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전 국민이 쫓는 조희팔

사기꾼 뒤봐준 거물급 해결사 있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58)은 정말 살아있는 걸까. 광범위한 검경 로비 의혹과 중국 밀항, 석연찮은 사망 발표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8년 미스터리’가 드러날 수 있을까. 조씨의 핵심 측근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국내 송환을 앞두면서 ‘단군 이래 최대 다단계 사기’로 불리는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조희팔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10대 시절부터 돈을 벌기 위해 대구에 터를 잡아 일용직과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조씨가 다단계 사업에 발을 들인 것은 형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말 죽었나
곳곳서 목격
 
형이 다니던 다단계 회사 에스엠케이(SMK)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2004년 10월 건강용품 대여 회사인 비엠시(BMC)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투자금을 모아 골반교정기, 안마기 등을 사들인 뒤 목욕탕이나 이발소에 빌려주고 대여금을 받았다. 조씨는 한 계좌당 440만원을 투자하면 매일 3만5000원씩 8개월 동안 581만원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32%의 고수익이 보장되는 다단계 사업이었다.
 
수익이 크게 나지 않자 조씨는 새로운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약속한 수익금을 지급했다. 조씨는 회사명을 ‘엘틴’ ‘벤스’ 등으로 바꾸며 10여개 법인을 세웠고 각 법인에 자신의 측근을 대표로 앉히는 방식으로 수사망을 피했다. 하지만 아랫돌을 빼 윗돌을 괴는 방식의 사업은 한계가 뚜렷했다. 수익금 지급이 불가능해지자 조씨는 2008년 10월 도주했다. 
 

조씨는 지명수배에도 불구하고 중국 밀항에 성공했다. 해경은 조씨의 밀항을 도운 양식업자 박모씨의 제보를 받고도 그를 체포하지 못했다. 해경은 당시 “밀항자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조씨인지 몰랐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보를 받고 체포에 실패한 것을 두고 해경 안에 조씨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검찰은 5년 동안의 피해액을 2조원대로 파악하고 있으나, 피해자들은 6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수도 2만∼10만명으로 차이가 크다. 법원은 조씨 등의 1심 판결문에서 사기 피해액을 2조5620억원, 피해자를 2만4599명으로 명시했다. 이 사건 수사는 조씨와 그의 최측근 4인방이 검찰·경찰 수사가 본격화된 2008년 말 중국으로 달아나면서 진전되지 못했다. 
 
단군이래 최대 4조 다단계 사기
중국으로 밀항한 뒤 장례 소식
 
흐지부지됐던 수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2012년이었다. 경찰은 2012년 2월 조씨의 공범인 황모씨가 자수하고, 최모씨 등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자 재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경찰이 2012년 5월 조씨의 중국 사망진단서와 조씨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장례식 동영상 등을 근거로 ‘조씨가 2011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했다’고 발표한 뒤 수사는 힘을 잃었다.
 
조씨의 핵심 측근이자 2인자인 강태용(54)이 검거되면서 재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조씨의 측근인 강씨가 도피 7년 만에 중국 공안에 검거되면서 사건 수사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씨 사건을 수사 중인 대구지검은 지난 12일 “강씨가 송환되는 대로 조희팔 사건 전반에 대한 수사를 다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강씨의 ‘입’에 기대를 걸고 있다. 강씨는 조씨의 밀항을 돕고 중국 도피 생활도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씨의 생사 및 중국에서의 행적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을 수 있다. 대검 국제협력단은 지난주 초 대구지검으로부터 강씨 소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즉각 중국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대검 관계자는 “중국 당국이 10여명의 특별팀을 꾸려 검거 의뢰 4일만에 강씨를 붙잡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2012년 5월 경찰의 조씨 사망 발표 이후에도 사안을 종결하지 않고 ‘기소중지’ 상태로 조씨의 행방을 쫓아왔다. 같은 해 9월 중국 측에 ‘조씨의 생사를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보낸 뒤에도 법무협렵관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씨 소재파악 협조를 요청해 왔다. 
 
최측근 검거
진상 밝혀지나
 
조씨가 살아있다는 핵심 증거가 공개됐다. 그 동안 계속 조씨가 살아있다는 의혹만 제기된 가운데 조씨가 살아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됐다. 그동안 조씨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씨의 조카 ㄱ씨와 조씨 측근이라는 ㄴ씨의 통화 내용을 녹음한 파일에는 조씨가 전 검찰 고위간부 등을 상대로 구명 로비를 벌였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조씨가 중국에서 도피 중이던 2011년 변호사가 현지에서 조씨를 만났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두 사람이 통화한 시점은 2012년 2∼3월로 알려졌다. 파일은 총 23분 분량이다. 
 
통화는 조씨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두 사람이 여러 문제를 상의하는 내용이다. ㄱ씨는 특히 “삼촌(조희팔)이 노발대발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등 ‘삼촌이~했다’는 식으로 여러번 말하고 있다. 
 
ㄱ씨와 ㄴ씨가 통화한 녹취록 일부를 보면 ㄱ씨는 “근데 그 A씨가예. 중국 공안부에 협조요청을 했다고 카는데. B변호사가 일을 한다 카는 게 아니라 카면서 (삼촌이) 그래가 막 성을 막 내시더라고예”라고 말했다. 또 ㄱ씨는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예. 삼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시더라고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조씨의 생존설은 줄기차게 제기 돼 왔다. 중국에서 조씨가 살아 있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조씨가 중국 도피 생활을 하며 성형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골프장이나 술집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잇따라 나오기도 했다.
 
