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찮은 박근혜정부 폭풍사정 막후

위기의 영일만 친구들 '아~옛날이여!'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경북 영일·포항 출신의 공무원(5급 이상) 모임인 '영포회'는 지난 정권 당시 청와대를 비롯해 정·재계의 요직을 꿰찼다. 영포회와 가까우면 권세를 누렸고, 일부는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다. 그 정점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이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 멘토로 알려진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실세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이 진용을 꾸렸다. 정권이 바뀌고 3년차가 돼서야 영포회에 대한 사정작업이 재개됐다. 총선을 앞둔 시점이다. '영일만 친구들'을 함께 불렀던 이들은 사면초가에 놓였다.

"SD(이상득 전 의원)까진 가지 않겠어? 모르지. 중간에 나도 모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자세한 건 지켜보자고."

지난 4월 검찰 관계자는 포스코 수사의 향배를 묻는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앞서 <일요시사>는 지난 3월30일자 '표적수사설 포스코 사정 난항 막전막후'란 기사에서 포스코 수사가 시작된 경위를 알린 바 있다.

이상득 조준
포스코 사정

포스코에 대한 사정작업은 올 1월 초 시작됐다. 사실상 BH(청와대)가 내린 하명수사다. 핵심 의혹 가운데 새로운 것은 없었다. 검찰은 압수수색을 벌이기 위한 구실 찾기에 골몰했다.

이 와중에 포스코 동남아사업단 부실 감사 결과가 검찰에 포착됐다. '정준양체제'에 반감을 갖고 있던 내부 인사는 검찰 및 신문기자와 접촉했다. 유명 언론매체가 취재에 들어가자 포스코가 '억대 인사'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검찰은 이번 수사 초기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과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을 통해 이상득 전 의원을 법정에 세우겠다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양정(정준양·정동화)으로 향하는 '인의 장막'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정 전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지름길'로 삼았던 동양종합건설에 대한 수사 역시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당초 검찰은 배성로 전 동양종합건설 회장을 수사해 이 전 의원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배 전 회장은 영장실질심사에서 풀려났다.

지난 정권 당시 검찰이 묵살한 정 전 회장의 배임 의혹이 새로운 것 마냥 언론에 터져 나왔다. 검찰 안팎에서 '무리한 수사' '뒷북 수사'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수사 선상에 오른 10여개의 하청업체 대표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닫았다.

지난 8월 무렵 'SD'라는 이름이 언론사 사회면에 등장했다. 애피타이저보다 메인요리가 먼저 나온 격이다. 검찰은 정 전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연이어 기각된 후 "수사를 서둘러 마무리 짓겠다"고 했다가 돌연 '이상득 카드'를 꺼냈다. 수사 방향을 돌리자 물꼬가 터졌다.

경북 영일·포항 출신들 나란히 수사선상
포스코 수사로 물꼬…이상득 소환 초읽기

검찰은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코켐텍과 티엠테크 간 부당거래를 적발했다. 티엠테크는 이 전 의원의 측근 박모씨가 대표를 역임한 회사다. 박씨는 정 전 회장의 취임과 함께 티엠테크 지분을 매입해 수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다. 또 처가쪽 인척을 동원해 10억여원의 임금을 챙겼다. 이 중 일부는 이 전 의원에게 건네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씨의 계좌를 확인하는 한편 이 전 의원과 관련된 자금흐름을 추적 중이다.

이 전 의원에 대한 수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검찰은 투트랙 전략을 펴고 있다. 또 다른 축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연루된 '보은 인사' 의혹이다. 지난 2009년 포스코 회장 자리를 놓고 정 전 회장과 갈등을 빚은 윤석만 전 포스코건설 회장은 이달 초 비밀리에 검찰에 소환됐다.


윤 전 회장은 박 전 차관으로부터 직접 압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박 전 차관은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서 이사회 관계자들과 만나 "정준양을 회장으로 뽑으라"라며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박영준과 만나려면 수천만원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 박 전 차관이 몇몇 이권에 개입했다는 투서도 돌았다. 여러 정황상 박 전 차관은 잠재적인 수사대상으로 지목된다. 또 소문의 진위와는 별개로 박 전 차관은 이 전 의원의 '분신'을 자처해왔던 만큼 검찰 소환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검찰 입장에서 포스코 사정은 언론플레이만 잘하면 실패할 수 없는 수사다. 사건에 연루된 정치권 이해관계자가 많은 탓이다. 보은 인사 의혹은 이사회 당시 의결권을 갖고 있던 안철수 의원을 겨눌 수 있는 꽃놀이패다. 포스코 협력사와 결탁해 금품을 전달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이병석 의원 역시 검찰 소환이 불가피하다. 이 의원은 포항에서만 4선을 한 중진의원이다.

고개 숙인
영일만 친구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팬클럽 MB연대도 수사대상이다. MB연대 대표 한모씨가 대표로 있는 청소 용역업체 E사는 티엠테크와 유사한 방식으로 일감을 몰아 받아 이득을 챙긴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 '키맨'들의 혐의가 하나둘 벗겨지면서 유보를 거듭했던 정 전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재검토되고 있다.

최근 사정기관 관계자는 포스코 수사가 "이 전 의원과 영포회를 노린 기획수사"라고 말했다. 수사 핵심 증인을 보호해가며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한 검찰은 수사 착수 6개월여 만에 '영일만 친구들'을 사면초가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 수사가 지연되면서 탈도 많았지만 소기의 성과는 이뤄냈다는 평가다.

