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그리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위기의 한국경제…왕회장 리더십이 절실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유일한 기업인이 있다. 바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교과서에는 정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한에 넘어가는 모습이 소개된다. 그 순간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장면 중 하나기 때문이다. 사업가로서 일군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정 회장이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산업화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 개선에도 이바지해서다. 아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과 철학을 재조명했다.

정 회장은 1915년 11월25일에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했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다. 정 회장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4번의 가출
그리고 성공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했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했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 회장은 무려 4번이나 가출했다.

두 번째 가출해 금화에 가서 일했다. 세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해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에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해 집을 나온 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됐다. 장부를 잘 쓸 줄 아는 정 회장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 회장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됐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결국 가게를 정리했다.

이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했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6.25 전쟁 시기에 피난하여 부산에서 건설회사를 시작했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미군 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받았다.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 회장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게 됐다.

한국경제사에 있어서 정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국 전쟁 직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해야 했다. 전후복구사업에서 공업입국, 중화학공업화, 첨단산업화로 이어지는 경제사의 주요 물줄기를 민간부문에서 이끌어 온 주역이 바로 정 회장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도전·실험정신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의 사회간접시설은 대두분 정 회장이 주도했다. 소양강다목적댐(1967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울산조선소(1973년), 원자력발전소(1970년) 등 국내 굴지의 대공사는 한국경제사 측면에서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업이었다.

한국경제가 자립국가 확립을 목표로 수출에 눈을 돌릴 때 정 회장은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 국내 기업 최초로 태국 고속도로 사업 등 해외 건설시장 개척에 나섰다.

당시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해외시장 개척은 새로운 돌파구였다. 하지만 기술과 경험, 자본, 장비 등 모든 부분이 미비한 까닭으로 아직 그 누구도 해외시장 개척은 상상조차 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정 회장은 과감하게 해외 건설시장 진출을 선언했고, 국내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1970년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정 회장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수출주도형 경제기반을 구축했다.

탄생 100주년 맞아 업적·철학 재조명
가장 존경하는·가장 사랑하는 기업인

1971년 정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을 돌았다. 거절만 당하다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추천서를 부탁했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 회장은 대한민국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정 회장은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라며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정 회장의 기지와 배짱 끝에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처음부터 아산재단을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포드 재단에 버금가는 재단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재단의 중점 사업부문을 의료사업과 사회복지 지원사업, 연구개발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 4개 부분으로 설정했다. 그는 특히 전국의 의료 취약지역에 대한 지원사업에 관심을 갖고 9개의 병원을 건립하는 한편 울산의과대학 및 아산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의료 지원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왔다.

90년대부터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정 회장은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 회장은 다시 한번 세상이 놀랄만한 일을 해낸다. 당시 김 대통령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다. 당시 이 장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정 회장은 2차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1차는 6월 16일 500마리 소를 데리고 갔으며, 2차는 501마리 소를 몰고 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당시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 기 소르망은 정 회장이 몰고 간 소 떼를 두고 ‘20세기 최후의 전위 예술’이라고 말했다.

소떼 몰고 방북
역사적인 장면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건립 합의의 초석이 됐다.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 회장이 묵고 있던 평야의 백화원 초대소를 직접 방문하는 등 국가원수급에 달하는 극진한 예우를 했다. 후에는 평양에 ‘정주영 체육관’까지 건립됐다.

이런 정 회장의 업적으로 역사는 남북화해와 협력, 교류의 신기원을 개척했다는 평가와 시대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분단의 벽을 뛰어넘은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업적 때문에 정 회장은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부자’로 꼽혔다. 이 외에도 그 동안 정 회장은 ‘한국 경제 60년 가장 위대한 기업가’ ‘기업인이 존경하는 최고 경영자’ ‘오피니언 리더들이 꼽은 한국 사회 대표 인물’ ‘대학생들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 등에 선정된 바 있다.

무에서 유 창조…불도저 정신
“이봐 해봤어?” 불굴의 개척자


“이봐, 해봤어?”


1984년 충남 서산간척지 개발사업을 맡은 현대건설은 최종 물막이 공사를 앞둔 상황에서 방조제용 바위가 계속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는 바람에 공사가 더는 진행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 회장은 당시 현장을 찾아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길을 잡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담당자가 ‘현실성이 있느냐’며 머뭇대자 정 회장은 “이봐, 해 봤어?”라고 되물으며 “해보지도 않은 채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해 보라”고 말했다. 결국 정 회장의 아이디어는 성공적이었다. 현대건설은 공사기간을 무려 3년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 등은 이 공사를 ‘정주영 공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말이 ‘우리나라 경영인을 대표하는 최고 어록’으로 선정됐다. 대기업 전·현직 홍보 책임자들의 모임인 한국 CCO클럽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간행물인 <재계 인사이트> 독자 27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정 회장의 말이 대표 어록으로 선정됐다고 지난달 23일 밝혔다.

한국 CCO 클럽은 설문에서 ‘기업가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기업인 어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복수 응답한 응답자의 20.2%가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를 최고의 어록으로 꼽은 것이다. 이 말은 ‘정주영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다. 무한한 긍정 마인드와 무에서 유를 개척해낸 도전정신, 실패를 상쇄하고도 남는 창의성 등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최근 정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의 업적과 기업 철학을 되새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한국의 답답한 경제 현실이 깔려있다고 풀이된다.

오래도록 저성장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경제를 구출해낼 사람이나 방법을 찾다보니 정 회장의 리더십이 부상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긍정과 도전정신, 창의성을 골자로 한 정주영 리더십이 환생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기업인들은 새로운 성장 동력 찾기보다 현상 유지와 대중의 눈치 살피기에 더 매달리는 분위기다. 창업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맨땅에 일군
현대왕국 신화


최근 현대자동차그룹은 정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식과 학술포지엄, 음악회, 사진전 등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정 회장 100주년의 재조명은 한국경제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다. 점점 기업가 정신이 상실되고 있는 시점에서 정 회장의 기록들은 한국만의 독특한 경영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화제의 신간' 정주영 리더십 재조명
‘정주영은 살아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과 철학을 재조명한 서적도 잇달아 출판되고 있다. 그중에서 <정주영은 살아있다>(도서출판 솔)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기성세대는 물론 2∼30대 젊은이들이 정주영 부활가를 부르고, 피터 드러커를 비롯한 세계의 석학들이 정주영 회장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정주영을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이 정주영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김문현 현대중공업 자문역)는 그 답을 정주영의 리더십에서 찾고 있다. 바로 도전, 신용, 긍정, 창의, 이타의 리더십이다. 현대그룹 문화실에서 소 떼 방북, 금강산 관광 등 정주영의 홍보 전략을 담당했던 필자는 정주영의 어록과 에피소드를 보다 친숙한 언어로 재해석했다. 또한 사진 한 장만으로 정주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귀한 사진을 대거 수록했다. 게다가 에피소드 말미에 필자의 넓고 옅은 지식을 보너스로 채워 넣음으로써 바쁜 현대인들의 구미를 당긴다.

필자는 “10만명에 육박하는 청년실업 속에 도전정신은 희석되고 열정페이에 청년들이 위축되고 있다”며 “현재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정주영의 다소 투박한 어록과 일화는 젊은이들에게 다시금 도전정신과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전했다.

필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19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현대그룹 문화실 홍보팀장으로 재직하면서 정 회장의 홍보전략을 담당해왔다. 현대중공업 홍보실장과 인재교육원장직을 거친 뒤 2014년부터 울산대학병원, 현대백화점, 현대해상화재, 현대미포조선 등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정주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정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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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