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전 국민이 쫓는 조희팔

사기꾼 뒤봐준 거물급 해결사 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58)은 정말 살아있는 걸까. 광범위한 검경 로비 의혹과 중국 밀항, 석연찮은 사망 발표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8년 미스터리’가 드러날 수 있을까. 조씨의 핵심 측근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국내 송환을 앞두면서 ‘단군 이래 최대 다단계 사기’로 불리는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조희팔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10대 시절부터 돈을 벌기 위해 대구에 터를 잡아 일용직과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조씨가 다단계 사업에 발을 들인 것은 형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말 죽었나
곳곳서 목격
 
형이 다니던 다단계 회사 에스엠케이(SMK)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2004년 10월 건강용품 대여 회사인 비엠시(BMC)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투자금을 모아 골반교정기, 안마기 등을 사들인 뒤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빌려주고 대여금을 받았다. 조씨는 한 계좌당 440만원을 투자하면 매일 3만5000원씩 8개월 동안 581만원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32%의 고수익이 보장되는 다단계 사업이었다.
 
수익이 크게 나지 않자 조씨는 새로운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약속한 수익금을 지급했다. 조씨는 회사명을 ‘엘틴’ ‘벤스’ 등으로 바꾸며 10여개 법인을 세웠고 각 법인에 자신의 측근을 대표로 앉히는 방식으로 수사망을 피했다. 하지만 아랫돌을 빼 윗돌을 괴는 방식의 사업은 한계가 뚜렷했다. 수익금 지급이 불가능해지자 조씨는 2008년 10월 도주했다. 
 

조씨는 지명수배에도 불구하고 중국 밀항에 성공했다. 해경은 조씨의 밀항을 도운 양식업자 박모씨의 제보를 받고도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해경은 당시 “밀항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조씨인지 몰랐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보를 받고 체포에 실패한 것을 두고 해경 안에 조씨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검찰은 5년 동안의 피해액을 2조원대로 파악하고 있으나, 피해자들은 6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수도 2만∼10만명으로 차이가 크다. 법원은 조씨 등의 1심 판결문에서 사기 피해액을 2조5620억원, 피해자를 2만4599명으로 명시했다. 이 사건 수사는 조씨와 그의 최측근 4인방이 검찰·경찰 수사가 본격화된 2008년 말 중국으로 달아나면서 진전되지 못했다. 
 
단군이래 최대 4조 다단계 사기
중국으로 밀항한 뒤 장례 소식
 
흐지부지됐던 수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2012년이었다. 경찰은 2012년 2월 조씨의 공범인 황모씨가 자수하고, 최모씨 등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자 재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경찰이 2012년 5월 조씨의 중국 사망진단서와 조씨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장례식 동영상 등을 근거로 ‘조씨가 2011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고 발표한 뒤 수사는 힘을 잃었다.
 
조씨의 핵심 측근이자 2인자인 강태용(54)이 검거되면서 재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조씨의 측근인 강씨가 도피 7년 만에 중국 공안에 검거되면서 사건 수사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씨 사건을 수사 중인 대구지검은 지난 12일 “강씨가 송환되는 대로 조희팔 사건 전반에 대한 수사를 다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강씨의 ‘입’에 기대를 걸고 있다. 강씨는 조씨의 밀항을 돕고 중국 도피 생활도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씨의 생사 및 중국에서의 행적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을 수 있다. 대검 국제협력단은 지난주 초 대구지검으로부터 강씨 소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즉각 중국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대검 관계자는 “중국 당국이 10여명의 특별팀을 꾸려 검거 의뢰 4일만에 강씨를 붙잡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2012년 5월 경찰의 조씨 사망 발표 이후에도 사안을 종결하지 않고 ‘기소중지’ 상태로 조씨의 행방을 쫓아왔다. 같은 해 9월 중국 측에 ‘조씨의 생사를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보낸 뒤에도 법무협렵관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씨 소재파악 협조를 요청해 왔다. 
 
최측근 검거
진상 밝혀지나
 
조씨가 살아있다는 핵심 증거가 공개됐다. 그 동안 계속 조씨가 살아있다는 의혹만 제기된 가운데 조씨가 살아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됐다. 그동안 조씨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씨의 조카 ㄱ씨와 조씨 측근이라는 ㄴ씨의 통화 내용을 녹음한 파일에는 조씨가 전 검찰 고위간부 등을 상대로 구명 로비를 벌였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조씨가 중국에서 도피 중이던 2011년 변호사가 현지에서 조씨를 만났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두 사람이 통화한 시점은 2012년 2∼3월로 알려졌다. 파일은 총 23분 분량이다. 
 
통화는 조씨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두 사람이 여러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ㄱ씨는 특히 “삼촌(조희팔)이 노발대발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등 ‘삼촌이~했다’는 식으로 여러번 말하고 있다. 
 
ㄱ씨와 ㄴ씨가 통화한 녹취록 일부를 보면 ㄱ씨는 “근데 그 A씨가예. 중국 공안부에 협조요청을 했다고 카는데. B변호사가 일을 한다 카는 게 아니라 카면서 (삼촌이) 그래가 막 성을 막 내시더라고예”라고 말했다. 또 ㄱ씨는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예. 삼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시더라고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조씨의 생존설은 줄기차게 제기 돼 왔다. 중국에서 조씨가 살아 있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조씨가 중국 도피 생활을 하며 성형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골프장이나 술집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잇따라 나오기도 했다.
 
