 막아

김용주의 친일 행적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김씨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수산업, 해운업, 무역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김씨의 친일행위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면모를 띤다.

김씨는 경상북도 도회의원,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사업부장 등을 역임했다. 배우자 방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고모이며, <친일인명사전> 등 각종 친일파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되는 호남 출신 갑부 현준호(1889∼1950)와 사돈을 맺었다.

해방 후엔 대한해운공사 사장, 주일본공사, 전남방직 사장 겸 신한제분 회장, 민주당 국회의원, 신한해운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회장, 동해제강 사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9월17일 연구소 측은 기자회견을 열어 김용주의 친일행위에 대한 새로운 증거자료를 공개한 바 있다. 연구소는 김용주가 고위직에 있는 동안 ‘애국기 헌납운동’을 선전했다면서 <아사히신문> 국내판 1944년 7월9일자에 실린 일본어 기명 광고를 공개했다. 김용주는 또 같은 신문 국내판 1943년 9월8일자에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이라는 내용의 일본어 기명 광고를 실어 조선청년들의 징병제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  

당시 연구소 측은 기자회견에 앞서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기본적으로 연좌제에 반대하지만 친일행위자의 후손이나 연고자가 ①친일인물에 대한 기념사업을 하는 경우 ②친일행적을 부인 또는 왜곡하는 경우 ③친일청산운동을 방해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 측의 대응이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 연구소의 판단이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김용주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김 대표가 공당의 대표로서, 공공연한 대권 행보자로서 선친의 친일행적과 관련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그간의 행태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27일에 반박 보도자료를 내고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신뢰성이 떨어진다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사를 근거로 부친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조선인 학교를 세우는 등 애국자였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치안유지법 위반이 사실이라면 도의원에 선출될 수 없다. 동아·조선일보에 실린 인사는 동명이인이다. 김용주가 1920년대에 문화운동에 관계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경력이 1940년대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지난 2011년 일본정부로부터 직접 건네받은 ‘조선인 공탁기록’에도 김용주의 친일행위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영흥초·용문고에도…
대형 흉상·초상화 전시 
 

기록에 따르면, 일제 말기, 일본정부가 전쟁 수행을 독려하기 위해 전투기, 조선, 군수물자 등을 생산한 전범기업 주식을 일본과 조선의 유력자를 대상으로 판매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일제의 전쟁 승리를 의심치 않았던 친일파들이 투자 목적과 충성심을 앞세워 가장 적극적으로 매입했다.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총 51만7504엔어치를 매입, 최고액을 기록했다. 명성황후 친척 민규식이 46만8200엔, 김용주의 사돈인 현준호가 9만3425엔으로 그 다음을 이었다.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도 전범기업 니혼고주파중공업의 주식 7500엔을 매입한 것이 확인됐다. 이외에도 1204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호남은행 현준호 일가를 비롯해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경성방직(현 경방) 및 삼양사(현 삼양그룹) 설립자 김연수, 배우 이지아씨의 조부인 김순흥, 대한국민항공사(대한항공 전신) 설립자 신용욱, 명성황후 민씨 일족, 유명 사립대 설립자 등 현재 확인 가능한 500여명 중 사회 유력자 집안이 대거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투자한 전범기업들은 2차 대전 당시 조선인 동포들을 끌고가 강제노역시키던 기업들로, 당시에도 조선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동안 전국 곳곳에서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친일파 동상이 철거되고 일본식 지명이 변경되거나 친일파 묘가 이장됐다. 김 대표 본인에게 연좌제를 지울 수는 없으나 김용주의 친일행적이 명백한 만큼 공공재인 학교와 주주들이 주인인 주식회사 내에 있는 찬양시설은 철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계의 대체적 반응이다. 앞으로 광주전남지역의 시민단체는 김용주의 동상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동상 철거를 적극적으로 의제화 해 나갈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행적 확인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사무국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던 인사들의 찬양시설이 전국 도처에 세워져 있다”며 “후세에 좀더 투명한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선 이러한 친일 찬양시설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시설이 어떻게 현재까지 서 있게 됐는지 안내문이나 단죄비를 세워서 올바른 역사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친일파 찬양시설 철거 사례      

‘일제잔재지우기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친일파 찬양시설이 철거되는 예도 부쩍 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소재 광신고교는 지난 2001년 12월 이 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친일파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했다.

박흥식의 아들 박병석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음에도 동문회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을 빌려 동상이 철거됐다. 이에 앞서 민족문제연구소 관악동작지부 회원 등은 학교 앞에서 박흥식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며 수개월 동안 시위를 벌였다. 학교 측은 고심 끝에 동상을 철거키로 결정하고 이같은 사실을 연구소 측에 알린 후 그해 말 철거했다.

지난 2000년 7월엔 서울 중앙여고가 일제 말기 제자를 정신대에 내보낸 황신덕씨의 동상을 철거한 바 있다. 지난 2005년 전북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에 걸렸던 수당문 현판이 철거됐다. 수당은 경성방직(현 경방) 사장 김연수의 호로, 경기장 건립 당시 김연수가 기부금을 내면서 현판이 걸리게 됐다. 경방은 조선 농민에게 헐값에 사들인 면화로 조선주둔군의 군복 천을 생산해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1939년엔 만주국 심양 근처 소가둔에 남만방적을 설립, 1943년부터 ‘관동군’ 군복 천 생산을 개시했다.    

광주에선 시민단체들의 오랜 문제제기를 통해 광주중외공원에 세워져 있던 친일인사 안용백의 흉상을 지난 2013년에 철거했다. 안용백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면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는 사설을 쓰고 창씨개명에 앞장선 인물이다. 지난 2014년엔 광주 서구 백일로가 ‘학생독립로’로 명칭이 변경됐다. 지난 삼일절엔 백일초등학교가 성진초등학교로 개명됐다.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을 딴 지명과 학교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2013년엔 강원도 춘천과 정선군에 이범익 전 강원도지사의 단죄비가 각각 설치됐다. 단죄비는 그의 친일행각을 꾸짖는 내용을 새긴 것으로 공적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이범익 단죄문설치추진위원회는 단죄문에서 “조선시대 관리인들의 공덕비를 모아 놓은 이 비석군에 일제강점기 대표 친일파인 이범익의 비석이 포함된 것은 잘못됐다”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강원도민의 뜻을 모아 광복 68주년을 기념해 단죄문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1929∼1935년까지 강원도지사를 지낸 이범익은 조선총독부 정책을 앞장서서 선전해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특히 1938년 9월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 172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고문한 부대인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하는 등 악명이 높았다. 지난해 7월엔 경기 군포시 산본2동 능안공원 내 친일작가 이무영의 작품비가 철거됐다. 이무영은 친일파 청산을 헐뜯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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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