녹음파일 내용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밝힌 조씨의 사망 시점(2011년 12월) 이후에도 조씨가 살아 있었고 검찰 고위층 등에 구명 로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씨와 수사기관의 유착관계가 속속 드러나면서 그의 생존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 동안 조씨가 검·경과 정치권에 대한 금품 로비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 관련 사건의 판결문에 따르면 강씨는 수사기관의 압박이 거세지자 조씨를 대신해 자신의 고교 인맥을 동원한 로비에 나섰다. 
 
먼저 강씨는 고교 동문인 김광준 전 검사에게 건넨 것으로 확인된 액수만 2억7000만원에 이른다. 김 전 검사는 뇌물수수 사건으로 2014년 5월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강씨는 또 2007년 3월 당시 부산지검 부장검사로 재직하던 김 전 검사와 대구 일대에서 수시로 술자리를 가졌다. 이후 2008년 5월부터 10월까지 “불법 다단계 유사수신 수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돈을 건넸다. 
 
 
강씨는 2008년 주위에 “내 친구가 부장검사다. 서울에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다. 당시 김 전 검사의 다이어리에는 강씨의 영문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된 점에 비춰보면 강씨의 중국 도피에 관여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 외에도 전직 검찰서기관 오모씨가 조씨 수사 무마 부탁과 함께 2억7000만원과 15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형이 확정됐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피해액 6조원 
어디에 은닉?
 
경찰은 권모 전 총경 등 5명의 전직 경찰관이 현역시절 조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권 전 총경은 대구지방경찰청 강력계장이던 2008년 조씨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김모 전 경위는 권 전 총경으로부터 1억원을 건네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대구지방경찰청은 또 2008년 1월 강씨에게 차량구입비 등의 명목으로 수차례 걸쳐 56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동부경찰서 지능팀에 근무하던 안모 경사를 얼마 전에 구속했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숨긴 것으로 밝혀져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앞서 2013년 조씨의 자금 관리책인 대구지방경찰청 소속 임모 전 경사, 조씨 밀항 후 2008년 중국에서 강씨로부터 골프 접대 등을 받은 정모 전 경사도 각각 구속기소 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30억원의 로비자금은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강씨는 앞선 로비 사건에서 돈 전달의 핵심적인 구실을 했고, 조씨의 ‘오른팔’로 다단계 사업의 재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강씨의 국내 송환으로 조씨를 비호한 세력의 실체가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거수일투족 의혹과 의문

정관계 추가 배후세력 추적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당사자인 박관천 전 경정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경정은 2011년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장으로 이 사건을 전담하고 있었다. 또 2011월 12월 조씨가 중국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박 전 경정은 “조씨가 중국 청도의 식당에서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숨졌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응급진료기록부, 사망진단서, 화장증, 장례식 동영상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중국 현지 의사가 작성한 사망진단서는 공식 입증자료라고 보기엔 조악하다는 평가가 나왔고, 더욱이 장례식장에서 입관돼 있는 시신을 동영상으로 촬영한다는 것 자체도 정서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때문에 사망이 조작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고, 경찰 내부에서도 조씨가 의사를 매수했을 가능성까지 나왔지만 경찰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지난 13일 강신명 경찰청장은 조씨가 사망했다는 것에 대해 과학적 물증이 없다고 밝혔다. 강 청장은 조씨 사망 발표 당시 경찰청 수사국장으로 근무했다. 강 청장은 “중국 측에서 보낸 자료가 있는데, 이걸 보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며 “명확한 것은 조씨가 사망했다고 할만한 과학적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병원의 진단서나 화장장의 화장증만 보고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섣불렀다고 과오를 인정한 것이다. 
 
강 청장은 다만 “생존 반응이 없는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생존반응이란 주변인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피의자의 동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외사기능첩보에서 조씨의 생존을 뒷받침할 만한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강씨 역시 7년간 도피해 있었지만, 이렇다 할 생존 반응이 보고된 바 없다. 

속속 드러나는
돈로비 정황들
 
수사기관이 찾아낸 조씨의 은닉재산은 1200억원 규모다. 이 가운데 710억원은 조씨의 재산을 숨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현씨가 피해자 구제 명목으로 법원에 공탁했다. 2010년 조씨 등을 상대로 먼저 소송을 내 대법원에서 피해금액을 확정받은 280여명이 지난해 나머지 피해자 1만6000여명을 상대로 공탁금을 먼저 가져가겠다는 소송을 냈다. 조씨의 은닉재산이 추가로 나오더라도 국고로 환수될지 피해자들에게 돌아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조희팔 사건 일지
 
▲2008.10=경찰 4조원대 사기 행각 벌인 혐의로 조희팔 등 일당 수배.
▲2008.12.09=조희팔 중국으로 밀항.
▲2009.04.01=조희팔 일당 중 김모씨 등 임원급 2명과 권모씨 등 센터장급 13명 추가 구속.
▲2010.10.11=사기 피해자 105명이 조희팔 등 8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
▲2012.05.21=경찰, 중국으로 밀항한 조희팔 지난해 12월 현지에서 사망했다고 발표. 
▲2012.11.26=경찰, 중국 공안에 조희팔 생존 여부 재확인 요청.
▲2013.03.04=조희팔의 자금을 관리한 전직 경찰 임모씨 등 3명 불구속 기소.
▲2014.12.18=검찰, 사기범 조희팔 1200억원대 은닉재산 확인.
▲2015.10.10=조희팔 최측근인 강태용 도피 7년 만에 중국에서 검거.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