녹음파일 내용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밝힌 조씨의 사망 시점(2011년 12월) 이후에도 조씨가 살아 있었고 검찰 고위층 등에 구명 로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씨와 수사기관의 유착관계가 속속 드러나면서 그의 생존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 동안 조씨가 검·경과 정치권에 대한 금품 로비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 관련 사건의 판결문에 따르면 강씨는 수사기관의 압박이 거세지자 조씨를 대신해 자신의 고교 인맥을 동원한 로비에 나섰다. 
 
먼저 강씨는 고교 동문인 김광준 전 검사에게 건넨 것으로 확인된 액수만 2억7000만원에 이른다. 김 전 검사는 뇌물수수 사건으로 2014년 5월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강씨는 또 2007년 3월 당시 부산지검 부장검사로 재직하던 김 전 검사와 대구 일대에서 수시로 술자리를 가졌다. 이후 2008년 5월부터 10월까지 “불법 다단계 유사수신 수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돈을 건넸다. 
 
 
강씨는 2008년 주위에 “내 친구가 부장검사다. 서울에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다. 당시 김 전 검사의 다이어리에는 강씨의 영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된 점에 비춰보면 강씨의 중국 도피에 관여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 외에도 전직 검찰서기관 오모씨가 조씨 수사 무마 부탁과 함께 2억7000만원과 15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형이 확정됐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피해액 6조원 
어디에 은닉?
 
경찰은 권모 전 총경 등 5명의 전직 경찰관이 현역시절 조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권 전 총경은 대구지방경찰청 강력계장이던 2008년 조씨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김모 전 경위는 권 전 총경으로부터 1억원을 건네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대구지방경찰청은 또 2008년 1월 강씨에게 차량구입비 등의 명목으로 수차례 걸쳐 56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동부경찰서 지능팀에 근무하던 안모 경사를 얼마 전에 구속했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숨긴 것으로 밝혀져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앞서 2013년 조씨의 자금 관리책인 대구지방경찰청 소속 임모 전 경사, 조씨 밀항 후 2008년 중국에서 강씨로부터 골프 접대 등을 받은 정모 전 경사도 각각 구속기소 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30억원의 로비자금은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강씨는 앞선 로비 사건에서 돈 전달의 핵심적인 구실을 했고, 조씨의 ‘오른팔’로 다단계 사업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강씨의 국내 송환으로 조씨를 비호한 세력의 실체가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거수일투족 의혹과 의문

정관계 추가 배후세력 추적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당사자인 박관천 전 경정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경정은 2011년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장으로 이 사건을 전담하고 있었다. 또 2011월 12월 조씨가 중국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박 전 경정은 “조씨가 중국 청도의 식당에서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숨졌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응급진료기록부, 사망진단서, 화장증, 장례식 동영상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중국 현지 의사가 작성한 사망진단서는 공식 입증자료라고 보기엔 조악하다는 평가가 나왔고, 더욱이 장례식장에서 입관돼 있는 시신을 동영상으로 촬영한다는 것 자체도 정서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때문에 사망이 조작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고, 경찰 내부에서도 조씨가 의사를 매수했을 가능성까지 나왔지만 경찰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지난 13일 강신명 경찰청장은 조씨가 사망했다는 것에 대해 과학적 물증이 없다고 밝혔다. 강 청장은 조씨 사망 발표 당시 경찰청 수사국장으로 근무했다. 강 청장은 “중국 측에서 보낸 자료가 있는데, 이걸 보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며 “명확한 것은 조씨가 사망했다고 할만한 과학적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병원의 진단서나 화장장의 화장증만 보고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섣불렀다고 과오를 인정한 것이다. 
 
강 청장은 다만 “생존 반응이 없는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생존반응이란 주변인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피의자의 동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외사기능첩보에서 조씨의 생존을 뒷받침할 만한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강씨 역시 7년간 도피해 있었지만, 이렇다 할 생존 반응이 보고된 바 없다. 

속속 드러나는
돈로비 정황들
 
수사기관이 찾아낸 조씨의 은닉재산은 1200억원 규모다. 이 가운데 710억원은 조씨의 재산을 숨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현씨가 피해자 구제 명목으로 법원에 공탁했다. 2010년 조씨 등을 상대로 먼저 소송을 내 대법원에서 피해금액을 확정받은 280여명이 지난해 나머지 피해자 1만6000여명을 상대로 공탁금을 먼저 가져가겠다는 소송을 냈다. 조씨의 은닉재산이 추가로 나오더라도 국고로 환수될지 피해자들에게 돌아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조희팔 사건 일지
 
▲2008.10=경찰 4조원대 사기 행각 벌인 혐의로 조희팔 등 일당 수배.
▲2008.12.09=조희팔 중국으로 밀항.
▲2009.04.01=조희팔 일당 중 김모씨 등 임원급 2명과 권모씨 등 센터장급 13명 추가 구속.
▲2010.10.11=사기 피해자 105명이 조희팔 등 8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
▲2012.05.21=경찰, 중국으로 밀항한 조희팔 지난해 12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발표. 
▲2012.11.26=경찰, 중국 공안에 조희팔 생존 여부 재확인 요청.
▲2013.03.04=조희팔의 자금을 관리한 전직 경찰 임모씨 등 3명 불구속 기소.
▲2014.12.18=검찰, 사기범 조희팔 1200억원대 은닉재산 확인.
▲2015.10.10=조희팔 최측근인 강태용 도피 7년 만에 중국에서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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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