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MLB 가는 박병호

148억 잭팟? 그동안 흘린 땀이 얼만데요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메이저리그팀 미네소타는 구단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박병호에 대한 협상권을 획득했다고 전했다. 미네소타가 최고 응찰 금액을 적은 구단으로 밝혀지면서 박병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향한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게 됐다. KBO리그 역대 최강의 ‘거포’로 꼽히는 박병호가 무사히 메이저리그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병호는 1986년 7월10일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했다. 일찍 서울에 올라와 서울영일초등학교와 영남중학교를 거쳐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박병호는 이희수 전 한화 이글스 감독 밑에서 야구를 배웠다. 성남고등학교 시절 전국 대회에서 화순고등학교와 휘문고등학교와의 2경기에 걸쳐 4연타석 홈런(화순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3연타석, 휘문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1타석)을 기록하였는데,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박병호 키운
히어로즈 대박
 
이러한 이유로 LG트윈스는 박병호를 장타를 책임질 해결사라 여기게 됐고 그는 2005년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억3000만원을 받고 입단한다. 입단 후 포수에서 1루수로 전향해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다. 박병호는 리듬이나 타격 기술이 부족해 2할 초반이나 1할대를 쳤다. 2006년 2시즌간 1군 127경기에 출장해 타율 0.177, 8홈런, 34타점을 기록했다.
 
박병호는 2006년 상무에 입대해 2008년 2군 북부리그 홈런왕을 차지했다. 2008년 말 제대해 2009년 1군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4타수 3안타를 친 지 며칠 뒤 또 연타석 홈런을 쳤다. LG트윈스는 확실한 오른손 거포가 없었던 찰나에 박병호의 활약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고 나서부터 경기 기량은 또다시 하락했다.  박병호는 그 해 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010년 시즌을 앞두고 이택근의 트레이드 영입, 외야수 이병규의 복귀 등으로 외야진의 포화 현상으로 인해 이택근이 1루수를 겸업하며 LG트윈스 내에서 박병호의 주전 경쟁은 더욱 힘들어졌다. 2010년 9월17일 잠실 SK전에서 나주환과 충돌하여 왼쪽 팔꿈치 부상을 당해 시즌을 마감했다. 박병호는 토미 존 수술(부상당한 팔꿈치에 정상적인 팔꿈치의 인대를 떼어 붙이는 수술)을 받아 재활하게 되어 2011년에는 1군에 늦게 합류했다. 하지만 LG트윈스에서 더 이상 자리 잡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2011년 7월31일 박병호는 투수 심수창과 함께 김성현과 송신영을 상대로 넥센히어로즈에 트레이드됐다. 트레이드 이후 박병호는 맹타를 휘두르며 넥센히어로즈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박병호가 이적하기 전 넥센히어로즈의 1루는 이숭용과 장영석, 오재일, 조중근이 번갈아 맡았으나, 트레이드로 영입한 박병호가 1루수로 완전히 정착했다.
 
트레이드 직후 이장석 구단주의 지시 아래 박병호를 쭉 선발 출장시켰지만, 트레이드된 이후 처음 출장한 대구 삼성라이온즈 전에서는 12타수 2안타로 부진했다. 8월5일 두산베어스 전에서는 외야수 알드리지가 부상을 당해 4번 타자로 출장했고 두산전 3차전에서 11타수 7안타 2홈런 5타점으로 활약을 펼쳤다.
 
이장석 구단주와 감독, 코치진은 박병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새로운 4번 타자로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8월에는 리그 최다 홈런을 때려내며 괴력을 보였으며, 8월 20일 기아타이거즈 전에서는 투수 유동훈을 상대로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기도 했다. 
 
