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세금 안 내는 거물들 추적 (39)조혜진 아성에이치디 대표

회사 살리려다 빚더미 앉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39화는 212억9900만원을 체납한 조혜진 아성에이치디(주) 대표다.

아성에이치디(주)는 2003년 11월19일 설립됐다. 아성에이치디(주)의 전신은 자동차 수입 판매업을 주업종으로 신고한 에이원씨엠코리아(주)다. 무역회사로 출발한 아성에이치디(주)는 전체 직원이 10명 남짓한 중소기업으로 소개됐다. 건설회사로 전환한 뒤에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연매출은 500억∼800억원에 달했다. 매출 대부분은 수도권 아파트 개발 사업에서 얻은 분양 수익에 집중됐다.

잘나가다…

회사 법인등기부등본을 살펴보면 아성에이치디(주)의 사업 목적으로는 ▲주택건설업 ▲부동산 분양 및 매매업 ▲부동산 임대업 등이 명시됐다. 회사 자본금은 5000만원에서 2억원을 거쳐 3억원까지 늘었다. 사무실은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 일대를 전전했다. 에이원씨엠코리아(주)의 임원들은 아성에이치디(주)가 건설사업에 뛰어들자 일제히 사임했다. 주식은 회사 대표이사인 조혜진씨와 이사 전모씨, 이들과 특수관계인으로 추정되는 전모씨가 각각 나눠가졌다.

하지만 주식은 곧 휴지조각이 됐다. 아성에이치디(주)는 2011년 사실상 폐업 수순을 밟았다. 개발 과정에서 생긴 거액의 채무를 변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같은 시기 세무당국은 아성에이치디(주)에 세금을 부과했다. 아성에이치디(주)는 국세청과 서울시, 경기도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체납한 세금의 합은 212억9900만원으로 집계됐다.

아성에이치디(주)는 2010년부터 근로소득세 등 3건의 세금을 체납했다. 국세청이 거둘 세금은 145억2200만원이다. 아성에이치디(주)는 2010년 7월부터 지방소득세 등 15건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서울시가 징세할 체납액은 60억6800만원이다.


아성에이치디(주)는 경기도가 지난해 12월 각 관할 지방자치단체로 발송한 공고에서도 이름이 발견됐다. 같은 달 공개된 지자체 시보에는 아성에이치디(주)가 취득세 등 654건의 세금을 체납했고, 밀린 지방세는 7억900만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세금을 받지 못한 고양시는 아성에이치디(주)의 사무실로 수차례 공시송달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60억6800만원 국세청 145억2200만원
연매출 500억 건설사 부동산 담보신탁 소송

하지만 조씨 등은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발송한 우편은 수취인불명으로 처리됐다. 현재 아성에이치디(주)의 사무실은 강남구 삼성동을 떠나 영등포구 문래동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의 자택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이현로에 있는 한 고급 아파트다. 아성에이치디(주)의 전 대표이사 김모씨도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씨는 김씨로부터 2006년 12월 아성에이치디(주)의 대표직을 물려받았다.

아성에이치디(주)가 본격적으로 분양사업을 벌인 시기는 2007~2009년이다. 주무대는 경기도 일산 신도시였다. 시행사 아성에이치디(주)는 사업 파트너로 진흥기업과 임광토건을 선택했다. 2007년 6월 진흥기업이 낸 공시를 보면 진흥기업은 아성에이치디(주)로부터 총 공사비 731억2600만원에 이르는 일산 탄현 임광·진흥아파트 신축공사 계약을 수주한 것으로 돼 있다. 731억2600만은 진흥기업의 당시 매출 대비 14.8%에 해당하는 액수다.

아성에이치디(주)가 시행한 아파트 신축공사는 정부 정책으로 추진된 공공주택 공급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공동 시공사인 임광토건은 자사 브랜드 아파트인 '그대家' 905세대를 분양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채권은행인 경남은행은 일산 탄현 임광·진흥아파트 신축공사와 관련 ABS(자산유동화증권)를 발행해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 경남은행 측은 당시 "분양부담이 적어 원리금 회수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시공사인 진흥기업은 솔로몬상호저축은행 등 금융권 6곳으로부터 280억원을 대출받아 시행사에 안겼다. 당시 진흥기업은 아성에이치디(주) 외에도 여러 중소시행사에 주택PF 보증, 중도금 보증 등을 서주면서 수천억원의 채무를 떠안았다. 진흥기업은 2011년 워크아웃을 선언했다.

아성에이치디(주)도 같은 시기 진흥기업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2010년 12월 기준 작성된 결산보고서를 보면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3억300만원으로 전년대비(300억7000만원) 99%가 줄었다. 토지와 건물 등을 포함한 유형자산 역시 89억9000만원에서 49억2000만원으로 감소했다. 진흥기업, 임광토건 등에서 빌린 단기차입금은 275억4000만원으로 매달 이자를 갚아나가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성에이치디(주)는 아파트 분양계약 해지와 미분양이 잇따르면서 2010년 한 해 동안 239억8800만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계약을 완료한 수분양자들은 분양대금을 반환하라며 아성에이치디(주)를 상대로 원고소가 85억원에 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아성에이치디(주)가 소유한 재산에는 빠짐없이 가압류 처분이 들어왔다. 조씨 등에게 남은 건 채권자들이 보낸 독촉장뿐이었다.

아성에이치디(주)가 채무를 갚을 수 없게 되자 채권자들은 2011년 1월 한국토지신탁을 상대로 '한국토지신탁과 아성에이치디(주) 사이에 체결한 토지신탁 계약을 취소하라'는 내용의 사해행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청구금액은 199억5000만원이었다.

아성에이치디(주)는 회사 자금압박이 심해지자 2009년 11월 한국토지신탁과 부동산담보신탁 계약을 맺고 아파트 부지 등을 위탁했다. 채권자들은 아성에이치디(주)가 재산을 빼돌려 빚을 갚지 않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소송은 2014년 6월에야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다. 법원은 한국토지신탁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아성에이치디(주)가 사해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아성에이치디(주)가 일산 아파트 분양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문제의 부동산을 한국토지신탁에 위탁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 같은 결정이) 주식회사의 체무변제력이나 자력을 회복하고, 관련 금융기관, 대다수 수분양자, 시공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판단 아래 이뤄졌다"라고 판시했다.

비록 누명은 벗었지만 아성에이치디(주)는 법인 소유의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 서울 영등포구 소재 3억원대 오피스텔은 법원 경매에 넘어갔다. 차명으로 관리하던 임차인은 1억여원의 보증금을 강제로 빼앗겼다. 시공사로부터 선분양 받은 5억원대 아파트 서너채도 각각 경매 절차를 밟고 있다. 우선순위 채권자가 많아 세무당국이 세금을 환수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쫓기는 신세

서울시 38세금징수과 관계자는 "체납 기록이 있는 법인의 경우 대부분 폐업한 회사들인데 조사를 해도 세금이 나오지 않는다"라며 "남은 건 법인 대표자에 대한 2차 납세자 지정인데 이 또한 쉽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망해가는 회사를 그래도 자기 돈을 들여 살리고자 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손가락질하기 어렵다"라며 "대다수 사주들은 회사가 어려우면 법인 돈부터 빼돌려 은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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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