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계의 ‘큰 별’ 앙드레 김이 지난 12일 저녁 7시40분쯤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앙드레 김은 지난달 19일 대장암과 폐렴증세가 악화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12일 증세가 악화돼 산소 호흡기를 착용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영정 속 사진으로 남게 됐다.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라는 한국 패션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앙드레 김.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봤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파리 패션쇼에 초청 받아
친근하고 서민적인 모습으로 대중 사랑 독차지
1935년 경기도 구파발 신도면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앙드레 김.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피난 갔던 부산에서 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과 그들의 의상을 보며 옷에 관심을 가진 그는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예쁜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리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갔다.
“동양서 온 최고의상”
그러던 그가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은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퍼니 페이스’를 본 뒤였다. 디자이너 지방시가 디자인한 의상이 여러 벌 나오는 이 영화를 보고 ‘여성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는 옷을 만드는 데 평생을 걸겠다’고 다짐한 그는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갔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홀로 상경해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했다. 이후 1961년 최경자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30명의 입학생 중 남학생은 그를 포함해 3명에 불과했다. 앙드레 김에 대해 최경자는 자서전을 통해 “재능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제자”라고 회고했다.
이듬해인 1962년 그는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복장쇼를 열면서 패션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서울 명동에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면서 패션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의상실 간판의 ‘앙드레’는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쉬운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붙여준 것이다. ‘앙드레 김’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앙드레 김이 유명세를 탄 것은 60년대 당시 세기의 결혼으로 알려진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의상을 만들면서다. 이후 많은 여배우가 그의 의상실에 줄을 섰다. 하지만 1966년, 그는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파리행을 결심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파리 패션쇼에 초청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옷감까지 동대문에서 직접 고르는 열성과 철저한 준비 끝에 패션쇼는 대성공을 거두게 됐다.
당시 프랑스의 유력지 ‘르 피가로지’는 그의 작품을 ‘동양에서 온 최고의 의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미국,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수십여 나라에 초청을 받아 패션쇼를 열었고 큰 호응을 얻으면서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리게 됐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정부 문화훈장을 비롯해 각종 상을 수상한다. 99년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11월16일을 ‘앙드레 김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4대 장관급 훈장 중 하나인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젊은 시절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영화에 출연하며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앙드레 김은 연예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 스타로 인정받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앙드레 김 패션쇼에는 그간 김희선, 이영애,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김태희 등이 무대에 올랐다. 국내뿐만 아니라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 등 세계적 스타도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앙드레 김은 말년 패션뿐만 아니라 보석과 도자기, 속옷, 안경 등 다양한 분야로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잇따라 론칭하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지난 1999년 옷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세무조사를 받고 청문회에 불려나가게 된다. 그러나 화는 복이 돼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오히려 ‘제2의 전성기’를 갖게 된 것. 그가 성실 세금납세자라는 것은 물론, 국산 소재만 사용하는 데다 그동안 해외에서 벌인 문화사절로서의 선행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때문이다.
실제 앙드레 김은 국세청이 발표한 2004년 모범성실 납세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앙드레 김 의상실은 세무조사 결과 매출누락, 가공경비 계상, 위장, 가공계산서, 수수 등이 전혀 없고 장부를 성실하게 정리해왔다. 수많은 톱스타들과 교분을 나누고, 고가의 의상을 제작하며 화려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던 그가 얼마나 청렴한 삶을 살아왔는지 증명된 셈이다.
이렇듯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많은 것을 이뤄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선 유일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의 개성 넘치는 외모와 말투에 많은 연예인들이 앞 다퉈 성대모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엘레강스 해요” “판타스틱 해요” “뷰티풀 해요” 등의 ‘어록’에 특유의 목소리 톤과 순수한 미소를 곁들여 국민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또 패션쇼에서의 화려한 모습과 달리 무대 뒤편에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거나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등 서민적인 모습이 공개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때문에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은 국민들은 “믿을 수 없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실엔 패션·연예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뼈아픈 사연도
“20대에 가졌던 패션에 대한 열정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며 “80살이 넘어서도 계속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던 앙드레김. 그는 결국 영정 속 사진으로 남게 됐지만 그의 패션에 대한 열정과 업적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