미네소타 협상권 획득…메이저리그 눈앞
힘과 내구성에 베팅 “리빌딩 방점 필요”
 
2011년 넥센히어로즈가 최하위로 떨어졌지만 박병호의 맹활약으로 마지막까지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 주게 됐다. 2011년 13홈런을 기록하여 개인 통산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오른손 강타자였던 클리프 브룸바의 이름을 본뜬 브룸박과 메이저 리그 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오른손 강타자인 푸홀스의 이름을 본뜬 ‘병홀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병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발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 시즌 종료를 몇 경기 앞두고 구단의 배려로 시즌을 마감한다. 2011년 12월10일 4세 연상의 전 KBSN 스포츠 아나운서인 이지윤과 결혼했다. 시즌 후 박병호가 넥센히어로스의 새로운 스타가 된 반면 트레이드 당사자 중 송신영은 FA를 선언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고, 2년 후인 2013년에 트레이드로 넥센히어로즈에 복귀하여 박병호와 함께하게 됐다. 김성현은 경기조작 사실이 드러나 방출되어 이 트레이드는 LG트윈스에게 완전히 실패로 끝난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2012년부터 실질적인 풀타임 시즌을 맞이 하게된다. 팀의 4번 타자로 3루 수비 연습도 하였으나 주로 1루수 및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시범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고타율로 승승장구하여 시즌을 기대하게 하였으나, 4월 한달간 타격감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15일 삼성라이온즈 전에서 투수 차우찬을 상대로 생애 첫 만루 홈런을 쏘아올린 것을 시작으로 홈런포가 시작됐다. 4월에 총 4개의 홈런포를 날린다. 그 뒤 5월과 6월에는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며 6월까지 16홈런 58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 상위권을 유지한다. 
 
KBO 최초 2년 연속 
전 경기 4번 타자 
 
전반기가 끝났을 때 2할 8푼의 타율과 17홈런 64타점으로 홈런 부문 3위, 타점 부문 1위를 유지했다. 홈런 선두를 달리던 강정호가 봉와직염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박병호는 홈런이 더 늘었다. 8월1일에는 생애 첫 1경기 3홈런을 날리기도 하며 7월31일 ~ 8월 5일 사이에 열린 6경기에서 6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홈런 부문 1위에 등극한다.
 
그 후 홈런 부문 1위를 계속 지켰으며 타점 부문은 삼성라이온즈의 박석민에게 잠시 1위를 내주기도 하였으나, 박석민이 9월에 부진한 사이 치고 올라가며 타점 부문 1위를 굳혔다. 또한 9월 21일 한화이글스와 경기에서 1홈런 3타점을 기록하여 2012년 시즌 처음으로 30홈런 100타점을 돌파하였으며 이는 KBO 리그 통산 40번째의 기록이다.
 
10월 2일 목동 두산베어스 전에서 도루를 성공하며 20홈런 20도루 클럽에 가입한다. 이는 1루수로는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에 이은 2번째의 대기록이며, 강정호와 함께 넥센히어로즈는 두 중심 타자가 모두 20홈런-20도루 클럽 가입에 성공한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2012년 시즌을 마친 박병호는 거포의 상징인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왕으로 3개의 개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넥센히어로즈 소속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됐다. 같은 해 데뷔 후 처음으로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도 수상했다. 
 
 
2013년 시즌도 1루수, 4번 타자로 전 경기를 출장한다. 시즌 초 3월과 4월에는 총 4홈런을 치며 부진을 보이다가 5월에 0.341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에 큰 기여를 한다. 4월~6월의 타율이 3할 7리에 불과하지만, 7월~8월의 타율은 3할 3푼 1리를 기록하였으며 이 기간 40경기 동안 11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또한 팀이 큰 상승세를 올리던 9월에는 18경기에서 무려 11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2년 연속 홈런왕 굳히기에 들어갔다.
 
9월29일 두산전에서는 생애 통산 2번째로 1경기 3홈런(7타점)을 올렸으며, 37홈런을 기록하여 2년 연속 30홈런대, 100타점을 달성했다. 또한 2012년에는 달성하지 못하였던 3할 타율까지 달성하며 개인 통산 첫 번째로 최고 타자의 상징인 3할 타율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10월3일 기아타이거즈 전에서는 생애 최초로 한 경기 3도루를 성공한다.
 
