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영원한 의장님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

50년 정치인생 빛낸 원칙과 소신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한국 정치사에서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인물이 있다. 숙환으로 별세한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 이 전 의장은 본인이 대통령을 지내지 않았을 뿐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한국 현대사를 함께 써내려갔다. 그는 50여년 정치 인생을 보내며, 소신과 강단으로 역사에 ‘영원한 의회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제14대, 15대 국회에서 두 차례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83) 전 국회의장이 지난 14일 오후 4시31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부전으로 눈을 감았다. 이 전 의장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륜중학교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화통신>을 거쳐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거목 잃었다
정치권 애도

1960년 4·19혁명 뒤 국회에서 자유당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부결될 때, 이 전 의장이 당시 정치부 기자로 의사당 기자석에서 지켜보다가 “자유당 이 도눅놈들아”라고 소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국회속기록에 이름을 올린 사례라고 한다. 이 전 의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 사회를 보던 곽상훈 국회 부의장이 기자석을 향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라고 제지해서 국회 속기록에 이름이 올랐는데 나중에 삭제했더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군사정부는 민간인에게 조속히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그와 친분을 맺게 됐다.


이 전 의장은 박 전 대통령의 총애 속에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당시 최연소(31살)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했다. 이 전 의장은 1963년 6대 국회 때 공화당 전국구로 처음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7·10대·11·12·14·15·16대 국회에 각각 당선돼 8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전 의장의 특유한 원칙과 소신으로 그의 정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치역정을 걸어야 했다. 초선 의원 시절인 1964년 ‘남북가족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대표 발의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용공’ 인사로 몰리기도 했다. 당시 남북을 통틀어 처음 나온 주장이었다.

박정희 인연으로 화려하게 정치입문
31세부터 8선…순탄지 않은 정치역정

제6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비판하다가 이병철과 이맹희에 의해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할 뻔 했다.

제7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9년 정구영 등과 함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당시 실력자이던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는 강단을 보여줬다. 이 비서실장과 김 중앙정보부장 경질 등을 선행 조건으로 내걸고 찬성으로 선회했다. 결국 3선 개헌은 변칙 통과되고 직후에 김 정보부장과 이 비서실장은 경질됐다.

하지만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온 이후락이 앙심을 품고 공작을 저질러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8년간 정치 활동의 공백기를 맞는 시련을 겪었다. 박 전 대통령과 결별한 계기였다.

다행히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행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대구 중구·서구·북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1979년 3월 국회 개원 때 여당 의원임에도 현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부를 비판했다.


국회의원 8선
국회의장 2번

이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악의적으로 보고해 이 전 의장을 민주공화당에서 제명시키려 했지만,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의 측근들의 만류로 겨우 없던 일이 됐다.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에 의해 민주공화당이 강제로 해산 당하자 과거 민주공화당 출신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제11·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대구 중구·서구·북구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후 김종철이 한국국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나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최치환을 누르고 한국국민당 총재에 당선됐다. 1987년 한국국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으로 대거 탈당하는 사태를 겪으며, 와해되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한국국민당은 신민주공화당에 흡수됐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1990년에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3년 재산 공개 파동으로 박준규 전 국회의장직을 사퇴하자 잔여 국회의장 임기를 수행했다.

1993년 14대 의장 재임 시절 청와대로부터 새해 예산안과 정당법, 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 등을 12월2일까지 원안대로 통과시킬 것을 요구받았지만 거부했다. 여당으로부터는 본회의 사회권을 부의장에게 넘기라는 압박까지 받자 이 전 의장은 사직서까지 써놓고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의장 주재로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 예산안은 표결로, 나머지 입법은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날치기 시도는 미수에 그쳤고, 여야 합의로 각종 법안도 무난히 통과됐지만 이 전 의장은 이듬해 6월 결국 물러났다.

이 전 의장은 안건을 본회의에 직권 상정해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날치기’를 자제한 의장으로 꼽힌다. 그는 1993년 12월 국회의장 시절, 통합선거법 등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이 전 의장은 “나는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마지막 한 번은 방청석의 국민을 바라보면서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고 말하곤 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로 당선됐다. 1997년 이회창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반발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그를 따라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몸담았다. 자서전 ‘정치는 가슴으로’ 등을 통해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화합을 역설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으로 시작해 1985년 국민당 총재에 취임하는 등 보수 정당을 이끌다가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당의 산파 역할을 했다.

YS정부 시절
날치기 거부

창당 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다시 국회의장을 지냈다. 2000년 7월에는 교섭단체 구성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의해 운영위원회에서 날치기 처리됐지만 당시 이 전 의장은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전화해 “이 의장, 날치기를 안 하는 것도 좋으나 법대로 표결해서 다수결 원칙을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으나 “국회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며 원칙을 고수했다.


이 시기부터 국회법이 개정되어 국회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이만섭은 최초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됐다. 이후 2002년 2월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 ▲안건 표결 시 반드시 의장석에서 선포 ▲국회의원의 자유투표제 등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헌정 사상 첫 무당적 의장이 됐고 현재까지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이 전 의장은 2004년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후배들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한명숙 전 대표를 향해서는 “한의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밀실 처리 논란이 일었을 당시 “이명박 정부의 나사가 완전히 빠졌다”고 하기도 했다.

또 정수장학회가 논란이 되자 “정수장학회 이름을 바꾸고 사회에 환원하는 게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그의 쓴소리는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에겐 “민주화 세력에 미안한 마음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때까지 41년간 여야를 거치며 격동의 한국 정치의 현장에 서있던 이 전 의장은 금품수수와 같은 비리 구설에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청렴한 정치인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양심봉’최고권력에 쓴소리
임종 전까지 정치 현실 걱정

이 전 의장은 은퇴 당시 “정치인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해 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야는 “영원한 의회주의자를 잃었다”며 한 목소리로 애도했다. 새누리당 이장우 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을 내고 “이만섭 전 의장은 8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두 차례나 지냈고, 젊은 시절부터 강단 있고 소신 있는 정치행보로 많은 정치인들에게 귀감을 보였다”며 “언론인으로서 의회주의자로서 평생 동안 민주주의와 의회정치 발전에 많은 역할을 해 온 분”이라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어 “의회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 전 의장의 별세소식은 더욱 애통하다”며 “새누리당은 이 전 의장의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의 노력을 다 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8선 국회의원으로 두 번이나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면에 드시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이 전 의장은 바른 말을 잘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고, ‘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다’는 내용으로 국회법을 개정하는 등 국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한 의회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정의화 국회의장도 이 전 의장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는 오늘 평생 의회주의의 한 길을 걸은 한국정치의 거목을 잃었다”며 고인을 애도했다. 정 의장은 “이렇게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 너무나 비통한 심정”이라며 “제게는 누구보다 훌륭하고 자애로운 스승 같은 분이었다”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그는 또 “누구보다 꼿꼿하고 올 곧은 참정치를 펼친 이만섭 의장님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굽히지 않은
강골 정치인

노환으로 지난봄에도 입원한 적이 있는 이 전 의장은 지난달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기간에도 자택에 누운 채 조문을 하지 못했으며, 지난 9일 병세가 악화돼 입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윤복씨와 장남 승욱, 딸 승희·승인씨 등 1남2녀가 있다. 영결식은 지난 18일 국회에서 국회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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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