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40)최수현 보스코산업 회장

개발자금 빼돌려 무차별 뇌물 살포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40화는 96억5500만원을 체납한 최수현 보스코산업 회장이다.

"최수현 보스코산업 회장은 A가 소유한 서울 종로구 부동산 대금을 하루 빨리 지불하게 하소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소재 부동산을 소유한 A씨는 자신이 출석한 교회에서 지난 2007년 이같이 기도했다. 보스코산업 회장으로 알려진 최수현씨는 1990년 전후부터 서울 신문로 일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해 온 건설업자다. 그는 서울시와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세 차례 구속

최씨가 법인 대표자인 정도공영은 1992년 5월부터 주민세 등 4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서울시가 받을 세금은 19억3500만원이다. 최씨 개인은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서 (주)거삼 대표이사로 소개됐다. 2005년부터 부가가치세 등 7건의 세금을 체납했고, 국세청이 거둘 세금은 27억900만원이다.

최씨는 보스코산업 회장이자 정도공영 대표, (주)거삼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주)거삼은 2001년부터 법인세 등 6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국세청이 과세한 세금은 35억3900만원이다. 보스코산업은 2005년부터 종합부동산세 등 7건의 세금을 체납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세청이 징세할 세금은 14억7200만원이다.

국세청 고액체납자 명단에 기재된 보스코산업 대표는 이모씨다. 등기부등본상 이씨는 최씨와 동업자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들은 보스코산업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소유주 최씨가 이씨를 명목상 대표로 앞세우고, 주식은 친인척에게 맡겨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였다. 이외에도 최씨가 대표로 있거나 실소유주로 지목된 회사는 알려진 것만 서너 개가 넘었다.


1990년 무렵 최씨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2-3, 2-4, 2-5, 2-8지구 도심 재개발과 관련해 '건설브로커'로 암약했다. 정도공영과 (주)거삼은 이 재개발 사업의 시행사였다. 우선 2-3구역의 개발권을 따낸 업체는 창조종합건설이다. 1989년 사업시행인가를 취득했고, 1990년 회사는 사명을 기림개발로 변경했다. 1992년 8월 기림개발은 700억원대 부채를 남기고 부도를 맞았다.

기림개발의 뒤를 이어 사업권을 따낸 업체가 (주)거삼이다. (주)거삼은 2-8지구의 사업권도 갖고 있었다. 기림개발과 (주)거삼은 뿌리가 같은 사실상 하나의 회사다. 부도를 앞둔 기림개발은 (주)거삼에 일부 사업권을 넘기는 한편 기림종합건설이라는 '위장 회사'를 세웠다. 사업권을 인수한 기림종합건설은 다시 재개발사업 분양권 행사를 정도공영에 위임했다. 기림개발과 정도공영의 대표는 최씨였으며, (주)거삼의 당시 대표는 최씨의 친인척이었다.

기림개발 폐업 후 최씨는 서울 구로구 교통공단 부지를 불하받는 과정에서 사기를 저질러 입건됐다. 불구속 상태였던 그는 취득세 등 32억원가량의 세금을 내지 않은 채 1996년 해외로 도피했다. 최씨 명의의 서울 종로구 신문로 소재 부동산은 서울시에 의해 압류조치됐다. 하지만 최씨의 사기행각은 멈추지 않았다.

해외 출국 전 최씨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소재 재개발 지구에 '지상 18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를 짓겠다'며 필지를 소유한 땅 주인들을 모집했다. 규모 7055㎡의 부지에는 '문화타워'라는 이름의 건물이 착공됐다. 이때가 1993년이다.

서울시 19억3500만원 국세청 77억2000만원
신문로 재개발 사업서 사기혐의 수차례 구속

문제는 최씨가 벌인 사업 규모에 비해 분양실적이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다. 자금난과 함께 공사는 중단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가 닥쳤다. 해외로 도피했던 최씨는 1998년 재개발 인허가 관련 구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또다시 구속됐다.
 

1999년 최씨는 출소했다. 그렇지만 최씨는 재기를 위해 또 다른 '사기'를 계획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거삼의 사업권을 보스코산업으로 넘긴 것이다. '문화타워'는 '킹덤타워'로 이름을 바꿨다. 시공사가 변경됐지만 시행사 대표는 언제나 최씨였다.


이 무렵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막대한 공사비를 끌어 쓸 '담보'였다. 최씨는 대기업과 접촉했다. 보스코산업은 국내 굴지의 시공사와 금융권의 협조를 받아 PF대출을 받았다. 2002년 '킹덤타워'는 '베르시움'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꿨다.

순풍에 돛단 듯 분양은 계속됐다. 최씨는 분양대금을 받아 회사 채무를 갚는 데 썼다. 2001∼2003년까지 보스코산업의 매출 총계는 1000억원이 넘었다. 매출이 늘어날수록 은행 빚은 함께 늘었다. 최씨가 분양대금을 유용한 탓이다. 시공사 한진중공업은 보스코산업이 공사대금을 결제하지 못하자 '베르시움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다. 공정률은 78%였다.

2003년 6월 종로구청은 보스코산업에 분양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격이었다. 분양 사기 피해자들은 관공서에 민원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역시 보스코산업으로부터 320억원가량의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감정가 1800억원에 달했던 건물은 지난해 기준 1100억원대로 폭락했다. 잇따른 법원 경매에도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2008년 9월 최씨는 분식회계를 통해 회삿돈 30여억원을 횡령하고, 수분양자들을 속여 수백억원대 분양대금을 가로챈 혐의 등으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1심에서 징역 3년6월형을 선고 받은 그는 2심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형이 확정됐다. 수감 당시 그가 남긴 파산채권의 총합은 4800억원에 이르렀다.

최씨는 신문로 2-3, 2-4지구에서 발생한 자금을 2-8지구 분양사업 등에 투입했다. 2-8지구의 수분양자에게서 얻은 자금은 다시 서울 동작구 재개발 사업을 위해 빼돌린 것으로 의심됐다. 수백억원의 자금을 이곳저곳 소규모 건설사에 나눠 관리하게 하고, 비자금을 만들어 공무원 등에게 건넸다.

특히 '베르시움' 건설 과정에서 최씨는 대기업 한진중공업과 투자사 삼성생명의 후광을 등에 업고 수분양자들을 꾀었다. 고수익을 약속하며 허위·과장 광고를 일삼았다. 최씨는 건설 사기범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범행 수법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전형적 사기범

신문로 재개발 사업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무분별한 PF대출이다. '부동산 호황'을 이유로 이미 부도를 맞은 것과 다름없는 부실 건설사에 돈을 몰아준 책임은 어떤 핑계로도 면책되지 않는다. 최씨가 남긴 부동산 투기의 '거대한 상흔'은 오늘도 서울 광화문 일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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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