또한 KBO 리그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전 경기 4번 타자로 출장하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넥센히어로즈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큰 공헌을 했다. 시즌 중 감독 추천 선수로 올스타에 선정되어 데뷔 후 처음으로 포항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런 맹활약으로 시즌 MVP는 다시 한 번 박병호에게 돌아갔으며,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 부문까지 4관왕을 차지했다. 2년 연속 MVP는 선동열(1989∼1990), 장종훈(1991∼1992), 이승엽(2001∼2003) 이후로 박병호가 4번째다.
 

고등학생 최초 4연타 홈런
프로 초반 부진하다 거포로
 
2014년 시즌 5월과 6월에만 무려 23개의 홈런을 쳤다. 그러던 6월27일 두산베어스를 상대로 시즌 29호 홈런을 친 후 긴 부진에 빠지면서 선발 출장에서도 제외됐다. 7월11일 NC다이노스 전에서 대타로 출장해 30홈런을 쳤다. 2012년과 2013년에 이어 3년 연속 30홈런을 쳐내는 기록을 달성했다.
 
2014년 올스타전에 1루수로 선발됐다. 2014년 7월18일에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맹활약했다. 1회에는 SK와이번스의 김광현을 상대로 1회에 2루타, SK와이번스의 채병용을 상대로 3회에 쓰리런 홈런, 8회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안지만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쳤다. 4타수 3안타 4타점으로 웨스턴리그의 13-2로 대승을 이끌어냈다. 생애 첫 올스타전 MVP를 차지했다. 9월5일 목동 NC다이노스 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포함, 역대 두 번째 한 경기 4홈런을 달성했다.
 
2014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그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선출됐고, 대만과 2차전 국가대표 발탁 이후 처음으로 홈런을 쳤다. 준결승전에는 6회 중국투수 리신에게 결승 3점포를 쏘아올리면서 대표팀의 결승진출에 기여해 생애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진으로 트레이드
이후 중심타선으로
 

10월14일 사직 롯데자이언트 전에서 김사율을 상대로 데뷔 첫 50호 홈런을 달성했다. 이승엽-심정수에 이어 국내 타자중 3번째로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비록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2승 4패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2014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3년 연속 수상하는 한 해를 보냈다.
 
미네소타는 지난 10일 구단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박병호에 대한 협상권을 획득했다고 발표했다. 미네소타가 최고 응찰 금액인 1285만 달러(한화 약 148억8,670만 원)를 적은 구단으로 밝혀지면서 박병호 영입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테리 라이언 단장은 10일 “박병호는 야구 인생의 전성기에 있다. 일본리그와 비슷한 한국에서 엄청난 성적을 남겨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적으로 정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병호의 공식 에이전트사인 옥타곤 월드와이드는 미네소타와 30일 동안 계약 기간과 연봉을 협상한다. 미네소타가 단독 협상권을 가지게 돼 박병호의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미네소타는 메이저리그에서 중소구단으로 평가된다. 미네소타는 장타력을 강화하기 위해 거포인 박병호를 선택했고 12월9일까지 연봉 협상을 벌인다. 미네소타에게 1285만 달러(한화 약 148억8,670만 원)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박병호의 연봉은 포스팅 비용에 맞춰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관심은 자연스럽게 박병호의 연봉으로 쏠린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LA 다저스),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비교해 연봉규모를 추산해 볼 수도 있다. 류현진은 2011년 약 2573만 달러(297억원)의 포스팅 금액에 6년 3600만 달러(약 416억원)에 계약했다. 강정호는 지난해 500만215달러(약 55억원)의 포스팅 비용에 연봉은 4년 1100만 달러(약 127억원)였다. 
 
강정호보다 2배
57억 이상 예상
 
산술적으로 포스팅 비용만을 놓고 보면 강정호의 이적료보다 2.5배 높은 박병호의 연봉은 최소 500만 달러(57억원)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병호는 올 시즌 타율 0.343와 2년 연속 50홈런을 기록했기 때문에 올해 1루수가 부진했던 미네소타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 류현진처럼 일본 진출을 무기로 삼아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다. 미네소타의 의지에 따라 박병호의 연봉이 결정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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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