단 현 수사팀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김진태 검찰총장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다. 검찰 관계자는 "지금껏 나온 것 외에 큰 건이 몇 개 더 있는데 할지 안할지는 다음 수뇌부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귀띔했다. 힘을 잃은 김 총장 대신 포스코 수사와 관련한 주요 '사인'은 청와대에서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들어 막을 올린 대한체육회 수사는 영포회 사정의 연장선에 있다. 검찰은 지난 15일 보조금 횡령 등의 혐의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수사의 실질적인 타깃은 김정행 대한체육회장이다. 앞서 <일요시사>는 지난 6월10일자 '<단독> 검찰, 문체부-대한체육회 갈등 내사 왜?'라는 기사에서 검찰의 사정 움직임을 전한 바 있다.

대한체육회 내사는 체육단체 통합 과정에서 불거진 내부 권력다툼이 빌미가 됐다. 정부 및 여당의 시각에서 대한체육회는 포기할 수 없는 '표밭'이다.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한체육회는 선거를 앞두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이다.

바꿔 말하면 대한체육회 수사는 김 회장에 대한 청와대의 신뢰가 바닥났음을 의미한다. 김 회장은 동지상고 출신으로 이 전 대통령과 동창이며, 영포회의 일원으로도 알려졌다. 체육계 관계자는 "김 회장의 옷을 벗기고 믿을만한 친박 인사를 대한체육회 수장에 앉히려는 속셈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포스코 판박이
농협중앙회 수사

농협중앙회에 대한 수사도 가속이 붙었다. 검찰은 'MB맨'으로 분류된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을 전방위 압박하고 있다. 지난 23일 검찰은 서울 충무로의 한 인쇄업체를 압수수색해 농협중앙회와의 거래내역 장부 등을 확보했다.


검찰은 최 회장의 측근인 손동우 전 경주 안강농협 이사가 해당 업체에 발주 물량을 몰아준 뒤 뒷돈을 챙긴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검찰은 농협물류의 협력업체로부터 수억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손 전 이사를 구속했다. 검찰은 손 전 이사를 통해 최 회장의 비리를 들춰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실제 시중엔 농협의 대형 공사 발주와 관련한 범죄 첩보가 나돌고 있다. 최 회장의 또 다른 측근이 연루됐으며, 한 방송사가 취재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최 회장은 올해 말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총선 출마를 검토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 수사와 함께 공천은 물 건너 간 모습이다.

민영진 전 KT&G 회장에 대한 수사도 영포회 사정의 한 갈래로 여겨진다. 검찰 관계자는 "최 회장과 민 전 회장 모두 MB때 사람인데 VIP 입장에선 곱게 보일 리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체육회·농협·KT&G 동시수사…영포회 타깃
총선 앞둔 TK연합 SD 공천비리 '만지작'

검찰은 지난달 13일 KT&G 협력업체 3곳의 배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사건의 몸통으로는 민 전 사장을 직접 언급했다. "협력업체가 만든 돈이 민 전 사장에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또 민 전 사장이 자회사를 인수·운영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포착해 수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 전 시장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지난 7월29일 KT&G 사장직에서 사퇴했다.

공교롭게도 검찰 수사의 칼날은 모두 '영포라인'을 향하고 있다. 정치성향으로 보면 친이계다. 같은 경북 출신이라도 범대구권(친박계)과 범포항권은 결이 다르다. 때문에 이번 수사는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친박계가 친이계를 손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유는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기싸움이 유력하다. 포항 일대의 패권을 쥐고 있는 영포회를 공격해 그들이 선거에 나서거나 도움을 줄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포항 패권의 맨꼭대기에는 MB, 바로 이 전 대통령이 있다.

박근혜정부의 이번 MB사정은 유착 구조에 초점을 맞췄던 '방산비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현직 국회의원을 직접 수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다. 검찰은 이 전 의원이 연루된 공천비리와 관련한 내사를 끝냈다. 경북 지역 현역 국회의원 A가 내사망에 걸려들었다.

A의원은 포스코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검찰은 지난 정부 당시 총선을 앞두고 이 의원이 경북지역 각 지역구를 조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A의원으로부터 수억원의 공천헌금을 챙겼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지역구 조정 과정에서 낙오한 일부 현역의원은 공기업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청와대는 내년 총선에서 친박계 다수 당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유하자면 모와 정을 들고 박힌 친이계를 빼내야 하는 처지다. 대통령 퇴임 이후가 걸린 선거라 청와대로서는 사활을 걸어야 한다. 이시형(이 전 대통령의 아들)씨가 이사로 있는 다스(DAS)에 대한 수사 가능성이 흘러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이명박 실소유주' 의혹이 불거진 다스는 포스코보다도 수사의 난이도가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무리하게  들어갔다가는 역풍을 맞게 될 우려가 있다. 한식 세계화 사업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윤옥 여사를 겨눈 수사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명분이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다.

친이계 빼고
친박계 점령

야권이 고삐를 쥐고 있는 4대강·자원외교 비리는 이번 사정작업에서 배제된 것으로 전해진다. 야당이 주도한 모양새라 현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사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린 정용욱씨의 소환 가능성은 낮게 점쳐진다. 정씨는 지난 2011년 최 전 위원장을 대신해 억대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이자 해외로 출국한 뒤 잠적했다. 검찰은 현재까지 정씨의 강제 구인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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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